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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스카웃손길 치열 구인난
 닉네임 : 착취빈익빈친일  2021-10-28 21:46:30   조회: 155   
1961.5.16.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1967 공무원퇴직 격증 문제

1967 슬픈 유산 『보리고개』여 안녕

1968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스카웃손길 치열 구인난 빚어내...

1970 근대화에의 전진속에서 민족의 위신과 존엄을 되찾아 경제주권을 공고히 다진 것이다.











1961.5.16. '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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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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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67 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1968.7.10 경향신문



사설


공무원퇴직 격증 문제




공무원의 퇴직율이 작금년에 이르러 유난히 격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도확립, 제반행정의 안정도문제, 나가서는 국가시책의 유감 없는 말단침투 문제라든지 국민의 일상생활에 까지도 적지 않은 주름살을 가져오게 할 염려를 예견케 하는 일로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9일 총무처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60연도에 1.8%이던 퇴직율이 67년에는 6.5%로 3.7배나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68연도만도 5월말 현재까지 이미 1만2천3백여명의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것이므로 이대로 가면 금년도의 퇴직율은 작년도의 퇴직율 6.5%선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공무원을 주로 하는 문교부의 이직자 수가 수위이고 다음은 경찰관을 주로 하는 내무부가, 세째는 철도청과 체신부 등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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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70900329201008











1924



日收七錢七厘 (일수칠전칠리) 朝鮮小作農現狀 (조선소작농현상)

1924.02.28 동아일보 1면


... 敎育費 其他 交際費 弔祭費等(교육비 기타 교제비 조제비 등)이 不少(불소)하야 到底(도저)히 收支(수지)가 相償(상상)되지 못한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먹을 수 밧게 업고 山河(산하)에 獵漁(엽어)이라도 하여서 充腹...







可憐(가련)한 漂浪人(표랑인) 복어알 먹고 橫死(횡사)


1924.02.28 동아일보 2면


可憐(가련)한 漂浪人(표랑인) 복어알 먹고 橫死(횡사) 쓰레기통에서 어더온 복의 알 친구와 가치 먹고 참혹히 죽어 평양공설숙박소(公設宿泊所(공설숙박소))에 듀숙하든 최진옥(崔鎭玉(최진옥))(四二(사이))은 본적이...






三十餘種(삼십여종)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十七萬戶 七十餘萬名(십칠만호 칠십여만명)

1924.10.12 동아일보 2면


三十餘種(삼십여종)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十七萬戶 七十餘萬名(십칠만호칠십여만명) ◇ 영양부족으로 병든사람이 일만오쳔여명 ◇湖南(호남)에서 本社特派記者





間島同胞(간도동포) 草根木皮(초근목피)에 子女放賣(자녀방매)


1925.03.12 동아일보 2면


間島同胞(간도동포) 草根木皮(초근목피)에 子女放賣(자녀방매)

空家千餘戶(공가천여호), 米價暴騰(미가폭등) 商店閉鎖續出(상점폐쇄속출), 流離窮民激增(유리궁민격증) 餓死(아사)를 直面(직면)한 在留同胞...






生不如死(생불여사)의 그 慘狀(참상)


1925.12.10 동아일보 5면


닥처오는 동사(凍死(동사))를 면하려는 형뎨가 한둘이 아님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아는바는 아니지마는 해마다 늘어서... 귀를 울니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거리에 널렷다. 조선텬디의 이천만이 먹을 량식이 업서서 ....








1926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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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셋째 형 상희(相熙)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형 하나뿐이었다.


내 나이 9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형은 벌써 졸업을 했다. 이때 우리 동리에서는 3명이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른 두 아이는 나보다도 나이가 몇 살 위이고 입학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新學)을 약간 공부한 실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3학년에 입학하고 나는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상모동에서 구미면까지는 약 8km, 시골서는 20리 길이라고 불렀다.

1926년 4월 1일이라고 기억한다. 오전에 4시간 수업을 했으니까 학교수업 개시가 8시라고 기억한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대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늦다고 생각되면 구보로 20리를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가다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우편배달부를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 하고 짐작으로 시간을 판단한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이 빠르고 늦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이 변경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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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









벌서 凍死屍(동사시) 市內(시내)에 二名(이명)


1926.12.04 동아일보 2면


벌서 凍死屍(동사시) 市內(시내)에 二名(이명) 겨을살이의 참경은 거리에서 再昨日 來猝寒(재작일래졸한)의 첫 犧牲(희생)

금년철로 처음 추위가 심한 작삼일 아츰에 시내 태평통(太平通(태평통)) 이뎡목(서소문입구)...





草根木皮(초근목피)도 食盡(식진) 白粘土(백점토)로 露命僅保(노명근보)

1927.06.08 동아일보 2면



草根木皮(초근목피)도 食盡(식진) 白粘土(백점토)로 露命僅保(노명근보) 풀뿌리와 나무껍질 다 먹어버리고 흙에다 좁쌀 너 먹고 겨우 생명부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는 빈한한 농촌으로 춘궁을 당하야 ...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死線(사선)에선 三千餘名(삼천여명)

1928.08.23 동아일보 2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死線(사선)에선 三千餘名(삼천여명) 흉년은 거듭들고 먹을것 업서 敦化延吉 兩縣同胞(돈화연길 양현동포) 중국 돈화현(敦化縣(돈화현))에 거주하는 동포 사백여호 인구 이천여명과 연길...





草根木皮(초근목피)도 업서 男負女戴(남부여대)로 流離(유리)

1929.03.08 동아일보 4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도 업서 男負女戴(남부여대)로 流離(유리) 始興郡內(시흥군내)의 旱災餘波(한재여파)

... (초근목피)로 僅僅(근근)이 生計(생계)를 하는 中(중)이라는데 그 中(중)에도 第一尤甚(제일우심)한 곳은 ...







春窮(춘궁)과 流離民(유이민)

1930.04.16 동아일보1면 사회 기사(사설)


... (지방)에는 一家全族(일가전족)이 海外(해외)로 流離(유리)햇다 하는 者(자) 잇고 어떤 地方(지방)엔 極度(극도)의 饑饉(기근)으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者(자) 잇다 한다. 流離(유리)와 饑饉(기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者(연명자) 論山附近 五万餘名 (논산부근 오만여명)


1930.03.30 동아일보 3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者(연명자) 論山附近 五万餘名(논산부근오만여명) 한재 끄테 춘궁으로 먹을 것 업서 麥嶺(맥령) 압두고 死線(사선)에서 彷徨(방황) 【강경】충남 론산군(忠南論山郡(충남논산군)) 일원 급 부근...






草根木皮生活(초근목피생활)로도 子弟敎育(자제교육)에 𤍠誠(𤍠성)


1930.11.03 동아일보 3면 사회 기사(뉴스)


草根木皮生活(초근목피생활)로도 子弟敎育(자제교육)에 𤍠誠(𤍠성)

가진 곤난을 다 격그면서 共同一致 學校設立(공동일치학교설립)

【헤산】... 차금과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목피))로서 근근잔명을 보존해...






二萬五千 窮民(이만오천궁민)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連命(연명)

1932.04.23 동아일보 4면



二萬五千窮民(이만오천궁민)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連命(연명) 작년흉작과 춘궁때문에 乞人(걸인)떼가 밀려 다녀 【령광】령광군에는 작년농사가 례년에 업는 흉작인데다가 궁춘을 당하야 군서면(郡西面(군서...






可驚(가경)할 全朝鮮窮民(전조선궁민) 總人口(총인구)의 二割七分(이할칠분)


1933.01.27 동아일보 2면


만흔사람이 초근목피일망정 삼순구식도 못하는 궁민이라는 것이 작년 九(구)월에 시행한 총독부궁민조사로 판명되엇다. 이궁민이라는 것은 간신히 생활을 게속하는 사람과 타인의 구제를 밧지 안흐면 사러가지 못...





慶州(경주)에 凍屍(동시)


1933.01.20 동아일보 3면


갑작이 졸한이 습래하야 가로에 인적이 적조하든바 十八(십팔)일 오전 三(삼)시경에 경주읍 창남리(皇南里(황남리))에 四十(사십)세 가량되는 거지가 동사되엇다 한다. 이외에도 지난 칠일의 첫추위에 역시 황남리에서 ...





乳兒(유아)를 껴안고 行人(행인)이 凍死(동사)


1933.01.22 동아일보 3면


모진 추위에 어럿든지벌서 죽은 사람이엇는고로 곳소관주재소에 통지하야 조사한결과 이린아이를 더리고 가다가 치워서 동사한 모양이며 주소씨명도 확실치안흠으로 하는 수 업시 그 시체만은 쌍봉면사무소에서 ...





行旅客凍死(행여객동사) 倭舘山麓(왜관산록)에서


1933.03.02 동아일보 4면


行旅客凍死(행여객동사) 倭舘山麓(왜관산록)에서 【왜관】경븍왜관에서는 심동의 혹심한 추위에는 오히려 동사가 나지 아니하얏는데 춘한에 동사가 낫다고 한다. 지난 二十七(이십칠)일 왜관 월오산록...






草根木皮(초근목피)도 不得(부득) 二千生靈 饑餓(이천생영기아)


1934.03.14 동아일보5면


草根木皮(초근목피)도 不得(부득) 二千生靈饑餓(이천생영기아) 이천군 웅탄면 작년흉작 여파 當局(당국)의 時急救濟(시급구제)를 痛論(통론... 그들을 엄습하야 호구할 량식 좇아 벌서 떨어젓고 때마침 겨울이라...







農村(농촌) 『過剩人口(과잉인구)』 問題(문제)


1935.04.04 동아일보 1면


... 것이 아니므로 다시 數字(숫자)를 들어 論證(논증)할 必要(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그러나 春窮期(춘궁기)를 當(당)하면 草根木皮(초근목피)를 캐지 안흘 수 없는 生活群(생활군)이 때로는 全農家戶數...





草根木皮(초근목피)의 延命(연명)으로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1935.08.17 동아일보 5면


草根木皮(초근목피)의 延命(연명)으로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國庫補助(국고보조) 안되면 起債(기채)하야 救濟(구제)... 이재민등은 더위에 부댁일 뿐외라 오랫동안 밥을 얻어먹지 못하야 초근목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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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餘滴(여적)


1946.10.22 경향신문 1면 정치 기사(가십)


... (기아선상)에서 彷徨(방황) 하는고? ▼ 다른것은 그만두고라도 우리의 農作(농작)이 自給自足(자급자족)이 못될 형편이어서 草根木皮(초근목피)에 목을 매달어야 할 건가 ▼ 日本(일본)은 農夫(농부)의 ...






農村實情(농촌실정)과 政治(정치)의 方向(방향)


1952.07.16 경향신문 1면 정치 기사(사설)


... 食糧事情(식량사정)은 形容(형용)키 어려운 慘狀(참상)을 呈(정)하고 있는 터로서 客年度(객년도)의 旱災地區(한재지구)에서 草根木皮(초근목피)조차 求得(구득)키 어려워 飢餓線上(기아선상)을 방황하고 ...






記者席(기자석)


1953.04.09 경향신문 1면


... 曲(곡)□師(사)같은 魔術(마술) 任議員(임의원) "믿을 수 없다"고 氣焰(기염) ◇ 때로는 눈물이 앞서는 任永信女史(임영신여사), 草根木皮(초근목피)로 겨우 延命(연명)하는 農村(농촌)의 實情(실정)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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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30일 서울신문



전쟁 피해 통계



3년 유여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이번 동란도 27일 행하여진 휴전조건으로써 그 종막을 고하였는데 이번 동란 중 얻은 피해상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학교피해:교실파괴 또는 손상 33만 8,154교실

△ 인명피해상황:납치 4만 2,732명, 학살 12만 2,799명, 사망 23만 6,475명, 부상 22만 8,580명, 행방불명 29만 8,175명, 합계 92만 8,761명

△ 주택피해상황:전파 28만 1,782호, 반파 21만 3,478호, 합계 59만 5,260호

△ 기타:전재고아 및 부랑아 10만 명, 전재미망인 50만 명, 윤락여성 10만 명, 피난민 1,118만 3,428명








奢侈(사치)를 누르는 方向(방향)


1953.08.02 경향신문1면 경제 기사(사설)


... 證明(증명)하는 事實(사실)이다. 農村(농촌)에서는 草根木皮(초근목피)로도 延命(연명)하기 困難(곤란)한데 一部 都市人(일부도시인)은... 韓國(한국)의 이 現實下(현실하)에서는 農民(농민)들은 草根木...






僻地(벽지)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1957.01.31 동아일보 3면


僻地(벽지)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副作用(부작용)일으켜 人體(인체)에 異狀(이상)도 發生(발생) 【釜山分室發(부산분실발)】경남도내 일부 벽지농민들은 절량으로 벌써부터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







美側(미측), 絕糧農家(절량농가)에 關心(관심)


1957.02.22 동아일보 1면


... 農村實情(농촌실정)은 極度(극도)로 疲弊(피폐)되고 있어 現在(현재)부터 草根木皮(초근목피)로 救命(구명)을 하고 있는 形便(형편)에 있어 바야흐로 目不忍見(목불인견)의 慘狀(참상)을 보이고 있다는 報告(보고)를 接受(접수)하고 財務部當局(재무부당국)에 對(대)하여 前記(전기) 農民...





『수수죽』끓이는 層(층)은 上流(상류)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1957.02.23 동아일보 3면


대부분의 세농층에서는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한지 벌써 三(삼)개월 이상이나 되어 한면(面(면))에서 평균 三(삼)십여명의 부황증(浮黃症(부황증)) 환자가 발생하는 등 참상을 이루고 있다 한다 이에....








壇上壇下 (단상단하)

1957.03.14 동아일보 1면


... 說明(설명)에 依(의)하면 英陽郡下(영양군하)에는 榮養(영양)이 不足(부족)하여 四割(사할)의 ?糧郡民(절양군민)들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榮養(영양)을 補充(보충)해 나가고 짐승까지 榮養(영양)을 잃어...





絕糧農家(절량농가)의 實態(실태) 現地報告(현지보고) 江原道篇(강원도편) (1)

1957.03.16 동아일보 3면


絕糧農家(절량농가)의 實態現地報告(실태현지보고) 草根木皮(초근목피)도 求得難(구득난) = 總(총)13萬六千八百戶中五萬三千戶... ┉도당국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더덕」「칙뿌리」「도라지」 그리고...







五名(오명)이 死傷(사상) 주어 온 복어알 끓여 먹고

1959.01.20 동아일보 3면


五名(오명)이 死傷(사상) 주어 온 복어알 끓여 먹고 가난한 살림살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길가에서 주은 「복어」알을 먹고 五(오)명이 사망한 참사가 서울시내에서 발생하였다| 경찰에 의하면 二(이)○일 새벽 영시...






복어알中毒等(중독등) 變死(변사) 하루 세件(건)


1959.04.12 동아일보 3면


복어알中毒等(중독등) 變死(변사) 하루 세件(건) 복어알을 먹고 중독사망하는등 一一(일일)일 서울시내에서는 다음과같은 세건의 변사사건이 발생하였다 ▲오후 여섯시경 서대문구 北阿峴(북아현)동山三二...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1960.03.25 동아일보 3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 家長(가장) 잃은 智異山(지리산)의 千餘災民(천여재민)

... 천여명이 현재 당국의 구호도 못받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한다 그들의 주식물은 감자인데...







「룸펜」身勢(신세)될 새 學士 二萬餘名 (학사 이만여명)


1960.11.16 경향신문 3면


.... 심각한 취직난에 봉착하고 있으나 문교부는 새학사들의 배출을 앞두고 이들의 취직에 아무런 대책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다만 각학교에 대하여 직업보도에 대한 알선을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년과 같이 문교부가 ......






凍死者 第一號 (동사자제일호)


1960.11.26 경향신문 3면


凍死者 第一號(동사자제일호)

二十六(이십육)일 갑자기 몰아온 영하四(사)도의 추위에 올 겨울 들어 시내에서 첫 동사자가 생겼다. 정신이상으로 부랑중인 여인 이(李善玉(이선옥)=46·永登浦區本洞三三....





凍死者(동사자) 또 二名(이명)


1960.11.27 경향신문 3면


凍死者(동사자) 또 二名(이명)

二十六(이십육)일 갑자기 엄습한 추위는 시내에서 二(이)명의 동사자를 냈다 ▲ 二十七(이십칠)일 새벽 四(사)시경 시내 남창동 八五(팔오) 시장주식회사 二(이)층 복도에서 四十...




밤새 凍死(동사) 두 件(건)


1961.01.12 동아일보 3면


조사결과 東大門(동대문)시장에서 지게품팔이를 하는 노동자라 한다 ▲一一(일일)일 밤 一(일)○시 三(삼)○분경 시내 東大門(동대문)구 昌信(창신)동 四四六(사사육)번지에 있는 무허가하숙옥 吳弼祥(오필상)(49)씨...








離農(이농)을 막아야 한다


1961.01.20 동아일보 4면


農村(농촌)에서 견디다 못하여 「지게」 하나를 밑천으로 어린 家屬(가속)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쓰레기桶(통)에서 鰒魚(복어)알을 주워다 먹고 四五家口(사오가구)가 慘死(참사)한 것은, 제 才操(재조) ...






植木日(식목일)과 實質的(실질적)인 愛林(애림)의 길

1961.04.05 경향신문1면 사회 기사(사설)


... 山林(산림)을 害(해)치는 모든行爲(행위)를 禁止(금지)하고 있지만 問題(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大多數農民(대다수농민)들이 살기 위하여 나무를 ...







1家(가) 5名 絶命(명절명) 복어알 먹고 慘事(참사)


1965.02.22 경향신문 7면


1家(가) 5名 絶命(명절명) 복어알 먹고 慘事(참사) 【大邱(대구)】 21일 하오 6시50분 浦項(포항)시 竹島(죽도)동35 金鶴伊(김학이)(52)씨의 일가족 8명 중 5명이 주워 온 복어로 국을 끓여 먹고 모두 죽었다. 사망자는...





복어알 中毒死(중독사)

1965.04.06 경향신문7면


복어알 中毒死(중독사) 5일 하오 2시반경 서울 공덕등 342의 10 金一順(김일순)(47·여)씨가 끼니가 없어 주워 온 복어알을 먹고 중독, 절명했다.





첫凍死(동사) 3名(명)


1965.12.01 동아일보 3면


첫凍死(동사) 3名(명)

▲30일 밤 8시반경 서울 中(중)구 南倉(남창)동 60 常春(상춘)여관 앞길에 40세 가량의 행상으로 보이는 여인이 영양실조와 추위로 죽어있는 것을 지나던 朴鍾培(박종배)(18=南倉(남창)동60의4)...





火傷(화상) 입고 凍死(동사) 추위에 떨던 乞人(걸인)

1966.01.18 동아일보 7면


火傷(화상)입고 凍死(동사) 추위에 떨던 乞人(걸인) 18일 새벽 6시 30세 가량의 거지차림의 여인이 서울 鍾路(종로)구 仁寺(인사)동 82 仁成(인성)여관앞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연탄을 안고 화상을 입은 채 얼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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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 ]




1961.5.16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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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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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만세 !

궐기군 만세 !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






'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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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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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漁村高利債申告(농어촌고리채신고)의 成果(성과)는 컸다


1961.09.24 경향신문 1면 경제 기사(사설)


... 重要視(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耕作地不足(경작지부족)으로 平年作(평년작)때에도 自家食糧(자가식량)이 모자라서 草根木皮(초근목피)를 求(구)해야 한다면 이는 農民(농민)의 資格(자격)이 없다 할 수 밖...








「振興廳(진흥청)」 新設(신설)을 構想(구상)


1962.02.10 동아일보 1면



... (최소한백만석이상 확보)할 것이며 (昨年(작년)엔 四十五萬石(사십오만석)) 善良(선량)한 農民(농민)이 過去(과거)와 같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해야 하는 일이 다시 있을 때는 그 責任(책임)...






農村(농촌)을 위한 朴議長(박의장)의 指示(지시)를 보고


1962.02.11 경향신문 1면 정치 기사(사설)



... 農家(절량농가)가 무더기로 나곤 했던 春窮期(춘궁기)를 日前(일전)에 두고서 "善良(선량)한 農民(농민)들이 過去(과거)와 같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는 일이 다시 있을 때에는 關係官吏...





農村指導體系(농촌지도체계) 一元化(일원화)에의 길


1962.02.12 동아일보1면 경제 기사(사설)


... 貸與糧穀(대여량곡)과 救護糧穀(구호양곡)을 最小限度 百萬石 以上(최소한도백만석이상)을 確保(확보)하여 在來(재래) 草根木皮(초근목피)로 延命(연명)하던 悲慘相(비참상)은 없도록 期約(기약)함과 아울...






餘滴(여적)


1964.02.20 경향신문 1면


... 신문보도)에 대해서 우리가 얼핏 贊意(찬의)를 表(표)하지 못하는 理由(이유)는 무엇일까? "이 판국에 「텔리비」를 들여오다니? 草根木皮(초근목피)로 生命(생명)의 줄을 이을 春窮期(춘궁기)인데? 그래 ...







韓國農村(한국농촌)을 울리는 季節病(계절병) 絕糧(절량)의 봄고개


1965.02.10 경향신문 6면


절량지대의 공통적인 현상은 ①고리채의 발호 ②離農(이농)·도시집중 ③草根木皮(초근목피)의 몸부림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8일 현재 본사에 들어온 각지방의 절량농어촌실태는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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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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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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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 ....... ]



全國實態 (전국실태)


1967.03.09 동아일보 3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참상은 이제 없어졌다고 낙관하고 있다. 과거 日帝下(일제하)에서 우리農村(농촌)의 실정이 비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土地(토지)의 大地主集中化(대지주집중화)...








1967.4.6 경향신문 5면



슬픈 遺産 『보리고개』여 안녕


그 실정




보리고개 없는 마을


해마다 봄이 오면 밀어 닥쳤던 춘궁기 -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져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있다.


충남 대덕군 유성면 갑동리 2구와 전북 완주군 후동면 구만리 농민들은 보리고개의 괴로움을 모르며 4월의 땅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버림 받았던 자갈밭을 양계부락으로 이룩했고 영농의 근대화로 수익증대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 대덕 완주 = 방길영 이영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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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7040600329204001








... 如前(여전)히 糊口(호구)에 힘들어 食糧不足量(식량부족량)은 約(약)10%線(선)


1967.08.15 매일경제 3면


米麥(미맥)을 中心(중심)으로 하던 농경방식이 점차 多樣化(다양화) 되어 가고 각종양곡의 生産(생산)이 늘어나 麥嶺期(맥령기)를 넘기지 못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던 惨相(참상)을 면한 것은 천만 多幸(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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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엔統計(통계)는 우리나라의 工業成長率....






[ ..... 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 ]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 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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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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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 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갖...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경제 기사(기획/연재)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企業主(기업주)들은 새로운 經營(경영)모토와 상징을 내...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2면 경제 기사(기획/연재)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은...








1968.7.10 경향신문



사설


공무원퇴직 격증 문제



공무원의 퇴직율이 작금년에 이르러 유난히 격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도확립, 제반행정의 안정도문제, 나가서는 국가시책의 유감 없는 말단침투 문제라든지 국민의 일상생활에 까지도 적지 않은 주름살을 가져오게 할 염려를 예견케 하는 일로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9일 총무처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60연도에 1.8%이던 퇴직율이 67년에는 6.5%로 3.7배나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68연도만도 5월말 현재까지 이미 1만2천3백여명의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것이므로 이대로 가면 금년도의 퇴직율은 작년도의 퇴직율 6.5%선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공무원을 주로 하는 문교부의 이직자 수가 수위이고 다음은 경찰관을 주로 하는 내무부가, 세째는 철도청과 체신부 등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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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70900329201008







1969.11.29. 동아일보


공무원퇴직 8.4%

올들어 2만6천 해마다 늘어



박봉과 전직으로 해마다 공무원들의 이직율이 늘어 나고 있다. 29일 총무처 집계에 의하면 금년도 공무원 이직율은 11월 현재 8.4%에 2만6천명으로 작년도의 7.6% 67년도의 6.5%보다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공무원별 이직율은 지방공무원이 3천6백8십7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기능직 3천1백7십5명 중고교 교사 1천5백4십8명 국가공무원 7천3십7명의 순으로 돼있다.

이직요인은 가정사정이 3천5백24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전직 3천3백5십2명 생활고가 2천3백9십명이다.






小兒期(소아기)의 肥滿症(비만증)… 減食療法(감식요법)이 좋아

1968.09.16 경향신문 5면

小兒期(소아기)의 肥滿症(비만증)┉減食療法(감식요법)이 좋아 근래 유난히 살이쪄서 걱정되는 肥滿兒(비만아)가 부쩍 많아졌다. 비만증을 지방증가로 일어나는 이상현상이고 체중이 같은 또래의 다른아이보...




건강의 赤信號(적신호) 肥滿症(비만증)

1968.11.26 매일경제 3면


건강의 赤信號(적신호) 肥滿症(비만증) 熱量(열량)소모보다 많은 「칼로리」 섭취에 기인 淑大(숙대) 金尙淳(김상순) 교수의 助言(조언) 밥... 발병할 우려가 많아 비만증은 건강의 적신호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






意見(의견) 봄의 입김


1971.04.08 매일경제 1면 사회 기사(칼럼/논단)


... 농어민들은 오랜 歲月(세월)동안 잔인한 봄철을 수없이 되풀이 맞이하였었다. 이른바 端境期(단경기)를 당하면 산과 들로 나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것이 얼마 멀지않은 시절의 현실이었다. 日帝(일제...









1969



[ ..... 울산은 ... '기적의 한국부흥' .....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 ........

..... 한국비료는 ....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 ]



1969.6.5. 매일경제


" 기적의 부흥 ...

넘치는 활기 ... "




'기적의 부흥' 속에 아침해가 뜨고 넘치는 활기 속에 하루가 지나가는 건설보 - 그것은 '오늘의 한국'을 구경한 사람들의 거개가 느끼는 감회일른지도 모른다. 지난 4월 16일부터 3일간 워커힐에서 열린 제4회 한일신문편집간부 '세미나르'에 일본측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일본공업신문 편집국장 朝倉金三 씨도 이러한 인상을 가슴에 품고 돌아간 방문객 중의 한사람이었다. 눈부신 발전과 스케일의 방대한 설계, 그리고 한일경제협력에 대한 당당한 우리측의 논진에 압도된 듯한 그 놀라움 - 그의 소견에 의하면 박대통령 영도하의 한국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양언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건설상을 훑어보는 것은 우리의 내일을 위한 자신을 더 한층 북돋워 주리라 믿고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하여 우리의 전진에 더 한층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펀집자 주]




정부수뇌들도 불철주야로 진력

울산공단지엔 경탄뿐


일본과 어깨 겨루는 고도성장 ... 13.1%




가깝고도 먼 나라 ... 한국의 인상



가깝고도 먼나라, 그리고 활력에 넘치는 불가사의한 나라, 이것이 나의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붉은 흙으로 덮힌 서울교외의 김포공항에 이르기까지 제트기로 불과 2시간의 거리. 일본으로 말하자면 한국이란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외국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일본문자는커녕 한문도 거의 쫒겨나다시피 찾아볼 수 없고 한글 일색 (간혹 영어가 섞일뿐)으로 뒤덮힌 국내 상황. 인텔리 층의 격렬한 대일불신 등이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저윽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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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대의 요소비공장


극단에 가까우리만큼 심한 무역의 입초. 총예산의 25%를 차지하는 국방비, 무역수지의 만성적자, 농림의 부진, 대도시에의 인구집중, 실업자 등 어두운 일면이 있는가 하면 세계 최대인 연산 33만톤의 요소비료공장(한국비료 울산공장), 동양 최대의 연산 1백90만톤의 쌍룡시멘트 동해공장, 도요다(豊田) 미 포드 이 파이아트 등 3개의 합작자동차회사와 항공기의 발착륙이 가능한 서울을 기점으로 전국에 걸친 고속도로망, 서울 시내에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20여층의 고층빌딩, 이밖에도 세계최고의 고도성장을 자랑하는 일본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13.1%의 경제성장률은 모두 밝은 내일을 빛내주는 소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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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상징 울산공단지


한국의 산업시찰에서 역시 주목을 끌게 한 것은 울산중화학공업지대의 놀라운 발전상이라 할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에 박대통령이 공업입지에의 첫삽을 넣기까지는 울산은 인구 3만에 불과한 한적한 어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13만을 옹립하는 도시로 부풀어올라 국제적인 기술수준과 스케일이 큰 근대공장들이 들어서 '기적의 한국부흥'을 이루고 있어 이곳은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이 되고 있다.


그런만큼 경계도 엄중하여 공업지대에 이르는 메인 웨이의 요충은 빼지 않고 헌병들에 의해서 물샐틈 없이 방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통행하는 차량마다 멈추어 서서 검사를 받아야 하고 모든 공장의 문어귀마다 가드맨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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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 울산공업지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대한석유공사 (미 걸프석유가 95% 출자)가 지닌 석유정제설비는 오늘날 일산원유처리능력 11만5천 배럴이라는 바 실제로는 13만6천 배럴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규모로 미루어보더라도 일본의 중견 클라스엔 뺨을 치면서 끼일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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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몇년 뒤 떨어져 완성된 한국비료는 삼정물산 등 삼정 그룹의 원조에 의해서 동양고압(현재의 삼정동압화학)의 요소기술을 중심으로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거기에 9만톤의 저장능력을 가진 동양 제1의 창고를 끼고 있다는 장점, 실로 한국비료공업은 세계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느낌이 짙었다.


宇部흥산 회사로부터 카프로락담을 수입해서 나일론사를 만들고 있는 동양 나일론의 플랜트 역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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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9060500099206001








1969.7.1. 동아일보



박대통령 재임 두돌



집념과 의욕의 치적

경제 국방에 전력
확인행정 ... 하루 여행 42km 꼴

개헌 등 결단의 고비




박대통령은 1일로써 취임 두돌을 맞았다.

군정과 5대대통령 재임기간을 합한 전후 6년에 이어 중임임기 전반인 지난 2년은 그의 정치역량을 발휘하고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가장 알차고 중요한 기간이었다. 조국근대화라는 국정지표 아래 그는 '일면국방, 일면건설'의 구호를 내걸고 자주국방과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행정수반으로서의 이런 시정과는 별도로 집권당의 총재라는 입장과 대국회관계 등 정치면에 있어서는 어려운 국면이 적지 않았고, 또 앞으로 어려운 고비도 적지 않을 듯하다. 작게는 '행정부와 국회관계' 같은 문제에서 크게는 지금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개헌문제 등 큰 정치 이슈가 그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박경석 기자 >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으로 경제건설과 더불어 국방력강화를 서두르게 된 그는 그 첫 작업으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야당 등 일부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예비군훈련과 무장은 추진돼 여러번의 공비소탕전에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미교섭의 강화로 1억달라의 추가군원 획득과 M16소총공장건설을 보게 됐다.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고도성장과 수출제일주의를 내걸고 공업단지조성 중소기업육성 전력등 기간산업육성 수송망확대와 농어민소득증대사업 농업용수개발 등에 주력했다.


67년과 68년에는 국민총생산이 각각 8.9%와 13.1%의 성장률을 보였고 69년에는 11.7%의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수출은 연평균 신장률이 40%로 67년에는 3억5천8백만 달라, 68년에는 5억 달라를 달성했으며 69년엔 7억 달라를 목표로 잡고 있다.


그가 신념을 가지고 착수한 경부고속도로는 70년엔 완공을 보며 '가뭄을 이 땅에서 영원히 없애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농업용수개발사업 또한 70년엔 매듭짓게 된다. 6월말 현재 162만9천KW로 올해 연말목표를 이미 달성한 전력개발과 농어민소득증대사업의 대규모추진은 높이 평가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밝은 면 이외에 차관정책에 있어서는 원리금상환시기의 대거 도래와 더불어 불안한 요인이 없지 않으며 부실기업의 속출 등 부작용이 뒤따라 정비작업을 단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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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0.17. 개헌국민투표



[ ...... 10.17개헌국민투표는 공화당이 총투표자의 67.5% 찬성을 획득, 더블 스코어의 승리 ........

...... 그 찬성률은 우리의 헌정사상 초유의 기록으로 경이적인 것 ....... ]



1967.10.20. 동아일보



무더기 '찬성' ... 뒤엎은 정치'색도'


'촌고도저'는 여전
두드러진 동남고


10.17국민투표의 표분석



10.17개헌국민투표는 공화당이 총투표자의 67.5% 찬성을 획득, 더블 스코어의 승리로 기록됐다.


78.6%의 찬성률을 보였던 62년의 개헌국민투표보다는 11.1%가 떨어지는 찬성률이지만 그때의 개헌은 민정이양을 위한 것이었고 찬반세력이 양립하지 않은 상황 아래서 치루어졌던만큼 예외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물의 대결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찬반세력이 뚜렷이 양립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국민투표를 선거의 범주속에 포함시키면 그 찬성률은 우리의 헌정사상 초유의 기록으로 경이적인 것임에 틀림 없다. 뿐만 아니라 국민투표란 의례히 집권자가 이기기 마련이고 야당은 부정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뭏든 이번 투표결과는 종래의 정치색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총괄적으로 보면 서울을 제외한 10개 시도에서 공화당이 이겨 찬성권화한 것이 우선 특기할 사실이라 하겠다.

< 이강식 도종문 이문조 기자 >



찬성표의 동남고


10.17국민투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울 이외의 모든 시도에서 찬성표가 반대표를 압도한 사실과 더불어 찬성률이 '동남고현상'으로 나타난 점이다. 개표구별로 세분해볼 땐 전남광주갑구가 반대표를 많이 냈지만 전체적인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고 동남부 끝에 위치한 부산이 56.7%로 겨우 과반수선을 넘었으나 이 또한 대도시란 점으로 봐 다른 각도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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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표와 농촌표


이번 국민투표는 이미 67년 선거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여촌야도'라는 전통적인 득표성향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도시는 야당'이라는 종래의 관념을 깨뜨리고 대도시는 서울과 광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당 성향을 보였으며 소도시들은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도시의 찬성율은 농촌에 비해 67년선거 때와 비교해 월등히 낮고 대다수소도시는 주변 농촌보다는 찬성율이 낮아 '여촌야도'의 바탕은 찬성율의 측면에서 보아 '촌고도저'의 현상으로 유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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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소도시에서는 67년 선거때보다 더 많은 여당성향을 보였으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는 여야간 표차를 줄여 평준화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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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민의 조선일보



[ ..... 서울에서 거의 백중이었다는 것이 의외 ......

..... 지방도 광주, 그것도 광주 전체가 아닌 갑구에서만 야당이 조금 리드한 것을 빼면 완전히 참패 ....... ]




[ ..... 이번에 매스미디어는 개헌 지지세력이었다고 봐야 ......

...... 포천에서 야당의 부총재인 유진산 의원이 유세를 하는데 불과 11명 밖에 안모였어. .......

..... 서울에 근대화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따라서 현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 수가 늘었다 ...... ]




1969.10.19. 10.17 민의 조선일보



10.17 민의

그 심판을 지켜보고

본사기자 방담



유세 득표에 영향 못줘
서울 백중은 연구과제

도시의 기권표 분석해볼 필요있어




개헌안은 압도적 찬성표를 얻어 확정되었다. 지방에서의 다수표는 그렇다 하더라도 서울에서 백중세를 보인 것은 공화당도 신민당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엄청난 표차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의 7.25 담화 이후 양성화 되어 9.14 국회통과를 거친 개헌국민투표운동과정이 어떠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득표결과는 어떻게 풀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앞으로의 정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개헌확정후 여야당의 몸짓은 어떻게 달라질까? 개표상황판 앞에서 본사기자들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나는 것을 털어놔 보았다.



예상 모두 엎은 찬표


A= 개헌찬성이 압도적이야, 그런데 결과는 좀 의외야. 공화당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B= 특히 서울에서 거의 백중이었다는 것이 의외였어.

H= 일반적인 전망은 서울은 반대가 더블 스코어로 예상했고 부산 대구 전주 등 대도시에서도 반대가 다만 얼마가 많아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통했는데 이것이 뒤엎어졌단말야. 지방도 광주, 그것도 광주 전체가 아닌 갑구에서만 야당이 조금 리드한 것을 빼면 완전히 참패했으니 ....

C= 애당초 공화당에서는 득표율하한을 54% 정도로 잡고 60% 정도만 되면 만족이라고 생각했었지.

D= 청와대에서는 63% 내지 64%를 최고로 보았어.

C= 서울 표수를 올리겠다는 생각이 개헌추진세력한테 있었지만 4대6만 되면 성공으로 생각했던 것
아냐?

E= 서울의 경우 기권자의 성분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권을 반대라고 보면 찬성이 서울 전체 유권자의 25% 정도야.

G= 기권을 찬성으로 보느냐 반대로 보느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 아니겠어?


매스미디어는 지지?


A= 그건 그렇고 이번에 유세가 주효하지 못했다고들 얘기 하는데 그건 뭐야.

D= 아마 유세가 득표에 미친 영향이 1할도 못되는 것 같아. 공화당이 과거 어떤 선거때보다 조직력을 동원, 이잡듯이 작전을 전개했으니까.

B= 양편이 각각 5백회 정도 유세를했는데 유세에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수란 실제로 얼마 안되거든.

C= 그렇게 되면 조직과 자금을 가진 쪽이 우세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지.

G= 이번엔 매스 미디어가 방관만 했어도 사정은 퍽 달라졌을걸?

H= 이번에 매스미디어는 개헌 지지세력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A= 신문의 전면 PR은 종전에 없던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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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혀든 전력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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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개헌에 관한 명분론으로 봐도 영구집권이다 4.19가 어떻다 하는 것이 잘 전달이 안돼요. 유세에서 상대하는 사람수가 원체 적거든, 포천에서 야당의 부총재인 유진산 의원이 유세를 하는데 불과 11명 밖에 안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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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서울의 백중은 거의 처음 있는 얘기야. 앞으로 두고두고 연구과제가 될거야. 그리고 서울에 근대화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따라서 현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 수가 늘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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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찬성 반대 무효 찬성률

전라북도 77.4 568,007 288,816 44,850 63.0
전라남도 82.7 1,100,640 399,220 57,680 73.4
경상남도 83.1 954,032 295,498 39,127 73.9
경상북도 84.8 1,387,750 386,514 59,189 75.7
서울특별시 60.7 756,776 814,521 42,283 46.9








1970.1.5. 경향신문 사설


사설


눈부신 경제성장의 고령에 서서

- 남북통일의 물적기반을 정비하자




60년대의 결산


대망의 70년대의 입문을 세차게 두들기는 손과 손 마음과 마음.

2,3차 5개년계획을 매듭짓고 5백달러의 국민소득과 3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계속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보장하면서 균형된 사회개발 속에서 풍요한 국민생활과 이를 통한 남북통일에의 조건완숙과 세계로 뻗어가는 민족중흥의 내실을 약속하고 서로 맹세한 70년대가 어김 없이 4천만 동포의 안전에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60년대에 쌓아 올린 건설의 피땀을 결정하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김일성 집단의 온갖 음모와 도전에 대하여 국토통일로 응수하고 사상 박정희 시대의 신화를 구상화 하는 새 시대의 새 시련을 맞이한 것이다.


회고컨대 1,2차 경제계획으로 시종한 지난 10년 동안 방대한 생산시설과 조직,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유통시설과 체계의 개선, 과학기술의 고도화, 기업의 경영관리조직의 훈련강화 등에 의하여 기적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경제성장의 추이를 보건대 1951년 - 61년은 4.8%이던 것이 62년 - 66년은 8.5%, 67 - 69년은 12.5%로 점승하고 있다. 사실상 작년도로써 중요사업은 거의 끝났고 여유 있는 조정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늘 우리들이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주요경제지표를 보면, 일인당 1백95달러의 GNP, 7억 달러의 수출, 5억2천만 달러의 외환보유, 95%의 재정자립달성을 비롯하여 연간 10%를 약간 상회하는 소비자물가추세, 5%의 실업율, 3백50만톤의 시멘트, 163만kw의 발전시설용량, 1백9억톤의 총화물 수송량과 2백67억인의 총여객수송량,11만대의 자동차 보유, 43만2백명의 전화가입자, 5백62만명의 취학아동, 천명당 80명의 신문 구독자 등으로 국력의 성장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제 전래의 실의 좌절감 퇴영은 서서히 물러가고 근대화에의 전진속에서 민족의 위신과 존엄을 되찾아 경제주권을 공고히 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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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0010500329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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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 40%에 육박. 1인당 국민총생산(GNP) 79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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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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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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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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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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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 조선일보 사설



[ ...... 중진국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에 올라선, 완전한 자립경제 .......

.....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

.....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1970.1.6. 조선일보



사설


70년대 경제의 과제


- 60년대의 후유증부터 씻고 넘어가자




민족중흥을 다짐해온 대망의 70년대의 새 아침이 밝았다. 이 한 십년이 저물 무렵에 이룩될 것이라는 찬란한 조국의 미래상에 가슴 벅차 오름을 느낀다. 중진국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에 올라선, 완전한 자립경제가 달성될 것이라는 한십년의 여명에 서서, 우리도 위정자가 호소했듯이 온 국민에게 그와 같이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소리높혀 외치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정체와 퇴영을 강요해 온 구래의 멍에를 또 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씌워줄 수는 없는 것이라면, ... 비록 또 한십년의 고된 가시밭길을 헤쳐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발전의 길을 택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영과 영광은 결코 저절로 굴러 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것은 피와 땀으로 스스로 쟁취할 수 밖에 없다. 민족의 중흥은 민족 모두의 피와 땀의 총화로써만이 달해질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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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그렇습니다. 뭐든지 일도양단해서 한 쪽만 보려하는 데서 역사적 평가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경제만 해도 그래요. 실제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리 경제라는 건 경제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기아에 허덕이는 농업국가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박정희씨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양반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진심에서, 자신의 생래적 양심에 따라 이들 굶주리는 국민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제대로 벌어먹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려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자기개혁을 독려한 것은 그 목적도 순수했고, 성과도 상당했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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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3154/3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2004년 02월 호









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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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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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유고슬라비아



[ ..... '코뮤니스트 노굿!' .......

..... 유고엔 공산주의자가 없읍니다. 있다 해도 몇 사람뿐이죠. ........ ]



1971.10.11. 동아일보



동구를 향한 코리아의 고동

유고기행 4



유고가 공산국가라는 선입감만 없었다면 기자는 공산국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유고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완전한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전가족을 거느리고 서구 어느 나라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정부는 오히려 이것을 장려하는 셈이다. 실업자가 많고 엄청난 적자며 (금년 상반기만 8억5천만 달러) 물가폭등에 허덕이는 유고는 실업자의 임시 국외취역으로 인한 송금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외국인에게도 유고는 완전히 개방돼있다. 기자가 런던의 유고 대사관에서 일개월 체재 비자를 얻는데 든 시간은 이제까지 경험한 가운데 가장 짧아 3분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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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에는 또한 기자의 체험으로 볼 때 공산국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울 알 수 있었다.


기자가 유고에서 방문했던 두개의 신문, 자그레브에서 발행되는 유고 최대전국지의 하나인 '비예스니크'지와 벨그라드에서 발행되는 유고 최대의 일간경제신문 '프리브례드니 프례글예드'지의 주필 편집국장 및 편집간부들은 거리낌 없이 유고의 당면 고민과 약점들을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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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도착 이틀째 저녁, 어느 일류 식당에 들러 분홍빛 포도주를 곁들여 유고 특유의 양고기 요리를 먹고 있을 때였다. 60쯤 돼 보이는 노신사 한분이 다가 오더니 유고 말로 뭐라고 하는 품이 앉아도 좋겠느냐고 묻는 듯하기에 그러시라고 영어로 대답했다. 앉자마자 떠듬떠듬 영어로 자꾸 말을 건네 왔다. 식당은 잘 차려 입은 신사숙녀로 만원이었고 테이블 하나 건너엔 정복장교 세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두시간 남짓 여러 나라 이야기가 오고 갔다.


동구 여러나라중 어느 나라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더니 서슴치 않고 루마니아라는 대답이었다. 체코 항가리 폴란드 다 좋은 사람들이라기에 '소련은?'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댔다. 불가리아에 대해 묻자 '노'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화제를 서구로 돌렸더니 트리에스트 영유권 문제를 안고 있는 이탈리아에는 좋은 감정이 아니었고 일차 대전때 은혜를 입은 프랑스에 대해서는 '참 좋은 나라'라며 입이 쩍 벌어진다. 이 노신사의 평과 같은 말은 그후 다른 몇사람으로부터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듯이 노신사는 '참 코리아에는 노스가 있지요?'라고 물어왔다. '네 그렇습니다.' '노스는 코뮤니스트라던가?' '그렇습니다' 했더니 천만 뜻밖의 반응이 왔다. '코뮤니스트 노굿!' 하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댄다. 순간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몇 잔 포도주로 기분 좋던 술기가 싹 가셨다. 바로 한 테이블 건너 장교들을 살펴 보니 못들었는지 자기들끼리 대하에만 열중하고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신사는 또 큰 소리로 '유고엔 공산주의자가 없읍니다. 있다 해도 몇 사람뿐이죠. 아마 이 식당 손님중에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장담하지요' 하고 떠들어댄다.


다시 주변을 살펴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기자는 비로소 유고의 언론자유가 어떤 수준인가를 깨닫고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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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렌즈까지 달린 카메라 두대를 메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9월 중순이라 날씨가 서늘한데도 초미니와 핫팬츠가 거리를 활보하고 히피족은 없지만 장발족은 얼마든지 있었고 큰 호텔마다 나이트클럽이 있고 스트립쇼도 있었다.일행이 투숙했던 유고 최대의 호텔 벨그라드엔 밤이 깊어지면 밤의 꽃들이 서성대고책방마다 누드사진이 범람하는 것까지 런던과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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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박)대통령 內務部(내무부) 지시 내용


1976.01.27 경향신문 1면



... 역행하는 부조리가 쌓였기 때문이다. 조총련이 朝總聯系(조총련계) 모국방문동포에게 대한민국에 가면 전기불도 없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여 산에 나무도 없으며 시골가는 길에 굶어죽은 시체가 여럿이...







朴大統領(박대통령) 年頭(연두)회견

"北韓(북한)에 食糧(식량)원조 用意(용의)"


1977.01.12 경향신문 1면



... 으로 성공해왔다.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부문에서 괄목할만큼 성장을 했다. 세계속의 한국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보릿고개니 초근목피니 하는 말이 없어진 것이 오랜 일이 아니다. 기적이 결코 아니다....






朴大統領(박대통령)지시 僻地醫療保護制

(벽지의료보호제)확충


1977.02.24 동아일보 1면



... 통해 농촌소득을 올릴수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마을운동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해나가라"고 지시했다. 朴(박)대통령은 또 "과거의 「초근목피」라는 말이 지금은 없어졌듯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극빈자...






보리 混食(혼식)


1985.05.28 매일경제 8면


... 총장〉 지금은 보리고개라는 말이 옛말이 되었으나 20~30년전까지만 해도 음력으로 4~5월 이맘때가 되면 굶주린 창자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채우고 햇보리가 나오기를 하루가 三秋(삼추)같이 ...






횡설수설


1987.08.04 동아일보1면


... 되면 창궐하고 겨울이면 이로 온몸이 근질거렸으며 못먹은 데다 기생충에 까지 시달리는 판에 「건강」이 어디 있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보릿고개에 「돈」이 어디 있었는가 ◆ 선거를 전후해 상호신용...







成長推進力(성장추진력)의 再發見(재발견) 韓國經濟(한국경제)의 새進路(진로)를 모색하는 對談(대담)

<3> 開發計劃(개발계획)과 經濟運用(경제운용)


1981.05.16 매일경제1면 경제 기사(좌담/대담)



... 성장정책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겠지요. ▲ 崔(최)고문=그렇지요. 그것은 당연했겠지요. 60년대는 절대적빈곤·춘궁기·초근목피 현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개발계획과 경제운용이 필요했지요. ...








마지막 "票(표)단속"… 숨가쁜 4黨(당) 본부


1985.02.11 경향신문 5면



... 합동연설회과정에서 각野圈(야권)후보들이 지적한 외채문제에 관해 언급,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외국돈을 꾸어오지 않으면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으란 말이냐"고 역설하고 "국정에 책임을 지는 정당과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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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 연변



[ ......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

......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 .......

......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 ]



(2) 재미교포 한태경씨 | 「연변조선자치주」를 가다 본지독점연재


[중앙일보] 197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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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그린다 | 신문·방송통해 고국소식 알아 | 만난 사람마다 미국생활 질문 | 북괴와 서신왕래두절…대부분이 한국동경 | 북송교포 "연변에 도망치다 잡힌 사람 많아"


이 밖의 「뉴스」 매체로는 한글로 된 연변일보, 중국어판 길림일보 등 신문과 장춘에서 1주일에 2회, 약 2시간 정도 연변지역에 중계방영하는 흑백 TV, 연길의 한국어 방송, 길림의 중국어 방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다.


<한국발전상 잘 알아>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발전상을 자세히 알고있는 듯 했고 미국과의 수교가 임박해서는 미국생활에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내가 집을 나와 산보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질문공세를 폈다. 미국이 잘 살고, 과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도 기계가 짓고 빨래도 기계가 한다는데 사실이냐』


다행히 내가 갖고 갔던 「폴러로이드」 사진기가 모든 대답을 해줬다. 이때까지 「컬러」 사진을 구경 못한 이들에게 천연색사진이 촬영하자마자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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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동포들은 또 북한의 실정을 잘 아는지라 일부 거류민단간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었고 남북한 국민전체의 자유선거를 통한 남북통일을 원하고 있는 듯 했다.


한때 이른바 김일성 혁명사상을 「테스트」 한다는 「고험」(시험)을 거쳐 북한으로 이왕한 동포들도 있었으나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북송된 많은 북송교포들이 「연변자치주」로 탈출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갖고 온 자동차·TV 등을 모두 북한당국에 뺏기고 빈털터리가 돼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항의 「데모」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집단농장으로 보내졌고 연변으로 도망쳐 나오다 붙잡힌 사람만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이곳 동포들이 알려줬다.


미·중공수교를 전후해서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국민학교에서조차 지금까지의 소련어 대신 영어를 외국어 교육과목으로 채택,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른바 중점학교(일류학교)에서는 영어교육에 중점을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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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기간 중 몇몇 동포들은 자신의 가족·친척들을 고발해 숙청의 제물이 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뜻있는 노인들이 매우 통탄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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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503345







1981 「엥겔」계수


[ ...... 우리 나라의 36.6%에 비해 蘇聯(소련)은 46% ........ ]



횡설수설


1981.12.03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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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품의 경우도 생활비 지출비율에서 美國(미국)의 17% 「프랑스」의 23% 西獨(서독)의 27% 日本(일본)의 29% 「스페인」의 35% 그리고 우리 나라의 36.6%에 비해 蘇聯(소련)은 46%를 보여 「엥겔」계수 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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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중국 「엥겔」계수


[ ...... 아직 엥겔係數(계수) 60 이라는 국민들의 절대빈곤 ........ ]



中共(중공) 創党(창당) 60돌 제2革命(혁명)

(1) 毛時代(모시대)의 公式淸算(공식청산)



1981.06.30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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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모)의 「繼續革命論(계속혁명론)」 아래서 생산(專(전))보다는 이데올로기(紅(홍))에 치중한 결과는 아직 엥겔係數(계수) 60이라는 국민들의 절대빈곤만을 가져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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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5·16은 서민층이 지지한 혁명이란 얘기야. 서민은 지지했어.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반대했어. 일반 서민들이 은연중에 세상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혁명한다는 소문이 좌악 퍼져도 어쩌지 못했던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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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이 우리 편이었어. 아, 저 윤보선 대통령도 5·16 보고를 받고 ‘올 게 왔구나’ 첫마디가 그거였어. 현직 대통령이 올게 왔구나 했으면 알 만하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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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사의 1등공신은 누구입니까. 김윤근 해병여단장, 박치옥 공수단장 등 실병력 지휘자들의 공적순서는요.

 “그런 거 없어. 다들 순수한 생각에서 했어. 모두 1등공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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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얘기하는 김 전 총리의 눈에 청년 같은 빛이 났다. 그가 “우리는 순수했어. 이것 저것 구차하게 설명하는 게 없었어”라고 말할 땐 주먹을 쥐기도 했다. “혁명을 하자, 다 때뤄 부수자”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군말 없이 대부분 합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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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481046

“혁명은 숫자가 아니다 의지·민심으로 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201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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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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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도시락을 못싸간 소년 박정희는 점심시간에 운동장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교실로 돌아갈 즈음 배가 터지게 냉수를 들이키곤 했다. 방과후 집에 오면 으레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도 열어보고 찬장을 뒤져보다가 선반 위에 보리 소쿠리가 놓여 있는 날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1966년 여름 충남 부여의 전천후 농업용 양수장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도중 신문사 기자들과 호텔에서 밥을 먹으면서 “어렸을 때 밀사리 해먹어 보았소? 불에 구워 먹으면 참 맛이 있지. 보리도 쪄서 그대로 먹으면 맛이 있고…”라고 말했다.

‘호텔밥’을 먹으면서 옛 시절의 입맛을 회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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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임자는 배고픈게 어떤 건지 아나"
<그리운 나라, 박정희>박정희 생가앞 보릿고개 체험장 보리밥 실종 유감
김인만 작가 ( 2009.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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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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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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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2021-10-28 21: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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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빈익빈친일 () 2021-10-28 21: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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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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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기다리고 기다리던 쌀 자급에 성공. 수확량 3621만석.

11월 무미일 폐지.


1977. 쌀 생산량 4천만석 돌파,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 반열에.

1977.12. 쌀 막걸리 제조 허가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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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과학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는 3무에서 시작하여 99%의 국민을 한데 모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일자리를 무려 1천만 개 이상 창출하여 90%가 적빈층이었던 국민을 70% 이상 중상층으로 끌어올렸다. 새마을운동으로 농가 소득을 도시 가구 소득과 역전시키기까지 했다.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미군을 이용하여 군비를 줄임으로써 경제건설을 우선시켜 국부를 비약적으로 늘린 결과 1979년에는 불과 GNP의 6%로 자주국방도 거의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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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론’ ‘중립론’ 그리고 ‘평화통일론’ 등이 공공연하게 대두됐다.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1961년 1월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고정훈씨를 선봉자로 한 혁신세력은 조총련계 자금으로 설립된 민족일보 등을 이용해 사회주의를 외치는 북을 두들겼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한달 전인 5월1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4·19 이후에 무려 1836회의 데모가 발생했고 데모에 동원된 인원은 95만명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데모가 끝나면 으레 난동으로 변했고 사회질서는 거의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고 봐야 했다.


4·19 혁명주체가 아니었던 장면정권은 자연 비혁명적 방법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4·19 혁명의 주체를 이룬 학생층, 특히 젊은층과 마찰을 빚게 됐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허약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자유만을 부르짖는 1500여 종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와 장면정권을 무비판적으로 공격하자 무정부상태가 될 정도로 사회 혼란이 심했다. 사회가 불안해지자 경제는 침체됐고, 특히 행정력과 경찰력이 약화됨으로써 신문은 매일같이 밀수를 비롯한 경제악(經濟惡)을 보도했다.


혼란상태를 틈타 1961년 1월2일에는 650대 1이던 환율을 1000대 1로 인상하더니 한달 후인 2월2일에는 1300대 1로 인상하는 최악의 상태를 초래했다. 물가는 졸지에 폭등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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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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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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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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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쿠데타說


박 : 5·16 쿠데타와 관련해 여쭤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낸 문서들을 보면 한국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 데도 한국인들이 조용하다는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합법 정부를 지지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쿠데타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뭔가 일이 터져서 ‘정리’를 해야 선거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국민 중에도 미국 사람들이 본 것처럼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때문에 그 무렵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내가 알기에도 두세 군데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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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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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나 국민적으로, 나 개인이 죽게 된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5.16 산업화’ 이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 ‘복어 알 주워 먹고 일가족 사망’ ‘어제 밤 걸인(乞人) 동사(凍死)’ ‘연탄가스 중독 사망’ ‘절량(絶糧)농가’ ‘국민소득 80달러’...이런 것들이 선사(先史)시대 신화(神話) 만큼이나 먼 이야기가 되었다는 게 엄청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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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k.newdaily.co.kr/news/article_s.html?no=78736&rvw_no=1551

5.16 군사혁명 반세기-박정희의 국내평정
기업에 돈 대준 뒤 총 들이 대고 투자 독려,
세계 유례 찾기 힘든 시장경제 육성 방식

류근일 본사고문 | 최종편집 2011.05.13









"내가 空想도 못하였던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1965~89년 사이 경제성장률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趙甲濟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年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성장 속에서도 균형적인 富의 배분을 이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다.



25년간(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한국이 세계에서 경제성장률 1위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지도층의 능력이 최우등이었다는 뜻이다. 경제는 國政(국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점 만점에 60점은 될 것이다. 경제에서 1등을 하고 있을 때 한국은 안보도 튼튼히 하여 北傀(북괴)의 再남침을 저지하였다. 민주주의와 복지의 기반도 갖추었다.

이 기간에 한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 및 채권국으로 전환하였다. 굶는 사람을 없애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사라졌다(1977년부터 의료보험 실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 민주화의 한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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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난 한 60대 인사는 “나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굶어죽는 이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의 이렇게 풍요한 생활은 내가 어릴 때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고 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로서 말레이시아(271달러), 필리핀(169달러), 태국(115달러)보다 못했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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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8397&C_CC=BB

[ 2011-05-12, 2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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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


[ .....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 ]



1988.7.30. 경향신문



미일중소 4강 한반도인식급변

알게 모르게 교차교류 활발


한국발전모델에 매력
미소 데탕트가 촉진제

남북한의 대화진전 따라 역학구조 큰 변화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소 4개강국의 상호접촉이 최근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아직은 공식화하지 않고 내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으나 지금까지 거의 관계가 두절되어 왔던 양대진영의 교차교류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회에 회담을 제의하고 일본이 북한과의 직접접촉을 꾀하는가 하면 중국과 한국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또 지난달 열린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나오는등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눈에 띤다.

이같은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양대진영의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가 큰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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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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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Hand in Hand’를 불렀다. 서울올림픽의 주제가는 그들의 혁명가였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삽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바츨라브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민주화된 뒤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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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904&num=335

2009년 겨울호

[특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김주성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1993


[ ..... 紅旗출판사가 발행 ......

..... 중국 黨政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 ....... ]



중국에 때아닌 박정희 바람,전기발행 여파


[중앙일보] 1993.08.24




朴正熙前대통령전기가 『朴正熙』라는 제목으로 北京에서 출판돼 中國에서 때아닌 「朴正熙바람」이 일고 있다.


피터 현으로 잘 알려진 在美교포작가이자 언론인인 玄雄씨(65)가 영문으로 쓴 朴正熙前대통령의 전기가 美國에서 출판되기 전에 중국어번역판이 北京에서 먼저 출간돼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중국의 젊은 신예작가 판이(潘屹)가 번역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紅旗출판사가 발행한 이 책은 특히 중국 黨政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될 만큼 중국경제개발의「교과서」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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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831636






[ .....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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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베이징의 紅旗出版社(홍기 출판사)에서 나온 박정희 傳記(전기)를 쓰신 玄선생 아니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뜻밖에 만나 뵈니 반갑군요! 그 책이 나왔을 때 베이징 출판사에서 한 권 보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인간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李敏 여사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번역 원고의 복사본을 金正日(김정일)에게 주었지요. 아마 金正日이 그 책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과 경제발전 업적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朴正熙는 한국의 秦始皇』


이런 뉴스를 듣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홍기 출판사가 내놓은 중국어판 박정희 전기는 지금도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槪要(개요)에 불과하고 아직 脫稿(탈고)가 안 끝난 상태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책은 故(고) 李先念(이선념) 전 국가주석의 사위 劉亞洲(유아주)가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PEN 대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내 영문 개요를 읽고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 정부 관리, 학자와 일반 독자들에게 읽히는 게 좋겠다고 하여 나오게 된 배경까지 털어놓았다. 劉亞洲 자신은 朴正熙의 뛰어난 업적에 감동한 나머지 그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金교수는 한마디 더 보탠다.

『중국에서 홍기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권위입니다. 이 출판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이기 때문에 보통 중요한 책이 아니면 절대로 취급 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過讚(과찬)의 말씀』이라고 인사를 차릴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 가면서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하얼빈 손님들은 醉興(취흥)이 무르익었다. 李敏 여사는 일어서더니 愛唱曲(애창곡) 抗日 鬪爭歌(항일 투쟁가) 「어머님 울지 마세요」를 부른다. 그 옛날 젊고 용감한 항일 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만주에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춘만 작사, 작곡의 「어머님 울지 마세요」의 가사는 원래 중국어로 된 것인데 李여사가 번역한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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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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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정치이야기로 발전하였고 그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하는군요. 선배님은 중국 바이어들 앞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비방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과 그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암울했던 지난 어둠의 역사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중국 바이어가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선배님의 귀싸대기를 갈기는 것입니다.



연세가 55세나 되는 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대화 중에 느닷없이 젊은 중국 바이어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았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왜 그러느냐고, 그 중국 바이어에게 따졌습니다.


잔뜩 화가 난 바이어가 하는 말이, [ 너희는 5천 년을 이어온 가난과 굶주림의 역사를 물리쳐준 은인을 너희들 손으로 죽인 배은망덕한 민족이 아닌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무엇이 잘났다고 큰소리냐! ] 그런 호통을 듣고 선배님은 더 이상 할말을 잃었으며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에 중국인민들에겐 원수나 마찬가지일텐데 도대체 이것이 웬일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이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 당시 중국지도자인 등소평은 전 중국 관료 및 인민들에게 박정희 정신을 본 받자고, 그분의 정책을 따르자고 야단법석에 가까운 정신교육을 실행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의 최고의 우상으로 자릴 잡았으며 중국인민들과 바이어에겐 박정희 대통령이 곧 마음의 구심점이며, 흠모하는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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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국가 공직자들, 한국경제성장 연수


1991.07.04 뉴스 9



이규원 앵커 :

소련과 폴란드 등 공산권국가의 공직자들이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배우기 위해서 2주간의 일정으로 국내에서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수교육현장을 추은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추은호 기자 :

한국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소련, 폴란드, 몽고, 베트남 등 최근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는 공산권국가들의 국장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이 2주일 동안의 연수과정에 참여해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의 정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산권 국가들이 한국을 배우기 위해 이 연수에 참여하는 등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의 행정지도와 행정관리능력 기법을 연구해 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자신의 국가에서 활용하자는 뜻에서입니다.



야나키에프 (불가리아 특명대사) :

여기서 공부하면서 아마 우리 사업권 큰 이익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몰로프 (소련외무성 참사관) :

한국 역사, 경제, 한문, 수학 다음에 행정능력 개발에서의 한국 경험을 많이 알아보았습니다.



추은호 기자 :

이처럼 한국을 배우려는 공산권국가의 높은 관심으로 지금까지는 동남아국가 공무원이 이 연수과정에 주요 단골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공산권국가 공무원이 대상이 됐습니다.

이 연수과정이 좋은 반응을 얻고 참여회의를 늘려달라는 요청이 많자 내년부터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만을 대상으로 한 연수과정이 신설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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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5.16. '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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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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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



.....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 ]




<박정희>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朴正熙는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말한 평화란 것은 평화공존을 가장한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란 뜻이란 것과 합치되는 이야기이다.


그는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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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가 외치노라 !!!






10월 4일, 난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칠 것이다.


지금 정권의 대다수들이 과거에 고생? 할 때.

난 수출현장의 최일선인 전자회사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명 공돌이 였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 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 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때 당시
이 나라가 어려울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 나라 어지럽히고, 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것이다.



영광스런 대한민국, 자랑스런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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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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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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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률 40%에 육박. 1인당 국민총생산(GNP) 79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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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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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는 서독 루르 탄광지대로 떠나는 광부 123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인구 2400만 명, 실업자 250만 명,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 54개, 1인당 국민총생산(GNP) 87달러.

가난이 이 땅을 휘감아 호구지책(糊口之策)마저 어려웠던 그 시절. 월급 162달러 50센트(650독일 마르크)는 대졸자까지도 이주 노동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에 나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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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西獨(서독) 광부




[..... 대학 졸업자...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 90 대 1의 경쟁률을......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905100062




[그 시절 우리는] 지하 1000m 막장에서 희망을 캔 派獨 광부 이야기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빵 씹으며 하루 종일 노동




⊙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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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는 필자(사진은 두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임). 섭씨 35~40℃의 막장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콱콱 막힌다. 이런 곳에서 파독 광부들은 하루 종일 노동을 했다.


1960년대 한국은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西獨(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어학연수나 유학이 아닌,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苦學(고학)으로 마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派獨(파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 온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군에서 제대해 서울의 여러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일을 같이 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권형, 나하고 독일 광부로 갈 생각 없소?”

“난 대학도 안 나오고 광부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리고 광산 근무 경력서가 있어야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1963년 12월부터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派獨(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 조건은 ‘35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병역을 필한 광부 경력자’였다. 나 같은 경우 광부 경력이 全無(전무)했지만 한양대생의 도움으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했다. 순수 광부 출신부터 주먹깨나 쓰던 건달, 대학 졸업자(나와 같은 진에도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다), 학교 교사,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지원자들의 경쟁률도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내가 지원한 2진의 경우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치열한 만큼 선발과정도 까다로웠다. 우선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역도, 철봉 턱걸이, 모래주머니 나르기 등의 체력검사를 받았다. 지원자들 중에는 커트라인 체중인 60kg에 맞추기 위해 내의 속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일이 있었고, 자장면이나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있었다. 체력 테스트 다음으로 적성검사, 상식시험, 간단한 영어 테스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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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탄광에 근무하는 한편 기술 훈련을 받는다. 월급은 162달러 50센트(650 마르크),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로서 20세 이상 30세 미만〉



지원자 수는 2800명이었는데 1600명이 신체 조건으로 실격했고 나머지 1200명 가운데 약 500명은 광산에 근무성적이 없으면서 허위 경력 증명서를 붙였다 들통이 났다. 대졸 및 고졸 학력자가 태반이었다. 1차 시험을 거쳐 11월 28일에 최종 합격자 367명의 이름이 발표됐다. 신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듯이 사회면에 합격자 이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기양 기자를 선발 두이스부르그에 특파하여 '한국 광부들을 기다리는 서독 광산촌'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들은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의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 부럽지 않는 숙소/ 방마다 독서 장에 오락 시설까지 갖추어/ 돈과 맥주와 아가씨와/ 2주 휴가땐 파리에서 데이트도/ 지하 800m에서 콜라가 수도처럼/ 라인 강변 처녀, 동양 총각 좋아해 /민간 외교 역할, 코리아 자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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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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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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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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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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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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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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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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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간첩 박원식을 추적하던 경찰이 추풍령 산마루 경북 금릉군 봉산면 광천동 일대의 주민동향을 조사했을 때 속칭 돈목 마을 (27 가구) 은 11명의 처녀가 돈벌이를 하러 도시행, 17세가 넘는 처녀는 단 2명 뿐이었다. 속칭 곤천마을(30가구)은 처녀 13명이 모두 외지로 나가 '처녀 없는 마을'이 돼 버렸고 주민들도 "도시에서의 식모살이가 답답한 산골생활보다야 낮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부러워 하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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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2.03.27.






* 1971


[ ......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 ....... ]


1971.1.11. 경향신문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터져나온 만원 서울 .... 봉천동
빈부격차 두드러지고 도시속성 그대로

도시화과정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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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착민이건 원주민이건 이곳이 농촌이었던 옛날에 비해 현재의 주민들이 결코 못사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예찬론을 펴는 것을 보면 도시에로의 인구집중이 빚어지는 까닭을 알 것 같다.


날품팔이로 하루 5백원꼴을 번다는 박원규 씨(57 봉천동 101)가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게 이를 뒷받침 한다.


충남 예산군 삽교면 두리4구에서 10마지기 밖에 안되는 논과 밭을 경작하면서 머슴을 살았으나 7남매의 끼니 대기조차 힘들었다는 박씨가 무작정 상경한 것은 지난 69년 4월.


20년전에 앓다 죽은 본처의 약값을 대노라 진 1만원의 빚이 3만원으로 불어나자 농토를 처분, 빚을 갚고 나머지 2만원을 갖고 서울에 와 여의도에 움막을 짓고 지게 벌이를 하다 여의도가 개발되며 이 곳으로 옮겨저 8평의 땅을 받고 정착했다는 것.


그 뒤 그 자신은 날품팔이를 하고 큰 딸과 둘째 딸은 공장여공으로 취직하여 세 사람의 총 수입이 월 2만4천은 되므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며 그 나름대로의 도시생활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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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는 여공의 공장에 대한 동경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 민주노조 여공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하층사회 소녀들이 여공이 되는 것은 농촌탈출이란 소녀들의 적극적 선택과 가족적 요구간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그간 대부분 노동사 서술은 여공의 취직 동기는 가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슬픈 ‘哀史’가 담겨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담론을 재생산해냈다.

이런 담론들은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자신의 자립과 독자적인 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에 대한 익명적 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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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 ....... ]




Home > 자료실 > 온라인기념관 : II . 한국의 좌표


33) 1960년대의 여인상(女人像)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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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공의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여인상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여아였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 「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이 아가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돕다가 만 15세가 됐다. 동생들의 수가 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녀인 이 소녀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을 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아가씨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자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뿐이니 기술이 있을 리 없었고,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으니 모두가 낯설고 두려울 뿐이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바늘이 손가락에 박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손재주도 좋았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당시는 토요일도 반나절만 일할 때가 아니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440원이다(註: 1964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600g) 129원, 연탄(10개) 76원, 비누(375g)가 38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 액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을 했다가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모두가 긴요한 물건이었으나 특히 「라디오」선물이 한때 대유행을 했다(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이 아가씨는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일급 413원이 됐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급료가 10,325원(413원×25일), 당시 쌀값은 20 리터에 692원이었으니, 한 달 급료는 쌀 300 리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만한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이제 소녀의 나이 21세,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맵시도 좋아졌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어,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도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만 15세 때, 동네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언니 따라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자리는 곧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쯤에는 여성 근로자의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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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eoi.org/resource/online_view.php







1974


[ .....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

......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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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여공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서울로, 도시로 떠났어요. 시골에서는 먹고 살 길도 없고 형제들이 많으니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지요. 도시로 떠난 언니들이 휴가 받아 오면 다들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그라고 왜 여고생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담임도 야간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았죠. 그래도 어린 마음에 막상 진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대신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 합판공장에 취직했어요.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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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공이 부러움 찬양의 대상이었음은 당시 농촌에 산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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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 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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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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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 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 부잣집 아들의,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 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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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중반 ....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左翼 역사책, 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교본으로 ........


......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 ]




[인물연구] 孫鶴圭 경기도지사의 「한국 現代史와의 화해」

(2003년 6월호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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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反美, 사회주의라고 봐야죠.


『그렇죠. 그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미국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였으니까. 反日 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로 돌았어요. 거기에 反매판, 反재벌이 더해졌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초년병들의 필독서가 김성두의 「재벌과 빈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였어요』


―당시 운동권이 毛澤東(모택동)의 중국과 胡志明(호지명)의 월맹에 상당히 경도됐었죠.


『196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左翼 역사책, 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교본으로 했습니다. 「세계사 교정」, 「조선사 교정」, 「조선사회 사상사」를 읽었어요.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구체적인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큰 모순과 작은 모순이 있는데, 작은 모순은 보류해 두고 큰 모순을 주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毛의 논리에 매혹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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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부림 사건



[ ..... 반민족, 반민주적 팟쇼체제 .... 모든 분야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회로 전락 ....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 ......


..... 대중봉기로서 자유민주주의 현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 ......


.....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당간부 교육을 위하여 발간한 사상방법론, 조선노동당규약 등을 교재로 ....... ]



대법원 1982. 10. 26. 선고 82도1861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범인은닉,범인도피][집30(3)형,186;공1982.1.1.(6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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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고인 1, 6, 7, 11의 각 상고이유 제4점 피고인 4, 8, 10, 15의 각 상고이유 제3점, 피고인 3, 9의 각 상고이유 제2점 및 위 동 변호인의 상고 이유 제1점에 관하여,


이른바 집회라는 것은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인이 특정한 공동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하므로 특정한 공동목적없이 우연히 만나는 것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모이는 사람의 다과에 아무소장이 있을 수 없고, 한편 계엄법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었을 때,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실내의 집회에 허가를 받게 하거나 일체의 정치목적의 옥내 외 집회를 금지하고 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해산된 정당 또는 예속단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회 재판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있거나 미치게 하기 위한 집회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관한 단속법규에 위반하거나 위반할 우려가 있는 집회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등을 금지하고 있는 터이므로


원심판결이 이와 같은 취지에서 그 거시증거를 종합하여 피고인등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민족, 반민주적 팟쇼체제로서 노동자. 농민 등 노동대중을 수탈 착취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사회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회로 전락되었다고 분석 평가하고 이러한 모순과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서로의 의견일치를 보아


부마사태, 광주사태의 실패에 비추어 대중봉기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면 의식화된 대중조직을 강화하여 결정적 시기인 대중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을때, 현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여 합법적 수단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해졌을때 대중이 의식화되고 그 조직이 강화되었을 때 등의 시기를 포착하여 대중봉기로서 자유민주주의 현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하고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에 필요한 여건조성방안으로 대중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식화 과정 즉 현실분석, 비판 반정부 비판의식 강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의식고양 등을 거쳐 단계적으로 대중을 의식화시키고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생, 고등학교학생, 노조원, 여공, 사북탄광 광부, 양서조합등 협동조합운동원 등을 상대로 소그룹활동 프로그램 또는 후라이데이. 세터데이 등에 따라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소위 의식화교육을 위한 모임을 되풀이하여


혹은 노동경제학, 사회계급론, 금일의 철학, 현대철학의 설계, 소외론 등 주로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서적과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당간부 교육을 위하여 발간한 사상방법론, 조선노동당규약 등을 교재로 반국가단체나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하는 의식화교육을 하고, 혹은 학원데모를 모의하거나 그 평가와 사후 수습책을 토의하고 혹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 살포하는 등 원심판시 피고인등의 범죄사실을 확정하고


이를 계엄법상의 계엄당국이 금지하는 집회 및 정치목적의 집회 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항 제4호 소정의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라고 판시하였음은 정당하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 채증법칙위반이나 법리오해 또는 심리미진의 위법을 가려낼 수 없고


소위 정치목적의 집회는 계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예를 들어 정당의 창당 등 정치적 결사를 위한 집회라던가 또는 대통령을 추대하기 위한 집회등 구체적이고 뚜렷한 정치목적을 위한 집회에 한한다고 해석할 근거도 없으므로 소론 논지는 독자적 견해에 불과하여 채용할 것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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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2079910








문재인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


등록 : 2010-12-07



우리시대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회에 눈을 뜨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7일 오후 리영희 선생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 조문하고, 부인 윤영자(78)씨를 만나 “선생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문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범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부일 사건’을 통해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피고인을 변호하면서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다 읽었다고 하더라. 그것 보고 (노 대통령이) 의식화 되신 것”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말했다.


문 전 실장은 “리영희 선생이 참여정부 기간에 진실과화해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아 과거사 정리 작업에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최근에는 노무현재단의 고문을 맡아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도움을 주셨다”며 “참여정부를 많이 응원해 주셨다”고 소개했다.


문 전 실장은 “우리 세대들에게나 학생운동, 민족운동 한 사람들은 선생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며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을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지식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배우고 큰 사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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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52593.html







2003.3.


[ ..... 각계 원로 12명을 청와대로 초청 .... 조언을 들었다. ........

.....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 ]



盧대통령, 각계 원로 조언 청취


2003.03.06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6일 낮 각계 원로 12명을 청와대로 초청, 1시간30분간 오찬 간담회를 갖고 북핵문제 해법과 대북송금 사건 특검대처 문제 등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 김지길 목사, 류강하 신부,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박형규 목사,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 이돈명변호사,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조준희 변호사, 청화 스님, 함세웅 신부 등12명의 원로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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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이같은 조언들을 경청하면서 북미관계와 북핵문제 등에 대해 평화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전쟁 가능성을 줄이는데 최우선점을 두겠다고 밝혔다고 청와대 송경희(宋敬熙) 대변인은 전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들 원로와 북핵 및 특검문제, 참여정부 국정운영에 대한 조언을 예정시간보다 20분간 더 길게 듣고 진지하게 토론했다고 송 대변인은 덧붙였다.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30670255







2007.5.


[ ...... 권호웅 .... 붓을 놓으면 안 된다. .... 건강하셔야 한다 ........

..... 리영희 .... “(내가) 20~30년 길러낸 후배·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 ......... ]



권호웅 북단장, “선생처럼 지조있는 분이 붓 놓으면 안돼”

●南 진보인사와 北단장의 대화

리영희 전교수, “길러낸 후배·제자들이 南 쥐고 흔들어”



개성=김민철 기자·공동취재단

2007.05.18



17일 남북 열차 시험운행 행사에서 남북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참사는 우리측 탑승자 중 원로급 진보 인사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권 단장은 문산역에서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 “(오늘 탑승자) 명단을 보니까 귀한 분도 많이 오신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는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열린 공동 오찬이 끝나갈 무렵,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에게 다가가 술을 권하며 “1994년 (우리가)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무렵 상황이 복잡할 때, 리 선생이 민족적인 선의의 글을 쓴 것을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리 선생 같은 지조 있는 분이 늙지 않아야 하는데, 남측 잡지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았다. 붓을 놓으면 안 된다. 말로 해서라도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 건강하셔야 한다”고 했다.


리 전 교수는 “(내가) 20~30년 길러낸 후배·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 내 건강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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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단장은 이날 오후 개성역에서 이례적으로 남측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리영희 전 교수는 권 단장에게 “희망을 안고 갑니다”라고 했고,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는 “참 큰일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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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8/20070518001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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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6.3. 한일협상 결사반대 시위


2007.1.26 민주화운동 보상법 개정안.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부터로 돼 있던 보상대상자를 1964.3.24. 이후로 하여 6.3 포함하게 앞당김.







2016.12. 이재명



[ ......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매국 쿠데타 세력으로 이는 보수의 영역이 아니고 쓰레기 영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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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시장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은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매국 쿠데타 세력으로 이는 보수의 영역이 아니고 쓰레기 영역이다”라고 질타한 뒤 “이런 보수의 탈을 쓴 부패한 세력을 도려내고 이재명 같은 사람이 보수의 영역을 차지해야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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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0805§ion=§ion2=

이재명 성남시장의 ‘혁명론’ 직접 들어보니
"공정 질서 구축하고 집단지성의 유기적 인격체 믿어야”

송영한 기자
2016/12/20







2017.7.


[ .....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 ]


2017.7.31.


‘대중독재’의 그림자


오승훈 경제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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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7년 7월, 대통령 탄핵과 재판 국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만에 우정사업본부는 ‘우상화 반대’를 외치는 진보 시민단체들의 압박에 지난해 결정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재심의해 뒤집어버렸다. 기념사업들도 취소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재단은 2020년까지 서울 창덕궁 인근에 노무현센터를 건립하기로 했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기념관도 조만간 착공에 들어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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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73101033011000001







2019.7. 조국


[ ...... "‘죽창가’를 잊고 있었다" ........ ]


[김광일의 입] 폭주하는 조국… 그 뒤에 숨은 속셈



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2019.07.22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왜 이러는 걸까. 조선일보는 지난 9일간 그가 내보낸 반일(反日) 메시지가 무려 42건이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최근 나흘 동안 17건이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조국 수석은 하루 4건~5건, 페이스북에 반일 메시지를 쏟아놓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조국 수석은 지난 13일 민중봉기를 부추기는 노래 "‘죽창가’를 잊고 있었다"며 선전 선동을 본격화했다. 18일엔 "‘좌냐 우냐’가 아닌 ‘애국(愛國)이냐 이적(利敵)이냐’ 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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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文 "남북 평화경제 실현땐 단숨에 日경제 따라잡는다" [전문]



[중앙일보] 2019.08.05

권호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5일 “평화경제가 실현되면 단숨에 일본 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일본 경제가 우리 경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경제 규모와 내수시장”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한·일 갈등을 남북 관계 개선과 연결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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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수석.보좌관 회의 모두 발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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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을 겪으면 우리는 평화경제의 절실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경제가 우리 경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경제 규모와 내수시장입니다. 남북 간의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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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2354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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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 말년에 청와대출입 기자들과 술을 마시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 당대의 인기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대로 하여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를 자주 보이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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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 ]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사

1963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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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는 피땀 어린 노력의 지불 없는 진보와 번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시대, 전환의 시점에 서서, 치욕과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세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덮은 퇴영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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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15cwd.pa.go.kr/korean/data/expresident/pjh/speech.html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조인스] 2015.02.26

[J플러스]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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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역사적인 결단을 해야 할 순간에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거나 휘호를 써서 본인의 각오와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경우가 있었다. 이 단문(短文) 속에는 목숨을 걸고 거사를 결행한 한 혁명가의 굳은 결의와 그가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의 비장함이 함축되어 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을 박정희 대통령만큼 당당하게 말한 지도자가 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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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196840










2004



시장통-쪽방촌의 "박정희! 박근혜!" 연호


2004.03.28.



[오마이뉴스 최경준 기자]



▲ 27일 청량리 경동시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는 상인들과 아주머니들로부터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 한나라당 TV 제공


"아버지, 어머니 맹키로(처럼) 잘 해 줘야 해!"
"세상에! 똑같아, 엄마를 똑같이 빼다 박었어!"


27일, 민생행보에 나선 박근혜 한나라당 신임대표가 지나간 뒤 따라 붙은 시민들의 반응이다.


박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역 앞 후암동 `쪽방촌'과 청량리 재래시장 등을 방문, 사흘째 민생행보를 계속했다.


특히 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모친인 육영수 여사에 대한 40∼60대의 향수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박 대표가 가는 곳마다 대통령 선거를 방불케 하는 '아줌마·아저씨 부대'의 열광적인 박수와 연호가 쏟아졌다. 일부 시민들은 박 대표의 손을 잡고 박 전 대통령 내외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박 대표는 지난 23일 전당대회 대표 경선 후보 연설에서 "여러분이 아시듯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며 박 전 대통령 내외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쪽방촌 찾은 박 대표 "화재 위험 등 대책 마련해야"



박근혜 대표가 후암동 '쪽방촌'을 찾은 것은 오후 1시 54분경. 미리부터 동네 입구까지 나와있던 30여명의 주민들은 "박정희! 박근혜!"를 연호하며 박 대표를 맞았다.


박 대표는 주민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변태연(75) 씨의 '쪽방'을 찾았다. 변씨는 1평 남짓한 쪽방에서 6년째 거주하고 있다. 변씨는 오래전에 박 대표가 운영하던 노인 무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변씨는 쪽방이 좁아 들어가지 못하고 문턱에 걸터앉은 박 대표의 손을 잡고,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뭘 주지 말아라", "아버지 처럼 위험할 수 있으니 몸 조심 해라" 등의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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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을 나온 박 대표는 다시 동네 아주머니 10여명에게 둘러싸였다.


아주머니 "(반갑게) 아이고, 아버지하고 많이 닮았네"

박근혜 대표 "(웃으며) 딸인데요."

아주머니 "TV에서 많이 봤어요. 실물이 낫네."

박근혜 대표 "그러셨어요."

아주머니 "(안쓰러운 듯) 연약해 보여요."

박근혜 대표 "(더 환하게 웃으며) 속은 건강해요."


길을 가다 박 대표를 발견한 한 50대 남자는 "아버지처럼 한나라당 잘 (운영)하쇼, 대통령에도 출마하고…"라며 박 대표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장원에 있다가 퍼머용 수건을 두른 채 뛰어나온 조은숙(47) 씨는 "고생하십니다, 딸애한테 주려고 그러니 사인 좀 해주세요"라며 박 대표에게 노트와 음료수를 건넸다.



쪽방촌을 방문한 지 20여분만에 서울역으로 발길을 옮긴 박 대표는 당직자를 불러 "쪽방촌에 화재가 날 경우 너무 위험이 크기 때문에 화재 대책을 마련해야 하고, 공공근로 사업이 없어서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문제도 챙겨야 한다"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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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박 대표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나중에 꼭 대통령까지 되세요"... 박 전 대통령 초상화도 등장


오후 3시경, 40∼50대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청량리 경동시장에서 박 대표에 대한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시장을 보러 나왔다가 박 대표를 발견한 아주머니들이 박 대표와 손을 잡아보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고, 상가 안까지 들어가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박 대표가 지나가고 나면 여기저기서 "똑같아, 엄마를 빼다 박았어"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나중에 꼭 대통령까지 되라"는 격려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시장 안에서 초상화를 파는 한 할아버지가 진열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와 박 대표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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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박 대표는 상인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박 대표는 상인들에게 "정치의 최고 목적이 장사하시는 분들의 주름살과 근심을 펴드리는 것인데, 그동안 정치가 매일 싸움만 하고 불신과 불안을 조성해 죄송하다"며 "특히 한나라당은 죄가 많아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깨끗한 한나라당을 만들어 국민과 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며 "재래시장을 현대화하고,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표의 인사말이 끝나자 간담회장에 모인 100여명의 상인들이 박 대표를 연호하며 박수를 쳤다. 사회를 보던 장광근 의원이 "총선이 20여일 남았는데 저에게 관심을 가져줘야지, 대표에게만 너무 큰 관심을 갖는 것 아니냐"고 웃으면서 말하자, 참석자들은 다시 "장광근!"을 연호했다.


상인들은 주로 대형마트로 인한 재래시장의 침체 위기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재래시장의 경우 대형마트가 신규로 들어오는 것을 막도록 법제화 해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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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는 "신용카드를 쓰는 데 재래시장과 대형마트의 수수료가 다른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고, 장광근 의원은 "재래시장 주차장 이용료가 비싼 것도 해결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간담회는 10여분만에 끝났다. 장 의원은 간담회를 끝내면서 참석자들에게 "박 대표가 가시는 것이 아쉬울 텐데, 오래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총선 때 한나라당을 밀어서, (총선이 끝난 뒤) 전당대회에서 박 대표가 또 대표가 되게 하는 것"이라며 "박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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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16&oid=047&aid=00000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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