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량위천 주장하며 소 제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하는 「고문서 집성」 제6권에 실려있는 입안(立案) 12-16까지는 나주목사 김성일이 판결한 결송입안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가운데 입안 14는 김성일이 1586년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판결한 것으로 이미 밝혀졌는데, 입안 13(윤원, 임경수 소송문서)도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역시 1583년 김성일이 판결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전기 고문서는 양 자체가 적은데다가 결송입안과 같은 소송관계문서는 더욱 드물다. 근래까지 조선전기의 판결문으로 확인이 된 것은 4건 정도였는데, 입안 12-16이 나주목사 김성일의 판결문으로 확인됨에 따라 조선전기 고문서는 총 9건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입안 13은 윤원이 윤손을 임경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압량위천(壓良爲賤)을 주장하며 소를 제기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압량위천의 유형 가운데 몰래 호적에 노비를 올리는 이른바 암록(暗綠)의 사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입안 12-16의 결송입안들은 거족(巨族)이 아닌 일반인 또는 하층민들과 관련된 판결문들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문서의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관계로 소(訴)를 제기한 소지(所志)부분이 나타나지 않지만 판결 주문에 '척(隻) 임경수에게 결급(決給)하고'(隻林慶秀亦中決給爲遣)라는 내용을 볼 때 원고는 윤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1심인지는 알 수 없고, 윤원이 소송을 개시한 지 적어도 7달이 넘는 시점임이 확인된다.

 윤원의 소송 제기는 윤손을 염두해 두고 있다. 적어도 임경수의 사노로 있는 윤손을 빼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를 위해 윤손의 어미인 양금(良今)이 양인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양천(良賤)은 결국 혈통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므로 세계(世系)에 대한 다툼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문서의 결락으로 계통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윤원은 양금이 양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양금의 여동생 양덕이 임경수의 아버지 임기의 양첩(良妾)이며, 함평의 정귀생, 귀세, 광주의 김언수가 윤손의 사촌이고 양역(良役)을 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호적의 기재는 임경수가 몰래 올린 것이라 주장하고 압량위천으로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임경수는 호적의 내용과 상속문서(相續文書) 및 족매문서(族賣文書)를 제시하여 이에 맞서고 있다. 결국, 나주관아에서는 이들이 사는 곳의 관청에 확인을 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윤원은 도주하였고, 패소판결을 받게 된다. 임경수는 어차피 자신의 노비인 윤손이 역(役)을 질 만한 나이가 되자 자신의 노비인 거작기와 양금의 자식으로 편의상 올렸다가, 암록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나주 최초의 대곡서원 세워

 3년 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성일은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583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 처리에 노력한 김성일은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였다. 또한,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경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금성산 대곡동에 세운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여 개 누정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이 발달해 있었다.

나주나씨 집안과 협력해 서원 설립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아무튼, 김성일이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과 영남의 퇴계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그 얼마 후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써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김성일이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나씨 집안 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나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서원이 설립·운영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학봉집안과 나주나씨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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