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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정 2
 닉네임 : 미군정  2021-01-05 20:26:55   조회: 86   
1950



[ ...... 미군 비행기가 서울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히려 기다린다. ........


....... 군경 가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 ........ ]



[ ..... 폭탄이 떨어지는데 한 여인이 지붕 위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었다 ........ ]



[ ...... 인공국을 겪어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 ....... ]




[양상훈 칼럼]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2019.06.27



남침 사흘만에 서울 거리엔 붉은 기 흔들며 만세 소리… 하지만 국내 좌익들 먼저 사라져

곧 인공국에 질린 시민들 피해 입으며 미군 폭격 기다려
귀환 정부 국군이 실망시켜도 입대 청년들의 눈동자가 희망




'1950년 6월 28일. 밤새 비는 끊이었다 이었다 하였으나 대포 소리는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였다. … 날이 샐 무렵 전투는 더 치열해지는 듯 대포와 총소리가 콩 볶듯 한다. 가끔 멀지 않은 곳에서 배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벌써 시가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한 분이 보내준 책을 손에 잡지 못하다 6월 들어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 다 읽었다. 6·25 당시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의 일기를 모은 책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 일기'다. 서울 정릉에 살던 그는 서울 시민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피란을 못 가고 졸지에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살아야 했다. 그의 일기엔 '인민군 치하 서울'의 적나라한 실상이 가감 없이 적혀 있다.



'미아리 고개로 차보다 크고 육중한 것이 천천히 내려온다. 대포를 맞아도 움쩍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 아닌가 싶다. 돈암동 거리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다.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 말았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김 교수 일기에 따르면 남침 사흘 만인 6월 28일 이미 서울 거리에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 교수는 '그들 중엔 어제까지 (우파) 대한청년단 완장을 차고 있던 청년도 있었다'고 적었다. 학교부터 인공기가 나부끼더니 7월 초엔 집마다 인공기가 걸리고 담벼락엔 '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김일성 장군 만세' '스딸린 대원수 만세' 등의 벽보가 범람하듯 나붙었다. 남녀 학생들의 인공국 지지 시위는 매일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장관, 학자들이 라디오에 나와 '이승만 역도'를 비난했다.



김 교수는 '나도 붉고 푸른 잉크로 인공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마주 보고 멋적게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 하는 신세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제 시절 사랑방 벽에 태극기를 그려 붙여놓고 어린 가슴을 파닥이던 일이 있었다. 그 태극기를 조용히 뜯어 불사르시던 어머님 뺨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날 밤 순사에게 목덜미를 잡힌 꿈을 꾸고 울면서 잠을 깼다'고 회고했다. 많은 시민이 그 태극기를 버리고 다른 국기를 그려야 했다.



김 교수는 인민군의 첫인상을 나쁘지 않게 적었다. 훈련이 돼 있고 규율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집 나간 형제가 고향에 찾아온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그악스러움과 잔인하고 가차 없음, 허위 선전 선동에 질려 갔다. 김 교수는 명륜동 인민재판 이야기를 적었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들이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 놓고 군중을 향해 반동분자냐고 물었다. 모두 기가 질렸는데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라고 하자 두말없이 총을 쏘아 죽였다.'



김 교수는 이즈음 서울의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이 없고, 어린 학생들의 의용군 동원과 일반 시민의 갑작스러운 '전출'이었다고 했다. 교실에서 누가 '나가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 못 하고 결국 전장으로 보내지는 식이었다. 학부모들은 발만 굴렀다. 갑자기 당의 지시라면서 무작정 타 지역으로 '전출'되는 것도 거의 죽으라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서울대 교수들에겐 '과거 청산'이라면서 '건설대'라는 곳에 지원하라고 했다.



인민공화국은 온갖 개혁이라는 것을 했다. 8시간 노동제, 성별·국적 불문 균일 임금제, 노동 보험제, 임신부 보험제…. 실상은 그 정반대로, 그저 선전 선동일 뿐이었다. 서울의 좌파 정당, 좌익 신문들이 제 세상을 만난 줄 알았더니 제일 먼저 사라졌다. 근로인민당은 흔적이 없어졌고 교직원 노조도 해산당했다.



7월이 지나며 서울 시민의 인민군에 대한 평가는 끝난 것 같았다. 스스로를 '회색분자'라 했던 김 교수는 '미군 비행기가 서울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히려 기다린다. 일종의 희망 같은 것을 품는다. 군경 가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용산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한 여인이 지붕 위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를 찾아온 불문학 손 교수는 "백성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에 이토록 불탄 적은 없었을 겁니다. 인공국을 겪어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라고 했다.



9월 16일 정릉에서도 은은하게 미군과 국군의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너무 강렬한 기대에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고 썼다. 21일 붉은 완장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23일 미아리 고개를 넘는 북행 행렬이 쉴 새 없었다. 28일 굶주린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 군수 물자를 약탈했다. 10월 6일 김 교수 아내는 간직했던 태극기를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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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6/2019062604096.html










1999년 8월호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⑤-人民軍 참전자들의 證言


『환영 인파를 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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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軍의 시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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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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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199908100024








1950.6.28. 서울


[ ......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 ]



2008.06.01 통권 585호(p550~567)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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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8일 수요일, 서울 함락



새벽 3시경쯤,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이며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침에 들으니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근심 어린 쑤군거림이 들린다.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이 다리가 끊어져 물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600여 명과 차량 50여 대가 강으로 떨어져 대부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리가 난 것 같다. 서대문에 있는 조흥은행에 갔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오전 중에 서울 시내가 거의 다 함락됐다고 한다. 앉아서 날벼락 맞은 격이다.


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전예용 부시장 집은 인민군 정보원인 듯한 남녀 5~6명이 서성대며 주위를 살피고 뭔가 정리하는 것 같다. 그 집을 빼앗아 본부로 쓰는 듯하다. 호신용 권총만 찬 채 아래 위를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우리집 뒷산으로부터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죄수 10여 명이 떼지어 오고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폭파되면서 탈출해 뒷산을 넘어 북아현동으로 온 것 같다. 그들은 거칠게 주민들은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다 같이 김일성 장군 만세와 인민공화국 만세를 힘차게 부릅시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한다. 주민이 우물우물하고 망설이자 소리를 지르며 “이 간나새끼들 왜 안 따라 부르느냐.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뭐가 불만인가!” 하면서 죽일 것 같은 몸짓으로 만세를 강요하고 인공기를 흔들어댄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가늘게 만세를 외치고 인공기를 흔들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자치대원이란 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쌀 있느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하겠다. 숨기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니 정직하게 신고하길 바란다”라고 위협한다. 조사해 가더니 저녁에 와서 그 쌀을 다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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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


.....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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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연산 황룡재를 넘어 진산 경유 남진하는 북한군 탱크 부대였다. 아마도 부락민 전부가 대환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으나 누구 하나 반기는 기색 없이 특히 젊은이는 없고 대부분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있자 한 병사가 탱크위에서 "여러분 여기 국방군 간나새끼 없이요? 우리는 여러분 해방시키러 왔시오"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어왔다. "없어요".하고 대답하자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하며 노래를 부르고 만세를 불렀다. 섬뜻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탱크가 20여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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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yhtv.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

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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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 진주에 대한 남한 민중의 더 주된 반응은 방관이거나 공포감이었다. ‘노동계급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는데도 서울의 노동계급은 대거 수도를 떠나거나 직장을 이탈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밀집한 영등포지구에 대한 전평의 보고를 보면 “고려방직, 제일방직, 경성방직을 포함한 섬유산업 종사 노동자는 서울 점령 전에는 1만 1천7백22명이었으나 8월 9일 현재 3천2백82명밖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북한 인민군이 계속 남진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마이클 왈저는 “베트남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에서 반란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와다 하루키도 “거기서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해방전쟁'에 대한 남한 민중의 수동성을 무엇보다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은 김일성 자신의 발언이다. 그는 “우리가 낙동강 계선까지 나아갔으나 남조선에서는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았”고,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 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하였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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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4. 평양



[ ......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


......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 .......


..... 평양에서 남쪽으로 ....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 ]




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속도로 추측하여 오는 15일이면 그 선두부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바 불에 뒤덮인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최후의 평양에서 죽음으로써 대한민국을 찾아 남하하는 그들의 피난행렬은 정의의 승리를 시위하는 인민의 행렬 같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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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대동강철교를 타고 남하하는 동포들

https://namu.wiki/w/%ED%8C%8C%EC%9D%BC:attachment/k28_12040357.jpg







1950.11.




[ .....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 ]



[ ......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 ........ ]



평양과 함흥 (2) 두개의 좌담회


1950.11.16.동아




평양과 함흥에서 민간유지들과 좌담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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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공포의 5개년동안 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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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된 토지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괴뢰정권의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생문제와 아울러 그들이 심각한 안색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민군"의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간 자제들이니 이들 포로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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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통치의 장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는 살인 강도정치에 불과하지만 그 강력한 조직력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1951.1.



[ ......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

.....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 .......

.....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

.....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 ]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민주신보 1951년 01월 15일




기원전 게르만 민족의 유럽대이동도 이랬을까? 세계제2차대전 시 일본침략군을 피해 양자강 줄기를 타서 북상으로 죽음의 이동을 한 세기의 비극이라고 일컬어졌던 중국민족의 수난도 비할 바 아니다. 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두 번 다시 그네들에 속지 않으리라. 여기에 공산치하의 암흑세계에서 그 모진 질곡과 □□으로부터 벗어나와 광명의 천지로 돌아온 몇 사람들의 입을 빌려 민족 앞에 공개하는 그 몸서리나는 생지옥의 양상을 들어보면서 삼천만의 이름으로 아니 세계 자유애호 인류 20억의 이름으로 공정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고향에 둔 어린 것들이 불쌍합니다.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남하한 피난민은 다 나와 같이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평양 거주자 宋榮煥씨).



▹언론을 총탄압, 문화인 李씨:나는 6·25사변 이후 3개월 동안 북한 괴뢰군이 서울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을 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서 없이 그들의 문화정책의 면모를 본대로 말하련다. 첫째 그들의 언론정책을 보라.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 그들의 신문을 보면 그야말로 정부나 당국에 아부만을 일삼고 있는 어용신문이 아니면 관보나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신문기사 검열 같은 것도 일일이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니 과연 이래도 언론자유며 민주정책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하는 선전은 모두 아름답고 기막힌다.


그러나 현실을 떠난 그 선전인 까닭에 민중들은 처음엔 속지만 나중에는 그 기만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기만성이란 더욱 심하다. 물론 우리는 무질서한 것을 자유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보냈다. 여기에 이제 무슨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겠는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갈 길만을 가려고 단연 남하하였다(서울 거주문화인 李永哲씨)



▹교육은 암담, 교육가 金씨:내가 월남하게 된 동기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을 나 한 개인의 행동으로 옮겼을 따름입니다.

5년간 우리가 북한 교육계에서 맛본 鐵帳 내의 교육제도는 세계역사에도 드문 암담한 것이었고,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제도였습니다. 그들의 교육정책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보다 앞서 월남하여 국군진영에서 싸우고 있거나 전사 혹은 戰傷한 나의 후진 제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길에서 잘 표현되고 있을 것입니다(원산거주 교육가 金素仁씨).



▹내분이 다반사, 관리 崔씨:북한 괴뢰정권의 소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번 남하하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외무국장이었던 李康國이가 많은 인테리겐챠와 함께 도태 당하고, 소위 그들의 성분개조운동으로 내분이 자자하던 시기를 回感하면 진저리가 나고 치가 떨립니다. 소위 남북연석회의 당시에 그들은 많은 관리들을 여관 보이로 변장시켜 정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기만과 학살정책으로 인하여 괴뢰정권 내부의 모든 관리들은 상호견제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친소파가 아닌 분자는 기어이 숙청 당하고야 마는 형편입니다.


독신관리들의 합숙소에는 반드시 정치보위부의 스파이가 개입하여 각자의 일언일동을 감시하고 있습니다(관리, 전 평양외무성 西歐部 근무 崔成極).



▹지긋지긋하오, 부녀 吳某씨:지금 생각하여도 지긋지긋한 90일 공산치하의 서울의 생활……. 겨우 걸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도 괴뢰군이라면 지금도 “엄마”하고 품안에 뛰어오며 울음소리를 그치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 같은 강제노동에 수수국, 캬배쓰국 한 그릇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남편은 반역분자라고 이곳 저곳을 피해 다니고 어린 자식 6명을 데리고 살자니 배급하나 없고, 또한 돈 한 푼 없는데 매일 야밤에 남편을 내놓으라는 놈들의 공갈협박에 1일이 천추 같았다. 저녁마다 애국자를 총살하는 총성, 수많은 괴뢰군의 강도·절도로 하루 한시간의 수면조차 어려웠다(서울 거주, 吳某씨).



▹공산주의 강요, 학생 康군:배우는 학도로써 진리의 탐구란 생명이요, 또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북 공산치하의 교육정치란 진리의 탐구는커녕 그 정열조차 가지지 못하는 불행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곳의 교육제도는 4년제의 인민학교로부터 위로 초급중학(3년), 고급중학(3년), 각종의 전문학교(4년), 그리고 대학교(4년)가 있으며 이에 공산운동의 간부양성기관인 당학교가 있는데 전부 맑스·레닌주의 강제수업이 그 교육의 근본중심이 되어 있다(평양 음악학교 생도 康斗柱).



▹거래세로 파탄, 상인 朴씨:북한에서는 상업을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만 상행위를 할 수 있다. 每 등록된 상인들은 매월 20일까지 거래세라는 것을 바쳐야 되고, 其 외에 공채 할당이라던지, 대소 행사비 조달은 전부 상인들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세금, 부담금 등으로 상인들은 허리를 펴볼 여유라고 없고 1년 가야 넥타이 한 번 매볼 수 없는 형편이다. 상거래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도저히 남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행위의 자유성은 없다. 상업규모에는 별 제한이 없으나, 대규모로 하면 할 수록 손해를 입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하면 그 만큼 모든 부담금도 증가하므로 100만 원의 자본을 가진 상인이나, 10만 원을 가진 상인이나 자기 소득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함북 길주읍 거주).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 상시 감시.....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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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을 취□하는 외에 공산주의 정권은 농민들에게 지방건설 내지 광산작업을 무보수로 강요하였으며 매 호구는 1 내지 2개월 간 자진노동을 제공하였고 18~55세의 전 농민에는 1년에 1회씩 20일간의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1) 북한 농민들은 항상 관공서 숫자와는 반대로 전농생산량은 일제시의 수준에도 미급하였으며 정부발표에는 멀리 미달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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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



[ ...... 중공군 포로 ...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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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동안 정전회담중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만 중요한것은 포로교환 문제였습니다. 자료를 보면 미군포로가 5,178명, 전사자가 33,629명, 부상자가 103,284명입니다.


한국군 포로는 8,321명 밖에 안되요. 우리가 수용했던 인민군포로가 75,823명인데 한국군포로가 8,321명밖에 안된다는건 말이 안돼요. 우리는 정직하게 포로를 다 보냈는데, 저들은 8천3백여명만 보내고 나머지(6만여 명으로 추정)는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어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시킨겁니다.



중국측 자료를 보면 모택동이 중공군포로 21,371명중 공산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가 1만5천여명 즉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돌아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 하여 叛徒반도라며 갖은 학대를 받고 살았답니다.


포로 3분의 2가 돌아오지 않은데 화가난 모택동이 엉뚱하게도 김일성에게 한국군포로들을 송환하지 말라고 분풀이를 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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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이 한국군 포로 보내지 말라, 김일성에 지시 >


“...중국인 전쟁포로 2만1천3백74명 가운데 3분의 2는 공산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절, 그 대다수가 대만으로 갔다. 본토로 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叛逆者(반역자)의 딱지가 붙어 모택동정권이 끝날 때까지 모진 취급을 당했다.


또 한 가지, 모택동은 한민족의 불행에 잔혹한 공헌을 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모택동은 휴전당시 북한에 불법 억류된 6만 명 이상의 한국군 포로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결정에 손을 빌은 것이다. 한국군 포로를 보내지 말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이다.(이때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 彭德懷(팽덕회)에게 이양하고 있었다)


한국군 포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에서도 가장 후진 벽촌으로 분산수용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금도 이런곳에 그대로 수용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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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2.4. 동아일보



노예노동에 2천5백만


유엔본부, 중공의 암흑정치폭로



[유엔본부 2일발 INS=합동] 가브리엘 사바티노 記 = 유엔 본부가 2일 발표한 일문서에 의하면 중공은 중국본토 전역을 통하여 2천5백만명을 노예노동수용소에 구류하고 있다 한다.


356면에 긍한 전보고서는 國府 미국 및 철의 장막 배후의 노예노동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국제기구들에 의하여 제출된 실증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다.


國府는 동보고서에서 중공정권은 '다름 아닌 방대한 해골의 누적'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동보고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 북평 정권의 강제노동제도는 그 본을 따른 소련의 그것보다도 더 냉혹하고 잔인한 것으로서 그와 같은 제도의 강행은 드디어 중국 본토를 유혈통치의 암흑세계로 화하였다."


중공내의 노예노동자 수는 2천5백만 이상인 데 그중의 일백만은 포로된 국부군병사들과 민간인들로서 그들은 강제노동형의 언도를 받고 참화의 희생물이 된 것이라고 국부는 보고하였다.

국부는 이어서 모든 문명국가에서 정죄 받은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강제노동제도'를 제거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제재책'을 채택하라고 국부는 요구하였다.



미국은 중국본토상 2천개에 달하는 各郡마다 최소한 하나씩의 강제노동수용소가 현존한다고 보고하였다. 동보고서는 이어서 중공의 강제노동과 지원노동 사이에는 실지로 하등의 차이도 없다고 부언하였다.









1958.12.5. 동아일보



공산제 붕괴는 필지

'덜' 장관 서방단결을 촉구



[ 샌프란시스코 4일발 로이타=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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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덜레스 씨는 자유중국이 공산정권이 말살하고자 하는 중국문화의 자격을 갖춘 보호자라고 전제하면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아직도 자유는 당기는 힘을 가진 자석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보자. 한국에서 잡힌 중공포로중 3분지 2가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중공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향항과 마카오로 도망쳐 왔다. 한국에 있어서는 약 2백만명이 북한으로부터 남한으로 피난하여 왔다. 월남에서는 거의 백만이 남부로 왔다. 항가리 폭동시에는 20만명이 자유를 찾아 피난하였다. 독일에 있어서는 3백만 이상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왔다. 참으로 이 증거야말로 민주주의적 자유에의 국민견인법칙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 분단책임 ? 중공한테 물어라 "


조갑제 2005년 11월 5일



1988년에 기자는 月刊朝鮮에 싣기 위해 용산미군기지를 최재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만났던 미군관계자의 말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똑 같은 쟁점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계자는 최근에 미군범죄자에 대한 한국측의 재판권을 둘러싸고 비판적 기사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데 대하여 몹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간의 행정협정은 美日간의 행정협정과 거의 같다. 美日간의 협정문에서 JAPAN이란 낱말을 KOREA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통용될 정도다. 이 협정이 발표된 뒤 한번도 한국정부가 개정을 요구해 온 적이 없다는 것은 이 협정이 절대로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불평등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미군 자체내의 재판결과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 우리가 달마다 한국정부에 보고하는 처리 결과보고서가 있지 않은가. 지난 봄 동두천에서 칼을 꺼내 한국인을 위협했던 상병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일병으로 강등시키고 예편시킴과 동시에 1년 징역에 3천6백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대구에서 다투다가 한국인 가옥의 지붕을 부순 미군 일병은 2등병으로 강등되었고 외출금지 14일 초과근무 14일의 처벌을 받았다. 물건을 암시장에 판 한 사병은 1계급 강등, 두 달간 초과근무, 4백17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우리 군사법정의 형량이 한국법원에 비해서 결코 낮지 않다. 실제로 많은 미군인들은 차라리 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면 하고 있다』


한 미군 고위관리는 최근의 反美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보고 분단의 책임을 지라고 하는데 1950년에 우리는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한국의 재통일을 거의 완수했었다. 그때 중공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한반도 통일의 공로자가 되었을 것이다. 분단의 책임을 제대로 물으려면 중공한테 물어라. 한국인의 反美의식은 미국을 한국의 큰형으로 생각하고, 큰형은 동생을 무조건 감싸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이 한국에 시장개방압력을 넣으면 그것은 큰형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반미로 흐르고 있다.


6·25에 미군이 개입한 것을 미국이익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지 말라. 트루만 대통령의 파병결정에는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라는 휴머니즘적인 요인이 더 강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자꾸만 이해관계로써만 미국의 행동을 분석하려 하는데 미국이란 나라는 신념과 이상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다』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read.asp?tablename=choboard&idx=8271
2021-01-05 20: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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