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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정 1
 닉네임 : 미군정  2021-01-05 20:24:25   조회: 78   
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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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1945.8.



[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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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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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1945.9.9.



하지, 조선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을 발표



매일신보 호외

1945년 09월 09일




이날 하지장군의 조선 동포에게 대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제군이여 !



태평양방면육군총사령관이요 연합국총사령관 맥아더대장을 代하여 余는 오늘 남조선지역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駐朝鮮美合衆國司令官으로서 余는 玆에 下記 항복에 관한 諸조건을 確守케 하노라. 余는 玆에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경제상태를 앙양시키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기타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과하여 진 기타 제의무를 이행하노니 점령지역에 있는 제군도 또한 의무를 다 하여라. 余의 지휘하에 있는 제군은 연합국군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장차 발할 余의 諸種의 명령을 엄숙히 지켜라.


제군은 평화를 유지하며 정직한 행동을 하여라. 이를 지키는 이상 공포의 念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만약 명령을 아니 지킨다던지 또는 혼란상태를 일으킨다면 余는 즉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단을 취하겠노라. 이미 확정된 항복조건을 이행함에는 余는 시초에 있어서는 현 행정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노라. 동시에 余는 장차 나의 지휘하에 있을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기 바란다.



조선인민을 위하여 정부의 정책은 장차 필요에 응하여 개정될 것이다. 法制, 商業, 工業, 學校敎育에 있던 종래에 諸種의 인류적 차별은 곧 끝이 날 것이다. 신앙의 자유, 언론·사상의 자유는 제군에게 돌아 갈 것이다. 신문, 라디오는 금후 곧 조선사람을 위한 기관이 될 것이다. 余는 조선인 제군이 장구하고 또 귀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노라. 또 제군이 과거 수십년간 제압박하에 신음하여 온 것도 잘 알며 제군의 대망이 무엇이라는 것도 잘 아는 바이며 제군이 생활상태 개선을 하루 바삐 수행하고자 하는 제군의 열망을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것도 잘 아노라.


此點에 관하여는 제군이 그 때가 올 때까지 좀 기다려 주기 바란다. 제군이 참아 온 수십년에 亘한 弊政을 수일사이에 전부 교정코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어다.

장차 올 幾個月에 亘한 제군의 언어 행동으로서 제군은 전세계민주주의 국민 及 그들의 대표자인 余에게 전세계라는 일가족에 구성분자로서의 명예있는 지위를 받을 일민족의 자격능력을 표시하게 될줄 아노라.



1945年 9月 9日

매일신보 호외 1945년 09월 09일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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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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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14.



[ ...... ‘조선인민공화국’ ....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 ........

......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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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1 운동 직후 수립된 漢城임시정부에서 執權官總裁, 統合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블라디보스톡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李王家의 후예, 미국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인 최초의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 등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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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9월 5일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수립을 선포했던 呂運亨이 9월 14일 발표한 조각에서 김구·허헌·김규식·여운형 등 국내외의 지도적 정치가들을 모두 망라한 중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한 것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도 그는 국내 정치인들로부터 가장 높은 위치의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또한 공산당의 朴憲永도 이승만의 귀국 후 그를 찾아가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으며,4)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韓民黨도 1945년 9월 16일의 창당대회에서 이승만을 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일에 좌우익의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獨立促成中央協議會 에서도 이승만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


1946년 2월 미 군정하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임시정부요인, 한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인민당, 무소속,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가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하지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승만은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김규식은 부의장으로, 그리고 김구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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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10선거로 수립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에도 재석 198명 중에서 188표를 얻어 당선된 점이라던가 대통령선거에서도 180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들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은 이변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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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 한경직 목사의 증언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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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 .....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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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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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5. 미군정청 법령 9호



[ ......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 ....... ]



법령9호 공포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5일밤 군정장관으로 발표된 법령에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현존하는 계약과 협정이 개정되었다. 따라서 소작인이 지불할 최고소작료는 소작인이 경작한 토지의 총수확물의 3분지1로 협정되었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산출된 전수확의 3분지1 이상의 소작료에 대하여는 여하한 새로운 규정된 계약도 실시되지 못한다. 그럼으로 이 법령에 위반하여 작성된 계약도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면 그 효력이 계속되고 지주가 법령에 위반할 때는 그 1할을 감한다.


그리고 지주는 재판후에 결정되는 이외에 현재의 소작관계를 해약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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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 .......

......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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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제와 3.1제, 농민과 해방의 의미



프레시안 : 지방 상황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소작료 문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이뤄졌다.


서중석 : 앞에서, 많은 한국인이 해방의 뿌듯한 감격을 (본격적으로) 맛본 건 8월 16일부터 치안대가 각지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서였다고 말했다. (그에 못지않은 것이) 3.7제였는데, 이건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무렵 실시됐다. 3.7제는 소작료를 소출의 3할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 아니었나. 3.7제가 실시되니까 농민들은 '이게 진짜 해방'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소작농으로 설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다 소작료로 빼앗기지 않았느냐. 그런데 7할을 우리가 차지하고 3할만 지주한테 주면 된다? 아,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해방된 세상 아니냐', 이런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해방을 맞은 한국 농민들의 그 기쁨을 미국도 묵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스스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미국이 아주) 묵살할 수는 없었던 것하고 똑같은 일이 여기서도 일어난 거다.


3.1제는 (소출의) 3분의 1만 지주한테 주고 3분의 2는 농민이 차지하라는 거다. 66퍼센트를 농민이 차지하게 됐으니 3.7제랑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선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해방 공간을 살필 때) 이런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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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한민당도 토지 개혁에 직접 반대한 적은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실질적인 반대를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한민당의 김병로 같은 사람은 이미 1945년에 '소작료와 소작제, 이거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아, 한민당 중진이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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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14. 전농



[ ...... 우리는 3·7제로 납부하라고 극력 역설하고 있다. ....... ]



전농 대표, 군정청을 방문하고 식량문제 등에 관해 의견교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7일




14일 오후 2시반에 全國農民組合總聯盟 대표 李龜串, 柳赫, 朴庚洙, 崔漢喆 4인은 군정장관 아놀드소장의 초청을 받고 장관을 만나 대략 左와 如한 문답식 요담이 있었고 同 5시 다시 하지중장과 회견하고 左記와 如한 의견의 교환이 있었다.


◊ 군정장관 아놀드


현하 조선의 식량문제의 해결이 긴급한데 군정청에서도 만단의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全國農總에서도 책임을 가지고 협력하기를 바란다. 현재 농촌에서는 쌀을 방매치 않는다. 그 이유는 역시 어떤 선동분자의 관계가 아닌가 일본에 밀수출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조선민족으로서 가히 할 바가 아니다. 소작료를 내어야 할 것이며 지방에 따라 불납하는데도 있으나 소작료는 반드시 낼 의무가 있을 것이다. 도시나 농촌에 생활필수품을 주어야 되겠고 공장을 움직여야 되겠다.


38도 문제는 전조선민중이 급속한 해결을 요망하고 있다. 우리도 중대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는 自己만으로 해결치 못한 것이므로 현재 모스크바에서 개최중인 외상회의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무슨 방책이 서리라고 본다.


◊ 전국농민조합총연맹대표


쌀을 팔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쌀이 잘 방출되지 않은 이유는 일반물가가 조정되지 않아서 농촌에서 필요한 생활품은 매우 고가로 매입하고 농민이 가지고 있는 쌀은 과도한 염가로 팔고 있다. 현재 쌀을 가지고 있는 농민은 중농이상과 지주 又는 간상배들이다. 일반 빈농은 자기네 식량까지도 부족한 현상이다. 쌀을 밀수출하는 것은 여수, 군산 등지에서 밀수상인들의 反국가적 행동이다. 이를 금지하려면 군정청의 권력이 아니면 곤란하다.


소작료문제는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기 전에 우리는 3·7제를 실시했다. 미군정이 실시된 후에 3분의 1제를 발령하였는데 그 차는 매우 적으나 그 점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소작료를 불납하는 지방이 혹 있는지 모르나 우리는 3·7제로 납부하라고 극력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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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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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 ‘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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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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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나 현대는 용어의 혼란시대다. 독재주의자들의 애용어가 ‘민주주의’가 되어 있고 괴뢰정권의 간판이 ‘민족전선’, ‘조국전선’으로 캄푸라치되고 있으며, 공산당 가면인 ‘노동당’과 영국의 ‘노동당’이 이름은 같으면서 본질은 대척적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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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민족사회주의란?>

국민신문 1948년 10월 14일








1945.11.2. 하지



[ ......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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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John R. Hodge) 장군은 11월 2일에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음을 보고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이 지배권을 장악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대부분의 과격분자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는 또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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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80.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을 지원하다









1945.11.



[ .......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8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朝鮮民主黨의 創黨과 新義州學生들의 蜂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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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民黨보다 더 保守的인 朝民黨의 「政策」



창당대회는 11월 3일 오후에 구 일본인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채택된 조선민주당의 「선언」과 「강령」 및「정책」은 조선민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민족주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6개항의 「강령」은



(1)국민의 총의에 의하야 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기함(제1항),

(2)종교, 교육, 노농(勞農), 실업, 사회 각계 유지의 결합을 요함(제4항),

(3)반일적 민주주의 각 정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함(제5항),

(4)소련 및 민주주의 제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제6항) 등으로서, 친일파 배제와 소련과의 우호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여 전 민족의 통일을 도모한다는 「강령」(제5항)의 규정은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확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12개항의 「정책」에는 조선민주당의 보수적인 성향이 그대로 표명되어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국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와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고(제1항),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를 실시하며(제2항), 교육과 보건의 기회균등을 보장한다(제3항)고 하여 의회제 민주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創定)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제8항)이라고 애매하게 표명된 토지문제나 노자문제(勞資問題)의 일치점을 득하야 생산의 지장이 없기를 기함(제11항)이라고 한 노동문제의 비전 등은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1) 그것은 좌익정당들로부터 지주들과 친일파의 정당이라고 비판받던 남한의 한국민주당의 정강정책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이라고 할 만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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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당은 창당되자 “요원의 불처럼 단시일내에 경이적인 숫자의 당원을 획득”37)할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창당하고 한 달 뒤인 12월 1일 현재 북한지역의 공산당원수는 4,000명 미만이었는데 비하여 조민당의 당원수가 5,406명이었다는 사실38)은 조민당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북한 전역의 도-시-군-면에 지부가 결성되어 당원수는 결당 3개월동안에 50만에 이르렀다고 관계자들은 주장한다.39) 그것은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나, 조민당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지방지부가 결성되는 상황의 한 보기로 진남포(鎭南浦)시당을 결성할 때의 상황을 이윤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앙당부에서 수백명의 당원이 … 트럭에 분승하고 악대를 선두로 진남포로 향하였다.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40)


이를 시기하여 지방의 공산당은 조민당 지방당부를 습격하고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허무맹랑한 사건을 날조하여 조민당의 지방당간부를 경찰에 구금시키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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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5. 조만식 연금









1946.3.


[ ......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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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예비 회담의 합의에 따라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蘇聯의 立場은 소련측 수석 대표인 스티코프(T.F. Shtikov) 中將의 共委 開幕 演說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수립될 韓國 臨時政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民主的인 政黨과 社會團體를 망라할 토대 위에서 수립될 것이며, 이 정부는 장래 소련에 대한 攻擊 基地가 되지 않을 민주적인 정부, 이를테면 소련에 友好的인 政府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言明했다.53) 이것은 장차 소련이 反共과 反蘇的인 입장을 분명히 하는 남한 내의 右翼勢力의 한반도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意志 表明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미국측 역시 共委에 임하는 나름대로의 기본 전략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共委 開幕에 앞서 미국의 合同參謀部(Joint Chiefs of Staff: JCS)가 미국측 대표단에 하달한 다음과 같은 ‘언론·출판·여행의 자유에 관한 지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대표단으로 하여금 곧 개최될 공동위원회의 회기 벽두에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는 하아지 장군의 결정이 이 곳에서 승인되었다. 소련측이 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고, 오히려 同委員會를 休會시키려 할 경우 하아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1. 언론·출판 및 여행의 자유에 대하여 臨時政府가 기능 수행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종 결정을 본다는 것으로 將軍의 立場을 留保시킨다.

2. 한국의 민주주의적 政黨 및 社會團體와 협력하기 위하여 위원회의 위원들과 參謀陣이 한국 全域을 여행하기로 한 최초의 협정을 강조한다.

3. 그 후에 임시정부의 구성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킨다.54)



여기에서 드러난 共委에서의 미국측 전략은 단적으로 한국인에게 최대한의 언론·출판·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측은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며 例外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名分을 내세워, 만의 하나 反託 運動을 주도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단순히 反託을 주장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共委와의 협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울러 북한에 대한 開放 政策을 소련측에 요구함으로써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한 소비에트化 過程의 實狀을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측 역시 궁극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한반도 지배를 방지한다는 기본 노선 위에서, 共委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우익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는 자세로 共委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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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1946.3. 평양



[ ...... 입헌민주주의적 반동의 영향을 받아, .... 모든 정책에 반대 .......


...... 2월 28일부터 모든 학교가 파업에 들어감을 선포한다는 결정 .......


..... 조선의 민족정부 수립을 가속화할 것, 신탁통치와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항의를 촉진할 것, .... 언론‧출판‧집회‧이동‧결사‧여행의 자유를 부여할 것, .......


결론 : 평양시 청년학생은 조선 반동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들어갔으며 ....... ]



Материал о забастовке учащихся Пхеньянских средних школ


번역문


평양 중등학교 학생파업 관련 자료



평양시 중등학교-중학교 및 직업기술학교- 학생 14명과 공업전문대 학생들이 입헌민주주의적 반동의 영향을 받아, 조선공산당과 임시인민위원회에 그리고 북조선 소비에트 사령부가 진행중인 모든 정책에 반대하는 무기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교내 반동 출현의 최초 징후들이 발견된 것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였다. 교내에 일시적으로 삐라가 나타났는가 하면 비밀회합이 열리기도 하는 등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2월 27일, 즉 조선의 기념일인 3월 1일 전날 밤에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의 비밀회합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을 것과 2월 28일부터 모든 학교가 파업에 들어감을 선포한다는 결정이 채택되었다. 이 회합에서 채택된, 학생들에 대한 호소문을 보면, 시위는 공산당이 자신들의 슬로건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며,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은 공산당과 모스크바회의에서 나온 결정에 협력하는 자라고 되어 있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것과,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제라는 것이다. 호소문에는 김일성에 대한 일련의 요구들이 제기되어 있는데, 즉 조선의 민족정부 수립을 가속화할 것, 신탁통치와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항의를 촉진할 것, 구금된 대학생을 모두 석방할 것, 식량문제를 해결할 것, 언론‧출판‧집회‧이동‧결사‧여행의 자유를 부여할 것, 학생과 주민에 대한 억압을 중단할 것 등이다.


2월 28일에는 실제로 학교 수업이 없었다. 조치가 취해진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 출석이 보장되었으나 전적으로 보장된 건 결코 아니었으며, 이들의 참가는 대부분 형식적이었다.


3월 2일에도 파업은 계속되었다. 3월 3일 학생들과 그 부모들에게 3월 5일까지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퇴교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도인민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라디오로 공표되었고, 부모들이 참가하는 집회가 열렸다.


3월 4일 수업에는 20% 미만의 학생이 출석했고, 3월 5일과 6일에는 35%, 3월 7일에는 출석률이 다시 20% 미만으로 떨어졌다. 개별 학교를 제외한 학교들에서 실제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파업 결정 이행 보장을 위해 어떤 중앙의 지도를 받고 있는 게 분명한 일부 반동 학생들은 3월 2일부터 교복을 다른 옷들로 심지어 경찰복으로 갈아입고는 계속 수업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위협하고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등굣길에 피켓을 들고 있다. 특이한 일이 또 있다. 박승오(Пак Сын-О)가 교장으로 있는 어떤 남자중학교는 그즈음 내내 거의 정상적으로 수업을 한 것이다. 이 학교 대표도 2월 27일의 비밀회합에 있었으나 결정에는 동의하지 않아서 학교가 시위에 전면 참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월 6일 수업에는 634명 가운데 고작 7명만 나왔다. 반동 삐라 유포로 1월 19일 체포된 이 학교 학생 9명이 석방될 때까지 파업을 한다고 학교에 공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쪽지가 한 상급반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최근 며칠간 각 학교와 공업전문대에서는, 파업을 권하고 비밀회합의 호소문에 상응하는 요구들⎯우선적으로는 구금된 학생들의 석방⎯을 제시하는 일련의 삐라가 발견되었다.



결론:



평양시 청년학생은 조선 반동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들어갔으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ㄱ) 중등 및 고등학교 학생들은 다수가 부르주아 지주로, 가정의 정치적 분위기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학교로 가져온다. 중등학교들은 조선의 [판독불가]에 있어서는 이로운 존재이다.


ㄴ) 교사들 대부분은 당시 일본에서 수학한 부르주아 지주이자 인텔리이다. 또한 학교 전체가 그런 것처럼 이들도 전부 다 부르주아 정책에 따라 ‘정치 바깥에’ 있다. 학교에서는 극단적인 방향의 정치교육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바 없다. 교사가 어떤 당에 가입하는 것은 기존 전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특수한 무당파로 여기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청년동맹이 학생들 사이로 침투할 수 없는 것이다.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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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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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1946.4. 동아일보 『삼팔선』 이북 답파기 평양




[ .......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

......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 『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 .......



......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 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 ........ ]




국경 아닌 국경 『삼팔선』 이북 답파기 (3)


동아일보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 있을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



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 『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 『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 『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 『살아야 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 『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 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 『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 『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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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 『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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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2-%ed%95%a8%ea%b2%bd%eb%8f%84/








* 1947.10.



[ ......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

......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 ........ ]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동 계획은 이미 북조선이 남조선에 보내는 전력을 차단하여 암흑의 엄획하에 행하여질 공격까지도 상정하고 있다 한다.
이 계획은 전 평안남도보안대장 당년 32세의 尹昌善(音譯)에 의하여 발표된 것인데 尹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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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는 ‘미국의 소리’ 방송 외의 조선에 대한 방송을 청취한 까닭으로 남조선 상태가 양호함을 알았다. 이 미국방송은 余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청취할 수 있었다.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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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대는 일본병기로 무장된 것이며 목하 소련은 이들을 위하여 다수의 輕兵器를 齎來중이다. 과거에 있어 소련인은 직접 북조선인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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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5.12. 獨立戰取國民大會



[ .....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

......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 ]



[ ...... 敵은 우리 墻內에.....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독립戰取국민대회가 개최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한 피로 자라온 배달민족의 명예를 피와 땀으로 뭉치고 뭉쳐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수 개월을 두고 세계공약에 의하여 우리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 줄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고대하고 은인자중하여 오던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略)


獨立戰取國民大會는 12일 오후 1시 반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바 대회는 먼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 합창에 이어 선열에 대한 경건한 묵도를 드린 다음 대회 회장인 吳夏英으로부터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기쁜소식이 나오지나 않나 하여 매일같이 라디오 신문에 온 신경을 총집중하였던 것이나 오늘날에 접한 소식은 과연 우리를 기쁘게 하였던가. 해방이래 9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라고 바라던 기쁜소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어 싸워 나가지 않을 터인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완전자주독립시켜 4천년래 이어받은 혁혁한 역사를 자손만대에 물리지 않을 터인가. 자! 전취하자. 완전자주독립을”


하는 열열한 개회사가 있자 곧 이어 咸尙勳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진상보고가 있고 뒤따라 조선민주당 白南弘의 서북조선진상보고가 있었으며, 선언문을 申均이 결의문을 朴永昌이 각각 낭독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순서로 각 단체대표의 결의를 표명하고 동 오후 4시 경에 만세 3창으로 뜻깊은 대회를 마치었다.



◊ 各團體代表 決意表明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韓旻洪, 基督敎全國靑年聯合會 姜元龍, 大韓獨立促成愛國婦人會 黃基成,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金龜, 大韓獨立農民總聯盟 方致規, 美蘇共同委員會對策全國國民總聯盟 金一, 反託學生總聯盟 李哲承,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李重根, 新朝鮮建設同盟 李康勳, 文學家協會代表, 學生獨立戰線代表



◊ 大會宣言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先代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獨立戰取國民大會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隣諸邦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國際公約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臨時政府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美蘇共同委員會는 蘇聯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徒費한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公眼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國土와 國民을 兩斷하고 나아가 國是와 國權을 兩分케 한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公議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蘇聯의 權謀와 인류적 특권이오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外力의 제압에 血과 肉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回憶하고 다시금 外力의 方寸에 形과 體가 左右되려는 현하의 苦境을 직시할 때 우리는 他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 보다도 源由를 자신에게 살피어 內省할 필요를 느끼나니 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來寇보다도 敵은 우리 墻內에 있고 外傷보다도 菌은 우리 體內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叛逆徒黨의 존재가 그것이며 他方에 追尾하여 外侮를 誘致한 惡質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受託의 妄論을 공언하고 민족적 巨役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互全에 苟安함이 본래 우리의 義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玉碎로 나감도 우리의 策이 아니나 그러나 民族正氣의 주축은 부동이라 行坐進退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背水陳頭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世界에 명시하여 輿論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永劫에 護持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自我요 오직 自力이다. 自尊·自持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自立·自行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自助·自勉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集注시키어 解放朝鮮을 거룩하게 하고 光復朝鮮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獨立戰取國民大會

決意5箇條


1) 美蘇共同委員會의 책임을 규명하여 국제여론의 심판을 구함

2) 自主政府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民意의 歸一을 기함

3)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國民動員의 실적을 擧함

4)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圖함

5) 友邦善隣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의 매진을 요함



大韓民國 28년 5월 12일

獨立戰取國民大會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1946 정치지도자 지지도


[ ..... 이승만 32%, 김구 22%....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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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두 차례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우파 정당은 43%·40%였던 데 비해, 좌파 정당은 33%·31%에 그쳤다.


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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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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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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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6.23. 조봉암



[ ..... 현재 朝鮮民族은 共産黨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朝鮮共産黨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 ....... ]



[ ...... 民主主義原則에 의하여 건실한 자유의 國家를 건설함에 있고 어느 一階級이나 一政黨獨裁나 專制이어서는 안된다 ........



...... 聯合國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며 또 진심으로 협력 .......

...... 共産黨과 같이 蘇聯에만 의존하고 美國의 理想을 반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 ]




조봉암, 공산당과 그 지도하 모든 정치활동 부인하는 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6월 26일



인천 좌익진영의 거두 曺奉岩명의로 23일 상오 인천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민전주최 인천시민대회장과 기타 각 관공서 신문사 등에 다음과 같은 공산당과 그 지도하에 있는 모든 정치운동을 부인하는 성명서가 배포되었다.



聲明書



1) 聯合國의 승리에 의하여 그들의 호의로써 해방의 기쁨을 얻은 우리 朝鮮民族은 民主主義原則에 의하여 건실한 자유의 國家를 건설함에 있고 어느 一階級이나 一政黨獨裁나 專制이어서는 안된다는 것.


2) 朝鮮民族은 자기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민족 전체가 요구하는 통일된 정부를 세울 것이고 共産黨이나 民主議院의 독점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는 것


3) 현재 朝鮮民族은 共産黨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朝鮮共産黨의 계획으로 된 人民共和國 人民委員會와 民主主義民族戰線 등으로써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는 것


4) 우리 朝鮮民族은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聯合國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며 또 진심으로 협력하여서 建國에 진력할 것이오 지금 共産黨과 같이 蘇聯에만 의존하고 美國의 理想을 반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


5) 朝鮮의 建國은 民族全體와 자유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勞動階級의 독재나 資本階級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것.



1946년 6월 23일

曺奉岩







1946.8. 군정청여론국 여론조사



[ ...... 1) 일신상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나) 정치적 자유 4,669인(55%) .......



(問) 2)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
.....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7,221인(85%) ........



(問)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 (다) 공산주의 574인(7%) ......... ]





軍政廳輿論局, 朝鮮國民이 어떠한 종류의 政府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동아일보 1946년 08월 13일




軍政廳輿論局, 朝鮮國民이 어떠한 종류의 政府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군정청여론국에서는 조선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 가를 窺察키 위하여 30항목의 설문을 열거하고 여론을 조사하였는데 설문에 반영된 민의는 다음과 같다.



(問) 1) 일신상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가) 생활안정을 실현할 기회 3,473인(41%)

(나) 정치적 자유 4,669인(55%)

(다) 모릅니다 311인(4%)



(問) 2)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219인(2%)

(나) 數人獨裁(민의와는 무관계) 323인(4%)

(다) 계급독재(타계급의 의지와는 무관계) 237인(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7,221인(85%)

(마) 모릅니다 453인(5%)



(問)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問) 4) 귀하는 조선정부가 개인의 권리의 자유 시민의 의무 정부의 책임과 구조 등을 규정한 성문법에 의거하여야겠다고 생각합니까?


(가) 예 7,356인(87%)

(나) 아니오 242(3%)

(다) 모릅니다 853(10%)



(問) 5) 만일 예라면 이 헌법작성 시기는 언제야 하겠습니까?


(가) 只今 1,857인(17%)

(나) 전조선인이 통일된 때 5,222인(71%)

(다) 모릅니다 269인(2%)



(問) 6) 이 헌법은 何者가 작성할 것입니까?


(가) 민선헌법회의 5,907인(70%)

(나) 중요정당이 선출한 위원회 1,134인(13%)

(다) 미소공위가 선출한 헌법위원회 610인(7%)

(라) 미군정이 선출한 헌법위원회 159인(2%)

(마) 미소공위 145인(2%)

(바) 미국정부 49인(1%)

(사) 모릅니다 447인(5%)



(問) 7) 조선의 최고법이 되기 전에 이 헌법은 누가 통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합니까?


(가) 이 헌법을 작성하는 단체 926인(2%)

(나) 조선인민 6,785인(80%)

(다) 미소공위 239인(3%)

(라) 기타 155인(2%)

(마) 모릅니다 347인(4%)







* 19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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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최근대적 의미로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혹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용어는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기타 서구라파에 있어서 사회당은 공산당과 전혀 별개의 유형을 가리키는 통용 명칭으로 사용되어 있으며, 사회당의 노선은 사회민주주의로써 표현되어 공산독재주의와 대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만큼 새삼스러이 민족사회주의라는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용어를 창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4. 공산주의는 사회혁명의 수단으로서 무산계급 독재를 채용하고 무산계급 독재는 그 계급의 전위당으로서의 공산당의 독재가 되고 다시 당내의 핵심인 정치국의 독재로 마침내는 한 개인의 독재로 전락하는 데서 그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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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나 현대는 용어의 혼란시대다. 독재주의자들의 애용어가 ‘민주주의’가 되어 있고 괴뢰정권의 간판이 ‘민족전선’, ‘조국전선’으로 캄푸라치되고 있으며, 공산당 가면인 ‘노동당’과 영국의 ‘노동당’이 이름은 같으면서 본질은 대척적인 것이 아닌가. 이름은 하여간에 그 내포한 본질에 있어서 독재를 항상 경계할 것이니 독재는 아무리 성의라 하더라도 濫權과 부패를 동반하게 되어 자승자박을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 풀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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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민족사회주의란?>

국민신문 1948년 10월 14일











1947.8.15. 김일성


[ ...... 북조선에는 공산주의가 실시된다고 하는 것은 .... 발악적 악선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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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47년 8·15해방 2주년을 기념하는 대회석상에서 토지개혁이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반동분자’들의 악질적 난동이라고까지 공격했다.


……해방 이후에 북조선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의 결과로 북조선 농촌으로 하여금 경제발전의 새 궤도에 들어서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주고 농촌 경리를 근본적으로 개조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북조선에는 공산주의가 실시된다고 하는 것은 반동적 지주와 결탁된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의 발악적 악선동에서 나온 잠꼬대로밖에는 간주할 수 없습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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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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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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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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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3.28. 금요일 동아일보



남쪽 차저 온 북조선동포

매일 평균 천5백명을 돌파




봄을 찾어 38선을 넘어 오는 우리 겨레의 피난동포들은 16개소의 검역소에서 검역? 구호를 실시하고 있는데 동두천 방면으로부터 매일 평균 9백여명 청단 방면으로부터 2백여명이 드러오고 있으며 그외의 산간협로를 거처 들어오는 동포도 만호므로 매일 평균 1천 5백명이 남조선으로 드러 오고 있는 형편이다.


검역소의 조사






1947.7.1. 화요일 동아일보



5월에 북쪽에서 온 동포

7만6천6백여명



보건후생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5월중 38선을 건너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 온 동포들에게 개성을 비롯한 6개 집결지 검역소에서 시행한 검역성적은 다음과 같다.


예방주사인수 35,389

소독인원수 38,786

보통병자수 1,968

전염병자수


합계 76,654








[ .....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 ....... ]



방한AP특파원 램버트, 조선 제반상황 보도


조선일보 1947년 10월 21일




[東京2
2021-01-05 2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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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 2021-01-05 20:25:41


[ .....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 ....... ]



방한AP특파원 램버트, 조선 제반상황 보도


조선일보 1947년 10월 21일




[東京20日發AP 合同]최근 서울을 방문하였던 AP특파원 램버트는 조선상황에 관하여 如左히 보도하였다.


“최근 조선 피난민 구제사업에 종사하는 남조선 미군정보국 及 남조선인으로부터 입수된 사실로 보면 조선에 피난민 이주상황은 과반 북조선을 시찰한 안나 루이제 스트롱 여사의 보도와는 전연 대조적인 것이며 즉 북조선에 이주하는 조선인은 전시 남방에 강제징용 갔던 북조선인이 아니면 북조선 공산당인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남하 조선인수는 극히 감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38線에 있는 소련경비대의 취체가 심해진 까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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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조선이 남조선보다도 큰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북조선인민이 총의로서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스탈린원사 及 金日成을 숭배하는데 일치하고 있다는 보도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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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9.24. 동아일보



철의 장막 38선답사


기자협회시찰대보고
김호진 본사특파원



북조선인민은 남조선정부수립을 기대

이박사 김구 씨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기자는 동수용소소장의 알선으로 수용소에서 월경상황과 북조선사정을 말하는 동포들의 좌담회를 열기로 하였다.



기자 어데서들 오셨소

김씨 여기 있는 사람들은 북조선 각지에서 왓습니다.


기자 어찌하여 남조선에 오시게 되었오.

윤씨 우선 식량의 배급도 주지 않고 월급이라야 1천5백원밖에 아니 주는데 그것으로는 콩가루도 못 사먹고 밀겨울도 못 사먹습니다. 그래 마른 창자를 견디다 못하야 최후의 결심을 하고 넘어 왔습니다. 또 추방을 당하여 오는 이도 있지요.


기자 남조선에도 식량사정이 대단이 곤난한데.

윤씨 압니다. 그러나 배가 곱하도 마음 편히 굶는 것과 불안속에 마음 조리며 굼는 것은 달으니깐요. 그래 굶어도 마음이나 편히 굴무려고 왓습니다.



이때 기자는 동포들 사이에 끼여 앉어 있는 중국인 두사람을 발견하여


기자 당신네들은 중국사람이지요.

진씨 네 그렀습니다. 사리원에서 왓읍니다.

기자 당신네들은 어찌하야 넘어 왓소.

진씨 몸도 앞우고 첫째 배급도 없고 밀가루를 사 먹을 수 없어 서울의 친구를 차저 가는 길입니다.

기자 당신네들도 38선을 숨어 넘어 오셨오.

진씨 그렀읍니다.


하고 기여 넘어 온 형용을 하여 보였다.



기자 당신네들이 본 북조선의 실정을 들리여 줄 수 없소.

진씨 나는 사리원에서 요리집을 하였는데 우리 중국사람들에게는 소련군이나 보안대원이 구찬케 굴지는 아니하였으나 조선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자 팔노군이 북조선에는 만히 있다는데.

진씨 평양과 해주에 만히 있는데 불호(不好)어요. 이북 중국인들은 전부 악감정을 가젓소.

기자 북조선의 정치는 당신네들이 볼 때 었떠합디까.

왕씨 무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조선사람들은 대부분 좋와하지는 아니합니다.


이상과 같이 말한 후 더 말하기를 실허 하였다.



기자 북조선동포는 남조선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오.

송씨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서길 바라고 있읍니다. 남조선의 보선(普選)이 실시된대서 북조선동포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자 당신네가 아시는 남조선의 지도자는 누구누구요.

박씨 이승만 김구 씨는 삼척동자라도 압니다.

기자 그외에는 정계인들은 모르시요.

박씨 김성수 장덕수 씨 등도 압니다.


기자 어떠케들 아시요.

사씨 너무 욕설 악선전을 하야 다들 머리에 젓다 십히 하였읍니다. 이분들의 욕설은 벽에다 뼁기로 써노았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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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



[ ......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 ........ ]



美軍政의 韓國政治指導者에 對한 政策硏究 (1945〜1948)

李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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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美國務省은 10월 9일, 점령군의 철수문제는 統韓 獨立政府樹立問題 解決의 필수적 부분으로 알고 있으며 소련제의에 대해 유엔총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回信하였다.139)


그리고 유엔의 미국대표는 10월 17일, 臨時委員團의 감시아래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人口比例로 대표를 선출하고 국회와 정부를 수립해서 이 정부로 하여금 防衛軍을 조직하게 한 다음 占領軍을 철수하게 한다는 決議案을 제출하였으며 총회는 11월 14일 이 안을 採擇하였다.140) 그동안 소련에 대한 美側의 宥和政策으로 인해 북한을 共產化하고 남한마저 赤化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에 守勢만을 지키던 미국은 이제야 유엔을 통한 外交로 信託統治가 아닌 民族自決主義 原則에 입각한 한국의 통일독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16萬의 赤軍을 투입하여 이미 共產政權을 수립해 놓고 있는 소련이 비록 유엔의 決議라 하여도 共產化를 막게 할 自由選擧를 북한에서 거부할것은 國際間 權力政治를 아는 사람이면 추측이 가능하였고, 그것은 통일을 갈망하는 한국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의 南北韓同時選擧를 통한 統一案이 발표되자 共產黨은 선거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소련과 국내의 共產勢力이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동안 信託統治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진영에서는 이 유엔의 결의를 크게 환영하였으나 韓國獨立黨을 중심으로 하는 各 政黨協議會는 美蘇兩軍의 철퇴를 요구하며 南北政黨의 대표회의를 구성하여 統一政府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141) 이와 같이 金九를 추종하는 韓國獨立黨系列에서는 계속해서 선거를 기피하며 共產黨의 주장과 같이 兩軍撤收와
南北韓政黨代表들의 卓上會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21일, 民族陣營 70개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共產黨의 대변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규탄하자 金九는 이 주장을 보류하게 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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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後 李承晚과 政治路線을 같이 하면서도 그의 追從者들과 獨自的 路線을 취하기도 하였던 金九는 유엔選擧案을 반대하는 주장이 규탄을 받게되자 12월 1일 대체로 유엔의 안을 찬성하면서 이승만의 선거를 통한 政府樹立案을 支持하는 談話를 발표하였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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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2.


[ ......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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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또는 미 과거의 업적이나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蘇측이 비판하는 바 많은 남조선미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주저치 않는 바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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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언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12월 28일



조선파견 UN위원 중국대표 劉馭萬(유어만) 환영회는 26일 하오 6시부터 국제외교연구소 주최로 天香園에서 성대히 열리었는데 석상 劉씨는 UN위원단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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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聯 ... 스티코프 ....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民主的인 政黨과 社會團體를 망라할 토대 위에서 수립 .... 소련에 대한 攻擊 基地가 되지 않을 민주적인 정부 .......


...... 共委에서의 미국측 전략은 단적으로 한국인에게 최대한의 언론·출판·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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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예비 회담의 합의에 따라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蘇聯의 立場은 소련측 수석 대표인 스티코프(T.F. Shtikov) 中將의 共委 開幕 演說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수립될 韓國 臨時政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民主的인 政黨과 社會團體를 망라할 토대 위에서 수립될 것이며, 이 정부는 장래 소련에 대한 攻擊 基地가 되지 않을 민주적인 정부, 이를테면 소련에 友好的인 政府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言明했다.53) 이것은 장차 소련이 反共과 反蘇的인 입장을 분명히 하는 남한 내의 右翼勢力의 한반도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意志 表明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미국측 역시 共委에 임하는 나름대로의 기본 전략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共委 開幕에 앞서 미국의 合同參謀部(Joint Chiefs of Staff: JCS)가 미국측 대표단에 하달한 다음과 같은 ‘언론·출판·여행의 자유에 관한 지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대표단으로 하여금 곧 개최될 공동위원회의 회기 벽두에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는 하아지 장군의 결정이 이 곳에서 승인되었다. 소련측이 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고, 오히려 同委員會를 休會시키려 할 경우 하아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1. 언론·출판 및 여행의 자유에 대하여 臨時政府가 기능 수행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종 결정을 본다는 것으로 將軍의 立場을 留保시킨다.

2. 한국의 민주주의적 政黨 및 社會團體와 협력하기 위하여 위원회의 위원들과 參謀陣이 한국 全域을 여행하기로 한 최초의 협정을 강조한다.

3. 그 후에 임시정부의 구성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킨다.54)



여기에서 드러난 共委에서의 미국측 전략은 단적으로 한국인에게 최대한의 언론·출판·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측은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며 例外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名分을 내세워, 만의 하나 反託 運動을 주도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단순히 反託을 주장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共委와의 협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울러 북한에 대한 開放 政策을 소련측에 요구함으로써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한 소비에트化 過程의 實狀을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측 역시 궁극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한반도 지배를 방지한다는 기본 노선 위에서, 共委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우익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는 자세로 共委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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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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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 .......

....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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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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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22 미군정청 귀속농지불하



[ ......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

......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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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選擧 이전에 小作農家 절반가량이 농지 불하받아



3월 22일자로 발족된 중앙토지행정처는 설립과 동시에 행정기구 개편과 농지매각에 관한 실무자 교육을 실시하여 4월 8일에는 토지분양개시식을 거행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군과 고양군의 100여 농가에 매호마다 450여평씩 15정보가량을 분양했다.19)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5,000호의 경작농가에 양도증서를 교부하고 등기절차를 끝냈다.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4월 1일부터 시작된 귀속농지 매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4월 13일 현재 양도수속이 완료된 건수는 토지행정처 서울지청 관할이 8,162건, 대구 관할이 8,343건, 부산은 937건, 그리고 이리는 무려 20만 5,775건에 이르렀다. 한편 신한공사 토지의 전 면적 가운데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전남북의 일부 지주는 귀속농지 불하에 대해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20)



이 조치에 좌익 정파들의 입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논평에 집약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이번 군정당국이 동척(東拓)의 후신인 신한공사 소유지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강점했던 전답을 방매 처분하게 된 것은, 첫째로 괴뢰적 반동 단정 조작을 위한 남조선 단선을 앞두고 농민의욕을 사서 득표를 노리자는 것이요, 둘째는 전농안(全農案)에 표시된 민주적 토지개혁을 요망하여 투쟁하고 있는 남조선인민의 투쟁의욕을 토지를 농민에게 준다는 허울 좋은 기만으로 거세하자는 것이요, 셋째는 반동적 기만적 토지개혁의 전례를 만들 음모로써 소위 ‘입법의원토지개혁안’과 같은 지주의 특권 옹호적 반동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봉건적 지주토지제도를 영구화하여 지주를 미제의 침략과 식민지화의 앞잡이로 충실화하여 괴뢰 단정의 물질적 토대를 튼튼히 닦자는 기만적 모략적 술책이다. …”21)


그러나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총선거 이틀 뒤인 5월 12일 현재 전 농가의 44.6%가 귀속농지를 분양받았고, 8월까지는 86%의 농지가 불하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이후에 실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하던 우파인사들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농지개혁의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등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고, 좌익 그룹은 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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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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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의 와해로 ‘토지개혁법안’이 유산되자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자로 歸屬農地賣却令 및 新韓公社解散令을 공포, 이 날짜로 商法體制였던 신한공사를 정부기구로서의 中央土地行政處로 재발족시켰다. 이러한 재발족에 앞서 이미 5일간(1948.3.16∼20)에 걸쳐 직원들에게 토지매각 요령을 특별히 교육시키어, 4월 8일부터 토지매각을 개시했다. 이와같이 미군정이 토지매각을 서두른 이면에는 철군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즉 군정당국은 5·10총선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 십만장의 항공삐라를 농촌 전역에 살포하고 또한 전국적으로 포스터를 부착했다. 그런데 “이 항공삐라와 포스터에는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그 토지를 시세에 합당한 가격으로 팔 것이며, 상세한 내용은 지방토지행정처나 마을의 農監들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반영은 대단했다. 여러 곳의 행정처 앞에는 설명을 듣기 위한 농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C.C. Mitchell, 1949, p.127). 이와 같이 군정당국은 5·10총선의 弘報物에 토지분양을 함께 선전했다. 말하자면 귀속농지가 미군정의 5·10총선에 선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5·10 총선까지 적어도 10만호에 토지를 분양할 목표였다. 이것이 어떤 목적이었는가는 다음의 G-2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귀속농지의 대부분은 신속히 판매될 전망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종래의 小作契約을 賣買契約으로 대체하면 되고 또한 1948년 첫번째 수확까지 상환이 유예되었기 때문이다(4월 9일자).

…중앙토지행정처는 土地分讓式을 거행하여 이 날로 5,000 농가에 경작농지의 양도증서를 교부했다.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열열하며…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실제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매각계획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4월 23
일자)

…4월 한 달에 10만 농가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16만 농가에 농지를 매각했다…이 계획을 불신시키려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은…소유권을 인수 하려는 농민들의 열망에 직면하여 명백히 실패했다. 또한 우익 지도자들의 초기저항도 점차 사라졌다(5월 7일자). (〈미군정정보보고서〉《자료집》6, pp.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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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2.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1월 25일



22일 UN에서는 蘇聯이 UN朝鮮委員團의 蘇占領下의 북조선 入境要求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美軍占領下에 있어서의 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蘇聯의 태도는 蘇聯外相代理 그로미코로부터 UN事務處長 트리그브 리 補佐 안드류 코이어에 대하여 전달된 1월22일부의 書翰中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 書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朝鮮蘇聯軍司令官 訪問의 희망을 표명한 朝鮮委員團 임시의장으로부터 서한 원문을 전달한 1948년 1월 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貴下에게 1947년의 제2차 UN定期總會 석상에서 UN朝鮮委員團 수립에 대하여 이미 소련정부에 의하여 표명된 부정적 태도를 想起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레이크썩세스 14일발 AP 合同]

(조선일보, 1948. 1. 25)







1948.3.


[ ......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


......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 ....... ]



38선 월남자수 급증



동아일보

1948년 03월 04일




3천만 민족이 갈망하던 조선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국제연합소총회에서 가결 결정되어 오는 5월9일 조선위원단 감시 밑에 그 실시를 보게 되었거니와 이 반가운 소식이 電波를 통하여 북조선 동포들에게 알려져 그 모진 억압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또 한편 성급한 겨레들은 보따리짐짝이나마 죽음의 고개 38선을 넘어 오고 있는데 요즈음 開城 議政府 春川 注文津 등 각처 수용소를 통하여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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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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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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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상전인 소련의 지령으로 선거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산당의 형식과 지배 이외에는 여하한 형식의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원하지 않는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은 선거를 행하면 자기의 국가를 공산주의의 일위성국가로 팔아 먹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효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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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대한 사실은 공산당과 밑走狗들의 선거에 대한 모든 선전 및 위반 또는 선거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온갖 수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내의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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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5.31. 제헌국회


[ ..... 이승만을 1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의장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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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5월 31일 국회 개원 축하행진이 온 시가를 누비는 가운데 오전 10시에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198명의 당선자 전원이 참석하여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을 맡은 이승만은 회의 진행에 앞서 종로 갑구 출신의 목사 이윤영(李允榮) 의원에게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이어 제1차 본회의에서는 국회법과 국회규칙이 제정될 때까지 사용할 ‘국회준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곧바로 의장단 선거에 들어가 이승만을 1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의장으로, 신익희와 한국민주당 김동원(金東元) 두 의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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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6. 초대대통령 가두여론조사



[ ....... △李承晩 1,024표 ....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 ]



동아일보 1948년 06월 27일

조선여론협회, 초대대통령 선출 가두여론조사



조선 여론협회에서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1천5백명의 여론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李承晩 1,024표, △金九 568표, △徐載弼 118표, △金奎植 89표, △朴憲永 62표, △金日成 33표, △許憲 30표, △李靑天 26표, △曺奉岩 18표, △申翼熙 12표, △이외 23명 45표, △무효 475표









1947.1.22. 소련



[ .....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 ]



[ ......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 ....... ]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동아일보 1947년 02월 18일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略)

1947년 1월 22일

북조선주둔소련사령부

교육관

니콜라이 쿠즈노프少佐



남조선노동당위원장

許憲 貴下



1) 세계 최대강국인 쏘비에트연방의 외상 인민위원동지 몰로토프와 英·佛·美 등 세계 4대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쏘비에트연방의 수도 莫斯科에서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莫斯科에서 개최되었던 삼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수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삼상결정을 남조선에 있어서 친일파 파씨스트 민족반역자의 두목 金九 李承晩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미군정이 격려 조장하고 있는 때문에 마침내 소미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입수된 신용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來 3월 10일부터 莫斯科에서 개최되는 4대강국 외상회의에서 조선을 해방하여 줄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성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재된 종합적 계획안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부의 학교에서는 □□□의 조직적 맹렬한 투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을 제1차로 國大案을 합법적으로 맹휴하여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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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1. 동아일보



[ .....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 .......


.....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 ]



[ ..... 중국 공산군은 ....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 ]




1948.10.29.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중공군 뒤에 소군 2

서백리아 철도는 원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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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는 23일동안 우리는 여관이 아닌 여관에서 즉 '크라스키노'에서 우리가 타고 온 ..철도침대차 속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쏘련에는 여관이 있기는 있어도 극히 수효가 적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보로씨로브'역을 가보면 많은 소련 사람이 떼를 지어서 마치 서울역 앞에서 사람들이 자듯이 역안 땅바닥에서 자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안에 있는 공동변소에 들어가 보면 세계일등국이 이러한 변소를 사용하는가 하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녀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이고 환기장치라고는 유리창 하나 없기 때문에 항상 가득 잠기어 있는 그 고약한 냄새에는 지금 생각하여도 골치가 또 아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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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문

'현재 중국 공산군은 대단히 불리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특히 연안이 함락(1947년 4월에 함락하였음)될 위험이 있는 데 어찌하여 쏘련은 원조하지 않고 있는가?'

답 우스면서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문 '그러면 소련군은 정복을 입고 원조해 주느냐?'

답 또 우스면서 ' 중국 사람같이 변장한다'


이로 보건대 지금도 역시 쏘련군인들은 중공군과 같이 변장하고 중국말을 사용하면서 중공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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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밤 아홉시편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 올났다. 기차는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것이였다. 하는 수 없이 중단과 상단에서 자게 되어 우리는 끈으로 자기 침대를 묶은 다음 그 끈의 한쪽을 모자 거는 못에다 매여 놓고서야 겨우 조끔 안심을 하고 잘 수가 있었다.(계속)







1948.10.31.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도처마다 걸인군 3


감시의 열차생활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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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될 무렵에 어느 조끄마한 역에 기차가 정거를 하였다. 이때였다. 쏘련 사람들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유, 마늘, 생선, 찐 감자 등을 들고 우- 하고 모여든다. 우리나라의 정거장 풍경을 상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때때로 거지들이 차속으로 들어와 애걸을 하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거지 이상이였다. 여기서 일행중 여교원 하나가 먹다 남은 빵 한개를 가지고 나갔더니 이것을 사려고 무려 백여명의 사람이 모여 들었다. 심지어 나종에는 기차안에 있던 손님들까지도 그것을 사려고 모여든다. 그리하여 빵 한개가 백50 루-부를에 팔렸다. 백오십 '루-부를'이라 하면 그 당시 이북돈으로 환산하여 육백원이다. 그때 육백원이면 이북서 대두 한말반의 쌀을 살 수 있었든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보드레도 쏘련의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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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다도 우리는 수백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역안 땅바닥에 누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발사하는 코를 찌르는 썩는 냄새와 같은 체취에 더욱 얼굴을 찌프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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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랄산맥 이산맥의 서쪽 구주 쪽에 '쓰벨노블스크'라는 큰 공업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북조선서 보낸 유학생이 약이십명 가량 공부하고 있다. 기차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일행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을 알고 유학생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붓잡고 이구동성으로 '여기에는 쏘련 각처에서 모여 든 많은 유학생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조선 유학생이 가장 성적이 우수합니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하여도 제일 배고픈 데에는 못견디겟읍니다. 지금 우리들 중 약 이할이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읍니다. 이 학생들은 멀지 안어 조선으로 호송당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밖에도 곤난한 점이 많겠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우리 일행은 가지고 있던 우리 식량중에서 시큼하고도 씁쓸한 검은 빵을 나누어 주었더니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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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

.....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 ]



1948.11.4.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이북의 소련방화 6

일부 한인유학생이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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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나라 쏘련!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오락실이니 도서관이니 침실이니 하는 것도 그야말로 선전에 불과한 형식뿐이었다.


기술노동자를 양성하는 직업학교에도 수개소나 가 보았으나 설비도 한심하고 사용하는 기계도 영국제나 독일제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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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공장 등의 규율은 순전히 군대식이었고 주력을 군수공장에 두고 있었다.

4월 21,2일 경의 일이다. ..... 그날 북조선에서 간 쏘련유학생 약삼백명의 대표자가 '까잔'에서 우리 일행을 만나 보러 차저왔엇다.

그는 '까잔'종합대학 법과학생이며 해방전까지 감옥생활을 8년동안이나 한 30세 청년이였다.쏘련유학을 가기전까지는 북조선민정 간부였었고 김일성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중의 하나이었다. 이청년이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북부 여관에 와서 현재 평양 제이 여자중학교 교장인 조여사와 이야기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강조하였다.


" 물론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무엇인지 아시요. 동무들은 실익양성이니 문화향상이니 산업개발이니 하지만 .... 물논 이것도 큰 과업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중하고도 큰 과업은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모-든 것을 깨다를 수 있었다.

쏘련의 정책과 현재 북조선의 근본 정책은 이 한마듸로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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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논 '모스크바'에는 공창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내 각처에 있는 '바자루'(서울 야시장과 같으나 그 보다도 더 급이 낮은 시장)에는 사창이 무수히 있는 것이다.(계속)









1949. 5.



[ .......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 ]




[ ...... 유권자 총수의 9할 3푼까지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투표 ........

...... 파괴분자들의 박해와 위협이 극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


[ ..... 韓獨黨 ..... 우익이 다수를 점령할 것 ........ ]



5·10선거 1주년에 즈음한 각계의 여론 동향



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 침투 확대되고 있는 침략적 공산주의의 확대 번식의 방지를 제창하는 세계 민주주의 정치세력의 여론은 서구를 중심한 북대서양동맹과 동 성질의 극동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태평양 인접 민주주의 제국 간의 공동정치목표를 위한 방위동맹 체결 촉구의 소리가 높은데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반을 이룬 5·10 총선거 1주년을 맞이하고 9일 국내 중요 정당·사회단체에서는 현하 당면한 정치문제에 언급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國民會



1. 38선은 미소의 책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또 북한에서 蘇軍의 침략공세와 그들의 지령으로 남벌을 計策하는 공산군이 준동하는 한 韓美나 태평양의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 후 철퇴함이 당연하다. 우리는 금번 개성전투 지휘자가 소군임을 지적한다.


2. 한국은 국련 결의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되었고 또 승인받은 당당한 국가이다. 따라 국련가입은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거부권 행사는 실로 부당한 처사로서 이는 그들의 약소국가 침략정책의 表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소련의 반성과 한국가입 거부를 취소하기를 희구하는 동시 다수 국가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민주주의적 안보거부권 조항을 세계 公論에 의하여 삭제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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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년 총선거 대비, 남북통일의 구현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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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1. 명년에는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될 것으로 보는가

2.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3. 만일 명년에 통일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월남동포의 특별선거제 문제가 재대두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여기 대한 견해 여하



朝民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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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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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獨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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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익이 다수를 점령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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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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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진영이 절대 우세를 점령할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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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勞農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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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右二·左一쯤으로 낙착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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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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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생각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성취된다면 좌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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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선거 1주년 기념사



5·10선거 1주년의 역사적 기념일에 際하여 李始榮 부통령을 위시한 정부 수뇌층과 재한 외국명사의 의의심장한 기념사의 요지는 각각 다음과 같다.



△이북의 참가요망, 부통령 李始榮:


어느덧 역사적 5·10선거의 1주년을 맞이하였다. 회고하면 기쁨과 걱정이 많다. 어느 나라와 어느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방침을 고려하여 5·10선거를 절대 배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대의명분이 있는 우리 동포들은 국제적 公然한 자유선거로 제헌과 정부수립에 일로 매진하여 蘇국가를 除하고 세계적 48개국의 일치승인을 얻어 우리 대한민국이 국제단위의 일원으로서 통일 방면에 적극 추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2주년 기념식에는 남북이 합석하여 이 기념식이 있어야 할 것을 빌어 마지않는 바이다.



△민국기초 확립, 국회사무총장 談:


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와 국내 민주진영의 열렬한 추진으로 거행된 작년에 5·10선거야말로 세기적 대성사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2천만의 애국열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로써 성립된 국회는 그동안 민의를 대표하여 헌법, 농지개혁법적 중요법안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는 점차 확립되어 가고 있다. 불원 북한에도 총선거를 행하여 현재 100명의 공석을 채우고 평화와 통일이 실현될 것이다.



△민주승리를 확신, 국회의장 申翼熙:


5·10선거 당시를 회고하건대 소위 남북협상이니 지명추천이니 하여 여러 가지 비민주적인 말썽이 많았으나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유권자 총수의 9할 3푼까지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투표하였다. 이것은 민주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요, 더욱이 파괴분자들의 박해와 위협이 극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전무후무의 격으로 질서정연하게 투표를 감행하였다는 것을 무능력·무조직하다고 비평하던 외국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결국 민주주의의 正經大道는 반드시 통한다는 위대한 교훈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토를 통일하여 북한 1천만의 대표 100명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수를 보충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진영 즉 민족진영이 총단결로써만 실현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진리가 점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經原的 대원칙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요, 우리의 올바른 주장은 반드시 관철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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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 .....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 벌써 통일 .......

......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 ]



[...... 평양의 거리를 스탈린街라 개칭하고 말할 때마다 ‘英邁하신 스탈린 대원수께서’ ......... ]



民主國民黨,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


1949년 10월 15일

서울신문,동아일보 1949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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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조국 화평통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이 잠깐 듣기에는 귀에 달콤하나 그 뒤에는 실로 전율할 모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조국이라 외치면서 조국을 부인하고 화평통일을 부르짖으면서 화평통일을 거부한 자는 곧 조국 화평통일을 떠드는 그 자들인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박수)



평양의 거리를 스탈린街라 개칭하고 말할 때마다 ‘英邁하신 스탈린 대원수께서’하며 ‘위대한 소련군대’가 하면서도 言必稱 조국이니 민족이니 합니다.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 전세계가 환호하는 가운데 화기애애하게 통일이란 말조차 필요 없이 벌써 통일이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선전포고를 한 전쟁에도 적의 비전투원은 죽이지 않으며 무방비 도시는 폭격을 않는 것이 전쟁도덕이요, 국제공약이거늘 이 반역도배들은 전쟁에서도 할 수 없고 인간이 할 수 없고 금수도 할 수 없는 잔인악독한 행동을 동족에게 동포에게 날마다 밤마다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이 화평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다 무엇이며 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그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화평통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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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9. 소련



[ ......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 ]



소련 정부가 1949. 9. 24일 자로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훈령: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하는 현 시점의 임무는,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반동 정권을 쫓아내 한국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전반적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둘째로, 인민군을 모든 면에서 좀더 강화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 할 것이 요구된다.”






1947.1.22. 소련



[ .....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 ]



[ ......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 ....... ]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동아일보 1947년 02월 18일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略)

1947년 1월 22일

북조선주둔소련사령부

교육관

니콜라이 쿠즈노프少佐



남조선노동당위원장

許憲 貴下



1) 세계 최대강국인 쏘비에트연방의 외상 인민위원동지 몰로토프와 英·佛·美 등 세계 4대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쏘비에트연방의 수도 莫斯科에서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莫斯科에서 개최되었던 삼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수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삼상결정을 남조선에 있어서 친일파 파씨스트 민족반역자의 두목 金九 李承晩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미군정이 격려 조장하고 있는 때문에 마침내 소미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입수된 신용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來 3월 10일부터 莫斯科에서 개최되는 4대강국 외상회의에서 조선을 해방하여 줄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성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재된 종합적 계획안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부의 학교에서는 □□□의 조직적 맹렬한 투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을 제1차로 國大案을 합법적으로 맹휴하여야 됩니다.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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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18. 평양



[ .......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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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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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6. 함경남도 북청



[ .....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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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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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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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



가작 <인생의 갈림길에서 경주로 향하다>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



<해방 직후 고향 마을에 소련군이 들오던 날, 방학 중의 나는 귀향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여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오빠, 빨리 일어나. ‘마우재’가 오고 있대. 빨리 큰길로 나가봐.”

마우재는 소련군인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로서, 그 어원은 “말이나 소같이 미욱하다”는 뜻의 馬牛者(마우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說(설)이 있다.


큰길로 나갔더니 소련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시계를 찬 내 왼 팔목을 붙잡았다. 그 자가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런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 그 자는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시계를 찬 내 팔목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고 자기 손목에 나의 시계를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소련군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1950년에 들어서자 내가 보기에도 남침전쟁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함흥에도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로 접어들자 모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어 함흥의 주둔지엔 1개 소대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바로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그 결의문은 “인민군에 지원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정치보위부 요원은 강의실 앞뒷문을 막고 입대지원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인민학교의 교사를 징발해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30∼40대의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학생복을 입고 장교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장정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 지 1주일 되던 날, 평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친구 범은이가 나에게 탈영을 제의했다.>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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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3881&C_CC=AZ

광복 70주년 현대사 체험수기 심사 後記








[ .......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상의껏 경제재건을 위하야 노력하야 주십시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 ......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 ]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




...................................................................................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

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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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 미군 비행기가 서울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히려 기다린다. ........


....... 군경 가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 ........ ]



[ ..... 폭탄이 떨어지는데 한 여인이 지붕 위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었다 ........ ]



[ ...... 인공국을 겪어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 ....... ]




[양상훈 칼럼]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2019.06.27



남침 사흘만에 서울 거리엔 붉은 기 흔들며 만세 소리… 하지만 국내 좌익들 먼저 사라져

곧 인공국에 질린 시민들 피해 입으며 미군 폭격 기다려
귀환 정부 국군이 실망시켜도 입대 청년들의 눈동자가 희망




'1950년 6월 28일. 밤새 비는 끊이었다 이었다 하였으나 대포 소리는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였다. … 날이 샐 무렵 전투는 더 치열해지는 듯 대포와 총소리가 콩 볶듯 한다. 가끔 멀지 않은 곳에서 배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벌써 시가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한 분이 보내준 책을 손에 잡지 못하다 6월 들어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 다 읽었다. 6·25 당시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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