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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윤영근의 영산강이야기-31.흑산도와 자산어보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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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승인 2006.10.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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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지역에 형성된 어촌마다 당집이 있게 마련인데 진리의 당집에는 특별하게도 처녀 당신이 흑산 본당으로 위엄을 부린다.

흑산 본당인 진리 당에는 처녀귀신이 당당하게 군림하는데 처녀 신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옹기를 가득 실은 배가 흑산도에 들어왔다.옹기상인들 중에는 어린 미소년도 있었다.

옹기 상인들은 한마을에서 사나흘씩 묵으면서 옹기를 팔았는데, 오랜 항해 끝에 지친 외로운 미소년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섬사람들의 수호신이 모셔진 처녀당신 집으로 들어가 기묘한 소리를 내는 피리를 불었다.

그가 분 피리소리는 너무도 구성지고 신묘해서 듣는 이들을 매료시키는 마술 같은 피리소리로 섬 안에 퍼졌다.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미소년의 피리소리는 귀신도 홀리게 했고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았다.

미소년의 기막히게 신묘한 피리소리에 반한 것은 사람과 함께 진리당 안에서 거처하던 처녀당신으로 짜릿한 소리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결국 피리소리에 반한 처녀당신은 미소년을 흑산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ꡒ그놈의 피리소리가 진리당(堂)에 모셔진 처녀신의 마음을 홀랑 반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피리소리의 주인공을 오도 가도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이다.ꡓ

미소년을 연모하는 처녀당신의 뜻이니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옹기장사들은 어쩔 수 없이 미소년만 섬 안에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게 된 소년은 멀어져 가는 배를 쳐다보며 발만 동동 굴렀고 결국 소년은 외로움에 지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미친 듯 피리를 불었고 설움과 굶주림에 빠진 소년은 소나무 밑에서 쓰러진 채 숨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이 숨진 자리에 그를 묻어주었고 처녀당집 안에는 소년을 그린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해마다 정초에는 건강과 풍어를 비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오는데 지금도 한이 서린 소년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이곳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소년이 추울까봐 덮어준 마른 솔잎만이 무덤위에 수북하다. 사실인즉 당집안의 큰 소나무 밑이라서 그늘지기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할 뿐인데도 공연히 뒷골이 오싹해지며 서늘해지는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읍동에는 당 나무로 모시는 팽나무 아래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석탑아래에 있는 우물을 마시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투박한 솜씨의 탑과 석등은 거친 듯하지만 세월의 연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녀 堂神과 미소년 상인의 전설
 
 상라봉 정상에 오르는 길은 지그재그로 ꡐSꡑ자 코스처럼 돌면서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지나왔던 길이 발아래로 낭떠러지처럼 보였다. 상라산 북쪽 능선 따라 돌로 쌓은 성이 상라 산성의 흔적이라고 한다. 소나무 사이로 산성 터가 길게 이어졌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다. 산성은 북쪽 해안에 면해 있기 때문에 해로를 감시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편이다. 산성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았다.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맞춰 쌓았기 때문이다.

흑산도 일주도로의 동백꽃길 따라 굽이굽이 돌고 돌면서 상라봉 정상(226m)에 오르자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도 헤아릴 수없이 많은 어선들이 묶여있는 아름다운 자태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방파제가 감싸 안은 예리 항이 몽땅 드러나 보였다.

흑산도에는 후박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한약재로 귀하게 쓰이는 후박나무의 껍질은 해마다 벗겨도 잘 자란다. 해열제, 소화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후박나무는 속성수이고 또 방풍림 역할도 해준다. 잎은 짙은 녹색으로 동백 잎처럼 두꺼운 편이다.

나무 밑둥을 베어 껍질만 채취하고 나무통은 땔감으로 쓴다. 후박나무는 베어내면 그 자리에서 다시 새순이 나와 자라거나 씨가 떨어져 번식하는데 요즈음은 양묘사업으로 묘목을 대량생산하기도 한다.

흑산도의 일주도로는 산의 중턱에 만들었다. 해안선을 따라 가설하면 공사비용은 적게 들지만, 국립공원지역인 이곳의 바닷가 절경을 훼손해야 하기 때문에 산의 중턱에 만든 산길이 험하고 가파르다. 어느 구간은 포장되지 않은 막자갈 길도 있었다.

노폭이 좁은 곳은 ꡐLꡑ자 빔처럼 산속에 다리를 만들어 붙여 길로 확장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 관광지임을 과시한다. 처음 보는 벽화가 흥미롭다. 흑산도의 절경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다.

 

16년 동안 청년아동교육과 저술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자 꼭대기에 자리한 초가집이 사촌서당이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이 복성재라는 서재를 세우고 서당의 현판은 다산 정약용이 쓴 친필이라고 한다.

손암 정약전은 유배 16년 동안 이곳 청년아동들의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에 몰두하였다. 그가 쓴 자산어보는 흑산도 연해에 사는 물고기, 패류, 조류, 해금, 충수류, 등 227종에 관한 명칭과 분포, 형태, 생태 및 활용 등을 기록한 어류도감이나 물고기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자산이란 흑산이란 뜻이다. 선생은 가족에게는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띄울 때 검을 흑(黑)자를 쓰지 않고 현(玄)자를 썼다고 한다. 검은 색은 두렵고 무서움이 떠올려진다고 해서 피했던 것이다. 현행 옥편에서는 검을 흑자나 검을 현자를 같은 음으로 읽는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하나로 신유사옥의 희생자가 된 정약전은 유배생활 중 호탕한 성격으로 술을 즐겨 마셨으며 흑산도에 사는 여러 인사들과 친근하게 어울렸다. 자산어보를 보면 그가 조사 기록한 어류의 형태와 생태에 있어서 오늘날의 어류학자들도 미처 조사하지 못한 사항들을 치밀하고 꼼꼼하게 조사하고 기록했다.

특히 청어 떼가 산란기인 정월이 되면 동해에서 한류를 따라 서해로 이동하는 실태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유교적 선비철학이 시대의 주류였다. 다만 정약전은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학이 요구되는 현실 속에 자아실현의 방법으로 자산어보가 탄생되었다고 하겠다.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아우 다산과의 굳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유배생활이 풀리기도 전에 죽고만 선생을 애도한다. 영산강변에서 두 사람이 헤어질 때의 슬픈 이별이 가슴속의 응어리로 구천을 떠돈다.

 

죄수들의 감옥으로 썼다는 옥섬

진리 앞바다에는 감옥 섬(獄島)이라는 조그마한 섬이 하나 있다. 옥섬은 울창한 해송과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해안가의 절벽과 낭떠러지가 눈이 시리게 아찔하다.

마을 앞 바닷가로부터 150m정도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심도 5m에 이르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옥섬은 조선시대 수군진이 진리마을에 설치되었을 때 죄수들의 감옥으로 썼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옥도로 불러오고 있다. 옥도에는 현재 죄수에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움집으로 쓰던 동굴과 마당처럼 생긴 취사바위, 죄수가 식량을 얻기 위해 낚시했던 거북머리바위 등이 남아 있어서 죄인들을 가뒀던 섬의 애환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감옥 섬에서는 모세의 기적과 같은 괴이한 풍수지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바닷물이 들 때는 두 개의 섬으로 되지만, 물이 빠지면 두 섬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으로 변한다. 물아래의 다리를 걸어볼 수 있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물이 빠졌을 때 섬의 모습이 마치 거북이 형국과 같다. 거북등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흑산 항이 한눈에 들어오며 둥근 만속에 줄지어 설치된 양식장이 그림처럼 보인다. 전망대로는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 외로이

천촌리 입구에는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유허비가 서있다. 비에는 ꡐ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ꡑ라고 써있다. 비석의 뒤편 암벽에는 奇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고 새겨 썼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된 대한제국이라는 의미의 말이라고 한다.

면암은 명성황후 척족 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로된 격렬한 척소사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온몸을 던져 주장했다. 이로 인해 결국 그는 흑산도로 위리안치(1876-1879)되고 3년간의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보내게 된다.

필자는 몇 해 전 전국의 모든 국․도립공원 연재기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충남 칠갑산에서 최익현의 동상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흑산도에서 그의 발자취를 보다니 너무 뜻밖이다. 면암의 독한 마음은 놀랍다. 일본이 제공한 식사를 먹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 분기한 애국심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목숨과 맞바꾼 곧은 의지는 본받아야 한다.

면암은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창의시를 발표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의병으로 이겨내자고 궐기한다. 나이에 관계없이 또한 살고 있는 장소에 관계없이 모두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앞장서 나가자고 의기를 토해 낸다.

선생은 장쾌한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다. 400명의 의병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전한다. 면암은 체포되어 일본 땅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고 만다.

유배지에서 주는 음식을 단호히 거절한 그는 조선인인 만큼 조선으로 보내줄 것을 주장하며 일본이 주는 어떠한 음식도 먹을 것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조선의 선비로 떳떳한 조선이기를 원했던 그는 결국 계속되는 단식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흑산도는 이제 유배지이기를 단연코 거부한다. 서해바다의 관광기지로 먼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어선들의 따뜻한 안방아랫목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목포에서 배를 타면 두 시간도 안 걸리는 바다여행의 전지 모항으로 우뚝 솟아오를 것이다.지금 이 순간부터… (끝)

나주 중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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