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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봉(738m)은 단단한 바위덩어리 표면에 구멍을 뚫어 절구통 같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 기묘한 신의 조화라 하겠다.
양기가 너무 센 월출산에서 음양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조물주가 빚어낸 음기의 봉이 구정봉이라 하겠다. 음양의 이상적인 합일이 남녀의
오묘한 합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위대한 에너지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남근석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베틀굴이 있다. 일명 음수굴이라고도 부르는 바위는 커다란 바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베틀굴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아낙네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이곳 굴속에 숨어서 베를 짰다는 전래된 이야기로 생긴 이름이다.
굴에 들어서면 어둡고 으스스하다. 굴의 길이는 10m쯤 되는데 굴 안의 깊은 속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어서 음굴, 또는 음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굴 내부의 모습이 마치 여성의 국부와 같은 형상에서 생긴 이름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절묘하게 만들어진 여자의 그곳, 가려진 옹달샘이다. 남근석과 베틀굴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전설 같은 얘기로는 두 바위가 서로 사랑에 빠져 월출산의 수많은 석상들을 낳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럴듯한 전설이다.
오죽했으면 이곳을 기암괴석의 박물관이자 수석전시장이라고 불렀을까?
다양한 인물상 곳곳에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월출산의 석상 중에는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를 하고 있는 연인바위, 입맞춤하고 있는 사랑바위, 아기를 가진 배부른
임산부바위, 단란한 모습의 가족바위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이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월출산은 안개 낀 날 올라야 산의 진국을 맛볼 수 있다. 영산강물이 만들어낸 안개구름이 산을 헤집고 다니며 가렸을 때는 가히 신선이 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월출산에는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인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이 있다. 자연석을 깎고 다듬어 불상으로 조성했다.
자연 상태의 암벽에 광배에다 부처를 일일이 쪼아서 새긴 귀중한 석불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유난히 크게
네모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특히 큰 귀는 머리에서부터 어깨능선까지 내려왔다. 눈썹부터 턱 아래까지 내려가 비례를 무시하고 일부러 크게 만든 귀다. 남들 앞에 서서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큰 귀로 남의 말을 잘 듣고 귀담아 기억하라고 큰 귀로 조성했을 터이다.
세상에 밝은 소리는 잘 들어야 한다. 약간 치켜 올린 눈꼬리와 꽉 다문 입은 분위기를 압도하는 근엄함과 장중함이 넘쳤다.
오똑한 콧날은 예리한 지혜가 넘친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표현이 다듬어지지 못했다. 투박한 모습으로 거칠게 보인다. 그런대로 무게가 있어
보이지만 가슴부근의 근육이 굴곡이 없고 반반해서 입체미가 떨어진다. 결과 부좌한 다리는 작고 허약하다.
석굴암 앞에서면 당당한 모습과 비례미의 균형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월출산의 마애불에서는 하체의 부조화가 매끄럽지 못하다. 걸쳐 입은 옷
주름의 음각선이 간단하지만 또렷이 표현되었다.
오는 이들 반겨주는 미왕재 억새밭
불상의 오른쪽 무릎 위에는 조그마한 동자상이 부조로 새겨졌는데 불상의 성격을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아무튼 불상은 신체 각 부분의 비례가 부자연스럽고 조각수법이 무디고 다듬어지지 않아 딱딱해서 세련미가 부족하지만 투박한 남도의 인심처럼
편하고 부담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해묵은 마애불로 높이가 8.5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 웅장하고 패기 찬 모습이어서 월출산이 풍기는
바위의 이미지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당대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될만하다.
구정봉과 도갑산(375m)사이의 중간쯤에는 강진 무위사에서 올라오는 삼거리가 있다. 너무도 유명한 미왕재 억새밭이 있는 곳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오는 이들을 반겨준다.
억새라면 하얀 꽃이 너울거리는 가을의 억새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초봄의 푸른 억새는 도시생활에 찌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내기에 제격이다.
상큼하게 푸르른 억새가 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을 개운하게 해준다. 바람이 불어올 때 몸을 낮추어 꺾어지는 것을 피할 줄 아는 억새는 녹색
잎이 흰색으로 엎드려 낮은 포복을 한다.
잎새끼리 서로 부딪치며 물결치는 소리는 때묻지 않은 신선한 소리로 미왕재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연의 함성이다.
봄의 억새는 귀로 듣고 감상해야 제격이다. 미왕재 일대의 넓은 억새밭은 골짜기와 능선을 가득메운 억새들의 바람 따라 흔들리는 광경은 소소한
장관이다. 바람 따라 납작하게 넘어진 채 꿈틀거리는 모습은 월출산의 진경이다.
조선시대의 이중환은 일정한 거처 없이 세상의 온갖 풍상을 겪으며 조선팔도를 떠돌아다니고 한권의 책으로 택리지를 남겼다.
택리지에 의하면 영산강은 서쪽으로 흘러 영암을 감싸며 목포 앞바다로 나가는데 강 주위에는 경치가 뛰어난 마을이 많다고 했다.
큰 강변 따라 큰 평야가 끝이 보이지 않게 넓게 펼쳐져 광주에서부터 남쪽으로 영암까지 하나로 통한다고 했다. 그래서 영암은 날씨가 맑고
화창하며 물자 또한 풍족할 뿐만 아니라 땅 또한 넓어서 후한 인심의 마을들이 월출산을 중심으로 하늘의 별처럼 깔려있다.
더욱이 서남쪽으로는 강과 바다로 통해 물자를 교역하는 이익이 커서 이름난 고을이 많다. 목포서쪽으로는 신안 앞 바다와 칠산 바다다.
옛날에는 깊었으나 최근에는 모래와 흙이 조금씩 쌓여 바닥이 얕아져 썰물 때는 물깊이가 무릎에 닿을 정도라고 한다.
강의 한가운데는 강심으로 아직은 깊어 배들이 이 길을 따라 다녔다고 한다. 영산강이 우리들에게 전해오는 메시지는 손을 써서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인간의 간섭이 강을 멍들고 결국에는 시궁창 같은 하수구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강은 강답게 스스로 조정하며 흘러가게 해야
강다운 강이 된다.
99칸의 운주루에는 굴뚝을 세우지 않았다
월출산이 끝없이 넓은 바다와 함께 남도에서 제일가는 강을 끼고 있는 유일한 국립공원이라 하더라도 산다운 모습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추악한 손길이 적은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아무리 장풍득수의 길지에 위치한 산이라도 그곳에 머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길지로 만들어 가야한다.
노고단의 신령한 봉을 주산으로 99칸의 거대한 부잣집 운조루에서는 넓은 논 따라 맑은 물이 흐르는 섬진강이 천하의 명당이라 하지만 지켜온
이들의 숨은 노력이 명당 터로 지켜온 것이다.
운조루에는 쌀 2가마니를 담은 뒤주가 있다. 뒤주에는 ‘타인 능해’라고 써놓은 글씨로 인해 가난한 이웃들은 언제든지 뒤주 속의 쌀을 퍼
갈수 있게 배려했다. 배고픈 자를 위한 눈물겨운 배려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99칸의 운조루에는 굴뚝을 세우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져 밥을 못 짓는 이웃이 있는데도 혼자서 연기를 사방으로 날리며 부자티를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영산강과 함께한 월출산은 운조루 보다 더 나은 명 터라고 한다. 명당을 지키고 가꿔야 할 자들은 당연히 월출산 자락에 모여 사는 이들의
몫이다. 쉬지 않고 흐르는 영산강물은 내일도 역시 흘러갈 것이다. 맑디맑은 채로….
옛말에 인걸은 지령이라고 해서 땅기운에 따라 인물도 나지만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 성격형성과 성장에 영향을 준다. 영험한 영암에서도 산과
강을 지키는 튼튼한 인내심이 발복(發福)지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지금 그곳에서.
/나주 중앙초등학교 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