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現物로 더 걷어가는 實情에 있으니 結局 農民들은 ..[2]
 닉네임 : 토지개혁  2020-10-14 21:43:29   조회: 58   
1951.1.



[ ......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

.....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 .......

.....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

.....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 ]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민주신보 1951년 01월 15일




기원전 게르만 민족의 유럽대이동도 이랬을까? 세계제2차대전 시 일본침략군을 피해 양자강 줄기를 타서 북상으로 죽음의 이동을 한 세기의 비극이라고 일컬어졌던 중국민족의 수난도 비할 바 아니다. 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두 번 다시 그네들에 속지 않으리라. 여기에 공산치하의 암흑세계에서 그 모진 질곡과 □□으로부터 벗어나와 광명의 천지로 돌아온 몇 사람들의 입을 빌려 민족 앞에 공개하는 그 몸서리나는 생지옥의 양상을 들어보면서 삼천만의 이름으로 아니 세계 자유애호 인류 20억의 이름으로 공정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고향에 둔 어린 것들이 불쌍합니다.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남하한 피난민은 다 나와 같이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평양 거주자 宋榮煥씨).



▹언론을 총탄압, 문화인 李씨:나는 6·25사변 이후 3개월 동안 북한 괴뢰군이 서울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을 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서 없이 그들의 문화정책의 면모를 본대로 말하련다. 첫째 그들의 언론정책을 보라.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 그들의 신문을 보면 그야말로 정부나 당국에 아부만을 일삼고 있는 어용신문이 아니면 관보나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신문기사 검열 같은 것도 일일이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니 과연 이래도 언론자유며 민주정책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하는 선전은 모두 아름답고 기막힌다.


그러나 현실을 떠난 그 선전인 까닭에 민중들은 처음엔 속지만 나중에는 그 기만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기만성이란 더욱 심하다. 물론 우리는 무질서한 것을 자유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보냈다. 여기에 이제 무슨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겠는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갈 길만을 가려고 단연 남하하였다(서울 거주문화인 李永哲씨)



▹교육은 암담, 교육가 金씨:내가 월남하게 된 동기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을 나 한 개인의 행동으로 옮겼을 따름입니다.

5년간 우리가 북한 교육계에서 맛본 鐵帳 내의 교육제도는 세계역사에도 드문 암담한 것이었고,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제도였습니다. 그들의 교육정책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보다 앞서 월남하여 국군진영에서 싸우고 있거나 전사 혹은 戰傷한 나의 후진 제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길에서 잘 표현되고 있을 것입니다(원산거주 교육가 金素仁씨).



▹내분이 다반사, 관리 崔씨:북한 괴뢰정권의 소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번 남하하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외무국장이었던 李康國이가 많은 인테리겐챠와 함께 도태 당하고, 소위 그들의 성분개조운동으로 내분이 자자하던 시기를 回感하면 진저리가 나고 치가 떨립니다. 소위 남북연석회의 당시에 그들은 많은 관리들을 여관 보이로 변장시켜 정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기만과 학살정책으로 인하여 괴뢰정권 내부의 모든 관리들은 상호견제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친소파가 아닌 분자는 기어이 숙청 당하고야 마는 형편입니다.


독신관리들의 합숙소에는 반드시 정치보위부의 스파이가 개입하여 각자의 일언일동을 감시하고 있습니다(관리, 전 평양외무성 西歐部 근무 崔成極).



▹지긋지긋하오, 부녀 吳某씨:지금 생각하여도 지긋지긋한 90일 공산치하의 서울의 생활……. 겨우 걸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도 괴뢰군이라면 지금도 “엄마”하고 품안에 뛰어오며 울음소리를 그치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 같은 강제노동에 수수국, 캬배쓰국 한 그릇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남편은 반역분자라고 이곳 저곳을 피해 다니고 어린 자식 6명을 데리고 살자니 배급하나 없고, 또한 돈 한 푼 없는데 매일 야밤에 남편을 내놓으라는 놈들의 공갈협박에 1일이 천추 같았다. 저녁마다 애국자를 총살하는 총성, 수많은 괴뢰군의 강도·절도로 하루 한시간의 수면조차 어려웠다(서울 거주, 吳某씨).



▹공산주의 강요, 학생 康군:배우는 학도로써 진리의 탐구란 생명이요, 또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북 공산치하의 교육정치란 진리의 탐구는커녕 그 정열조차 가지지 못하는 불행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곳의 교육제도는 4년제의 인민학교로부터 위로 초급중학(3년), 고급중학(3년), 각종의 전문학교(4년), 그리고 대학교(4년)가 있으며 이에 공산운동의 간부양성기관인 당학교가 있는데 전부 맑스·레닌주의 강제수업이 그 교육의 근본중심이 되어 있다(평양 음악학교 생도 康斗柱).



▹거래세로 파탄, 상인 朴씨:북한에서는 상업을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만 상행위를 할 수 있다. 每 등록된 상인들은 매월 20일까지 거래세라는 것을 바쳐야 되고, 其 외에 공채 할당이라던지, 대소 행사비 조달은 전부 상인들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세금, 부담금 등으로 상인들은 허리를 펴볼 여유라고 없고 1년 가야 넥타이 한 번 매볼 수 없는 형편이다. 상거래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도저히 남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행위의 자유성은 없다. 상업규모에는 별 제한이 없으나, 대규모로 하면 할 수록 손해를 입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하면 그 만큼 모든 부담금도 증가하므로 100만 원의 자본을 가진 상인이나, 10만 원을 가진 상인이나 자기 소득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함북 길주읍 거주).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 상시 감시.....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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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을 취□하는 외에 공산주의 정권은 농민들에게 지방건설 내지 광산작업을 무보수로 강요하였으며 매 호구는 1 내지 2개월 간 자진노동을 제공하였고 18~55세의 전 농민에는 1년에 1회씩 20일간의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1) 북한 농민들은 항상 관공서 숫자와는 반대로 전농생산량은 일제시의 수준에도 미급하였으며 정부발표에는 멀리 미달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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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용정



[ ...... 밤 12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저녁 7시까지 밭에서 일을 ........

...... 총수확을 국가, 집체, 개인이 각각 3분의 1씩 나누다 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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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있습니다." 이는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 촌민들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우러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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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70년대 정치운동과 배고픔의 련속



60-70년대 룡산촌에서 서기사업을 하였던 김석구 로인은 "당시 룡산촌, 영성촌, 평안촌, 해란촌은 선진대대로 소문났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농민들이 마음대로 닭을 치지 못하고 소나 돼지를 기르게 못했으며 담배도 100포기이상 심지 못하도록 제한하여 농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저 룡산촌에서 철물가공공장을 건설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고 촌민들도 철물가공공장이 촌민들의 배를 불룩하게 만들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로선을 걸으려 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촌민들의 창업열에 찬물을 끼얹었다. "면서 당시를 회억했다.



김석구 농민은 "그래도 당시 농민들은 로동에 대한 열정은 매우 높았다"고했다. "밤 12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저녁 7시까지 밭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당과 조직에서 지시한 일은 목숨을 걸고 완성하였다. 그러나 식구가 많고 농사수입은 일년에 일인당 1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 살기가 정말 어려웠다"고했다.



당시 김석구서기와 함께 사업했던 김일천할아버지는 "개혁개방전에는 농촌에서 호조조생활을 했는데 1년 총수확을 국가, 집체, 개인이 각각 3분의 1씩 나누다 보니 농민들은 먹고살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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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중국 경제는 매우 곤궁했다. 배고픔과 분리된 유년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먹는 걸 주 소재로 다룬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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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 좋은 것은 하나도 없지. 일나오라, 이리가라, 저리가라, 회의 많고 비판도 많고 쌀도 배급으로 주는 지긋지긋한 게 무엇이 좋겠나. 한마디로 수용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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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에 들어서니 보고, 듣는 것 모두가 놀랄 정도로 새 세상이었습니다. 조선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중국의 현실과 생활을 체험하게 되면서 우리가 김정일에게 너무도 속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 마을엔 어디를 가나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교회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교회의 집사인 김아바이는 우리들을 자기 집에서 며칠 동안이나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때 김 집사의 집 마당에는 볏단이 하늘높이 쌓여 있었고 강냉이도 마대자루에 담겨 있었습니다. 또 탈곡하지 않은 곡식도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새 자전거도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채 마당에 그냥 내놓고 있었습니다.


“낟알을 이렇게 마당에 방치하면 도적이 훔쳐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집사는 “어느 집이나 다 이만큼씩은 있소. 도적질해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 수매시켜야겠는데 창고가 찼다고 해서 걱정이야. 중국이 개혁개방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도급으로 가족단위로 나누어주니까 이렇게 낟알이 쌓여서 처치곤난이야. 빨리 팔아야겠는데...”



저는 또 물었습니다. “지금의 개인농사가 무엇이 좋고 집단농사는 무엇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김아바이는 “중국에서는 집단농장을 인민공사라고 하는데 좋은 것은 하나도 없지. 일나오라, 이리가라, 저리가라, 회의 많고 비판도 많고 쌀도 배급으로 주는 지긋지긋한 게 무엇이 좋겠나. 한마디로 수용소이고 감옥이지.


개인농사가 좋은 점은 노력한 것만큼 또 땀 흘린 것만큼 대가와 보상이 차례지니 좋고 제가 알아서 일하고 또 쉬는 자유가 있어 좋고 자기의 땅, 소, 자기의 낟알이 있으니 든든하거든. 한해 농사로 4~5년은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걱정이라면 낟알이 팔리지 않는 거지. 이 낟알을 빨리 팔아야겠는데 나도 조선에 친척이 있는데 그들이 와서 가져가라는데 오기가 너무 힘든 모양이야.”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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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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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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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 ......

......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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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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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에 150% 상환' .....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

..... 농지세 .... 세율이 7%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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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초나 조선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 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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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학위 논문으로 “농지개혁 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 충남 서산군 근흥면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썼다. 70년대 당시 학계에서 박현채 선생 등은 농지개혁이 실패했다고 했는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살펴본 농촌 현지에서는 지주계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기존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충남 벽지 농촌에서 농지개혁 당시 농지매매경험이 있는 촌로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논문자료를 수집했고, 농지개혁에 대한 기존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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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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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식 농지개혁 ....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

.....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8)



8.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차별 없는 시대’ 실현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관리자



지주-소작관계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뿌리내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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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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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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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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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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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동안 지주들에게 갖다 바쳤던 소작료의 상당 부분이 농민 자신의 것이 되자 농민들은 늘어난 소득을 자녀교육에 집중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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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반공주의자들이 된 농민들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지방의 이승만 지지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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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4 21: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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