▲ 김종 시인

쏘아놓은 화살과 같이 매우 빠른 상태나 물건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로‘쏜살같이’란 말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가는 시간이 참으로 빠르다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그럴 때마다‘눈 떴다 감을 시간이 없다’는 표현을 곧잘 쓴다. 곁눈질할 시간 없이 바삐 살아가다 보면 어느 덧 세월은 가고, 이를 되새김하듯 무시로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단 한번이라도 건곤일척을

을미년 새해가 밝았다. 干支로는 양의 해이다. ‘을미’라는 말은 내포적으로 ‘히말라야 푸른 양(Himalayan blue sheep)’을 의미하는 특별한 해라고 한다. 양의 해인데 그 중에도‘푸른 양’의 해라? 궁금해서 찾아 본 ‘푸른 양’은 히말라야 산록에서 서식하는 “프세우도이스 나야우르”라는 학명의 산양종이라 한다. 가파르고 험준한 바위지형에서 자유자재하며, 때로는 100여 마리가 무리를 지어 활동하기도 하는, 푸른 광택이 나는 이 귀족양은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이라 한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을미년은 일본군의 동물적인 만행으로 국모인 민비가 시해된 비운과 치욕의 기록이 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우리는 한 해를 맞이하는 초입에서 다가올 일 년의 일들에 대한 갖가지 구상과 목표를 세우게 된다. 허나 마무리의 자리에서는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키며 못다 이룬 일들을 탓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모든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려지는 법. 시간은 저마다 다른 느낌 속에 사람 기다리는 법 없이 강물 같은 보폭으로 흘러갈 뿐이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의 여러 상황이나 여건 때문에 의사결정이 지연 되거나 미루어진 채 우물쭈물 세월만 허비한 적이 많다. 어떤 때는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뜻밖의 낭패를 겪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서‘쏜살같이’지나가버린 시간들을 후회하곤 하지만 그러나 어쩌랴. 시간은 이내 엎질러진 한 동이 물처럼 흔적도 없이 잦아들어버린 것을.

잘 알려진 말이지만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우물쭈물 살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인데 그때 가서는 그 어떤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뼈아픈 자성의 시간을 해학성이 넘치는 말로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처음부터 어영부영하거나 우물쭈물 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내 긴장은 풀리고 엄습해온 안이함이나 태만과 적당히 타협을 하게 되고 이내 후회라는 아픔을 간직한 채 아쉬움 많은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 버나드 쇼가 말한 “우물쭈물...”이라는 표현은 정신 바짝 차려서 후회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아포리즘적 메시지가 넘실거린다. 생전의 버나드 쇼는 자신의 말처럼 우물쭈물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다.

1895년에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는 한마디로 치열한 삶을 통해 문학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신랄하고 정확한 논평을 가했던 사람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갖가지 유머와 날카로운 현실감각은 세계인들의 뇌리를 맴돌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2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불세출의 극작가 겸 소설가, 비평가였다. 그럼에도 버나드 쇼는 자신이 목표한 일을 못다 이룬 불특정의 여느 사람처럼 생에 대한 아쉬움을 이 같이 일갈한 것이리라.

순리대로 사는 아름다운 생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고 한다. 이 말 또한 모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치열한 삶을 주문한 것이리라.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이 밀고 가는 가치 있는 일에 건곤일척 자신을 거는 일이라 하겠다. 누구든 매 순간 최선을 다 했다면 결과 또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살아온 세월에 최선을 다 했는가 후회는 없었는가는 새삼스럽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는 경우가 많다. 버나드 쇼 또한 그 같은 깨달음을 나이가 들어서야 득도한 사람처럼 자신의 묘비명에 새기게 한 것은 아닐까.

한 갑자를 넘기고 몇 해를 더 산 사람으로서 지나간 시간을 새삼 되돌아  보는 때가 많다. 흐르기만 하는 시간과 달리 한 해 한 해 쌓여만 가는 것이 나이이고 보면, 거절하지 못하고 헛바퀴 돌 듯 살았던 그간의 많은 일들이 대목대목 아프게 짚어진다. 브레드 피트 주연의‘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자연의 순리를 뛰어넘는 기발한 발상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80세의 외모를 가진 갓난아이 벤자민은 주위의 놀라움 속에서 자라나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이다. 그는 어린 시절 소녀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벤자민은 젊어지는 반면, 데이지는 자연의 순리대로 늙어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가끔씩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허나, 위의 영화처럼 세월이 가면서 계속 젊어지는 사람이 부러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르게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자탄의 의미와 함께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 앞에 쌓아올린 나이가 그리 대수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생애 적 시간은 오랫동안 문학을 하며 살아왔다. 허나 십여 년 전부터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용기를 가지면서 소매를 걷어 올려 그림을 그렸고 그 일로 생에 대한 또 다른 추진력과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어느 날 절대자가 나 자신을 향하여 “당신의 나이를 20년쯤 낮춰주겠다”는 제의를 해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까. 나는 망설임 없는 단호한 어조로  NO할 것 같다. 더 젊게 해 주겠다는 제의는 더없이 고맙지만 지금까지의 세월 또한 후회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았으므로 거절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 터에 다시 나이를 낮추자고 하면 또다시 그만큼을 살아내기 위해 노심초사와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고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뜻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필자의 말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리 보면 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인 파우스트 박사는 영원히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 세월을 살아오면서 후회스러운 대목도 많았다. 허나 대목 대목에서 내 자신이 안아주고 싶을 만큼 되돌아 보인 시간들 또한 많았다는 것도 고백처럼 들려드리고 싶다. 이는 내 자신이 내 자신의 삶을 열정을 다하여 노심초사를 다하여 사랑하며 살아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이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시간이 사람을 기다리는 삶을 엮어낼 수는 없을까.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이 말은 애플창업자인 스티브잡스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장에서 했다는 말이다. 일견 평범한 듯한 이 말은 그럼에도 확신과 애정을 전제한 강한 울림이 있다. 그는 이어지는 말에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며칠 연속 'NO'라는 답을 얻을 때마다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매일 매일의 인생을 마지막처럼

망설이다가 끝나는 생이라면 그처럼 지루하고 부질없는 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추진력 삼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간다. “하수는 결과를 챙기고 고수는 과정을 챙긴다”는 말이 있다. 주어진 시간 시간을 창안의 프로세스로 엮어가는 生이야말로 절대에 가까운 고수의 삶이 아닐까.

우물쭈물하지 않고 강물이 흘러가듯 자신의 추진력으로 밀고 가는 生,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일 터이다. 우물쭈물 하다 보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지나가고 뭉그적거리는 자리에 흉터 같은 후회만 남아 내 자신을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힐 것이다.

새해가 와서 세상이 더없이 새롭다. 생각만의 새로움이 아니기에 내 자신에게 건곤일척을 바라는 세상이 내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그 같은 단 한번만의 새해가 나 자신의 새로운 결심과 추진력을 강물처럼 받아내어 부여받은 한 해의 시간들을 물레방아의 수차처럼 돌리고 돌리며 여기저기에 등촉을 밝힐 것이다.

새해가 왔다. 나는 나를 들뜨게 한 이번 새해에게 나의 각별한 결심을 전하고 히말라야의 험준한 바위서리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는 푸른 양의 종횡무진한 행보를 정중하게 요청할 것이다. 쿠어바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