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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간첩 괴뢰 민족반역 김일성
 닉네임 : 괴뢰  2020-10-09 23:00:18   조회: 65   
1945.10.


[ ....... '소련' 공산당원 생활을 계속 .......


..... 10월 10일에도 그들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그 지령을 충실히 집행 ......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의 당수가 되고 그 일파는 북조선공산당의 당간부가 .......


...... 3중당경력자 ...... 2중당적을 가지고 2중당생활을 계속 .......


..... 당세포원으로서 '소련공산당' 현지당조직의 각종 당회의에도 참석하고 북조선공산당회의에도 참석 ....... 장군복을 입은 상급당간부들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조선공산당측의 당회의에서는 최고간부로서 '볼세비키' 당회의의 결정 또는 그 지령을 내려먹이는 것 ....... ]




1962.6.15. 동아일보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38



한재덕




10월 10일 소련군사령부의 알선하에 그러나 비밀집회마냥 남몰래 열린 공산간부들의 회합에서 김일성이 괴뢰괴수로 뽑힌것은 선거가 아니라 소련 상전에 의한 조직적 '임명'이었다. 다른 김일성 일파의 간부 취임도 그러하였다. 사실 이때에 있어서는 김일성 일파를 국내파와 대비해본다면 수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실력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 대회에 나타난 김일성 일파의 최고 간부라는 것이 김책 안길 김일 최현 임춘추 등이었는데 그실 그들은 이론은 별문제로 하고 '말' 자체도 변변치 못한자들로서 모두 한데 묶어도 오기섭 하나를 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 장군복을 입은 '볼세비키'들이 그들을 밀었다. 이것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김일성 일파가 당의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조작된 '북조선 공산당'이란 '김일성당'인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소련 볼세비키' 공산당의 '북조선지부' (지구당)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이때 북한공산당의 실권을 쥔 김일성과 그 일파는 아직도 명실 공히 '소련' 공산당원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김일성 일파는 앞서도 간단히 지적한 바 있었지만 '소련'에 들어가 특수훈련을 받을 때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 당생활을 하다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북한에 들어와서 역시 '소련' 공산당원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10월 10일에도 그들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그 지령을 충실히 집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의 당수가 되고 그 일파는 북조선공산당의 당간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 시작하여 '소련' 공산당원을 거쳐 조선공산당원이 된 3중당경력자이다. 이것은 국제공산진영에서도 드문 일이다. 오늘 중소간에서 갈팡질팡하는 김일성의 태도는 이 당력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해서 김일성 일파는 이떄로부터 2중당적을 가지고 2중당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조직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요, 당적 협잡이었다. 그런데 더욱 엄중한 사실은 그들은 그 이후에 있어서도 상당한 시일을 두고 이 2중당생활을 계속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주둔군대내 당세포원으로서 '소련공산당' 현지당조직의 각종 당회의에도 참석하고 북조선공산당회의에도 참석하였다. 물론 전자의 '소련공산당' 측의 당회의에서는 하급간부로서 장군복을 입은 상급당간부들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조선공산당측의 당회의에서는 최고간부로서 '볼세비키' 당회의의 결정 또는 그 지령을 내려먹이는 것이었다. 이 경우 김일성 일당은 '소련공산당'의 '프락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북조선지구당'에 파견된 당본부간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소련공산당'의 의사와 지령은 김일성 일당을 통하여 이렇게 수행되었고 관철되었다. 이것은 '괴뢰'라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것이었다.


당적 문제뿐 아니라 국적 문제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들은 2중당적자인 동시에 2중국적자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대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1948년부터 근3년간 북한 '중앙통신사'에서 '보도부장'으로서 또는 '주필'로서 일을 보았는데 이때 사장이 이문일이라는 아주 인색한 '소련' 2세였다. 그는 '조선노동당' 당증도 가지고 당비도 매달 납입하면서 번번이 '당비도 두몫을 내려니까 헐치 않은데....' 하고 투덜대기도 하고 재기도 하는 꼴을 나는 직접 몇번이나 본 일이 있다.


그런데 훨씬 후인 1957년 12월 16에 이르러 '조소 양국간의 2중국적자의 공민권조절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다 하여 ' 이 협약은 조선과 소련의 공민권을 가지고 있는 2중국적자에게 '조소' 쌍방중 1방의 공민권을 자원적으로 부여하였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이것은 김일성을 비롯하여 '소련'서 나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때까지 그실 '소련' 공민이었다는 것을 더욱 뚜렷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며 이때에 있어서도 원한다면 '소련' 사람으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2중당적문제에 대하여는 언제 어떻게 타협이 되었는지조차 발표된일이 없다. 물론 발표할 성질의 것도 못 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중한 사실이다. 실로 김일성은 '소련공산당원'이면서 북조선공산당 당수가 되었으며 '소련' 공민이면서 북괴 '수상'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국제적 협잡이 어디 있을 것이며 민족적 반역이 어디 있을 것인가?









북한 초대내각은 스탈린과 소련군이 짠 것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할 때 트루먼한테 보고하고 했나?




金學俊 (前 동아일보 회장)




< 북한에서 처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相과 副相, 즉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잖습니까? 그 임명하는 과정도 소련 문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평양에 있는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명단을 만들었어요. 相, 副相 다 만들어서 김일성이를 불러서 맞춰봅니다. 이렇게 하자, 그래도 김일성이 한 두 사람 더 추천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모스크바에 보고해요. 그것을 스탈린이 봅니다. 봐서, 그래? 이렇게 했어? 아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래서 발표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 초대 내각을 구성해서 발표할 때, 트루만이 그 명단을 봤다든가, 美 국무장관이 봤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國內에서 일부 세력은 “대한민국은 무슨 美帝가 만들어 낸 나라고 자주성이 없는 나라인데, 북한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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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내각 독립운동가


*대통령-이승만(李承晩,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이시영(李始榮, 임정내무총장)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국회의장-신익희(申翼熙, 임정내무총장)
*대법원장-김병로(金炳魯, 항일변호사)
*무임소장관-이윤영(李允榮, 국내항일)
*무임소 장관-이청천(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장택상(張澤相, 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尹致映, 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이 인(李 仁, 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재무장관-김도연(金度演, 2.8독립사건)
*상공장관-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안호상(安浩相, 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錢鎭漢, 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尹錫龜, 국내항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민희식(閔熙植, 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기획처장-이순탁(국내항일)
*공보처장-김동성(국내항일)



▲북한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


*김영주-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강양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시대 도의원)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북한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북한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김달삼-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시대 소위)
*박팔양-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시대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시대 검찰총장)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시대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시대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월북 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시대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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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상식/李承晩 정부는 독립투사 정부, 金日成 정부는 非命橫死 정부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反共反日을 國是로 삼다시피한 李承晩 대통령이 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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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19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9415&C_CC=AC









[ ......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 .......


......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 ....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⑤ 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 동아일보 2004-09-13 ]



《 9일은 북한정권 수립 56주년. 관영 러시아방송은 8일 특집방송에서 남북분단과 6·25전쟁에 대한 오래된 논란을 정리하는 결정적 비화 하나를 전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했고, 김일성이 반대하는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감행했다는 것이다(본보 10일자 A2면 보도).


광복 후 49년 동안이나 북한을 지배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한 김일성은 누구인가. 해방공간에서 우익은 ‘스탈린이 키워낸 소련점령군의 앞잡이’로 보았으나, 좌익은 ‘항일빨치산을 이끌어 온 민족적 영웅’으로 치켜세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료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쫓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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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에서 소련군에 구금된 김일성



1939년부터 일제 관동군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자 김일성은 이듬해 10월 부하 5명을 데리고 연해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부하였던 김정숙과 결혼했다. 연해주에 함께 간 이을설 전문섭 강위룡 이두익 등은 나중에 북한 군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소련 극동군은 김일성 일행을 구금했다. 코민테른의 허가 없이 소련에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운 좋게 풀려났다.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상관이자 코민테른 허가를 받고 먼저 소련에 들어온 저우바오중(周保中)이 신원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소련 극동군은 그들을 산하의 88국제여단에 편입시키고, 김일성을 1대대장으로 임명했다.


88국제여단은 정규경찰과 비밀경찰 및 국경수비대를 관할하던 내무인민위원부 산하여서 악명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 장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부여받았던 대위 계급은 군이 아니라 경찰계급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실제로 내무인민위원부는 군을 관할하던 인민무력위원부와 똑같은 계급과 계급장을 썼다.



● 러시아에 남아 있는 ‘김일성 심사기록’



이 무렵 소련은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맺어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소련군 산하 빨치산들의 항일투쟁엔 제동이 걸렸다. 김일성 일행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소일한 시기였다.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한 1945년 4월 이후에야 상황이 바뀌었다.

조선인 전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도 그들에게 참전을 명하지 않고 계속 연해주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따라서 부하들을 이끌고 대일전에 참전해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련이 김일성을 찾은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뒤였다. 그해 8월 하순과 9월 초순 사이에 스탈린이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소련 극동군이 김일성 심사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국방부에는 지금도 그 심사기록이 남아 있다.



● 스탈린, 비공개리에 직접 김일성 면접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오.”


심사기록에 나와 있는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록이다.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했다. 추천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이라는 평가가 붙어 있다.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의 번견(番犬)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투옥과 고문에 앞장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된 베리야는 이후에도 줄곧 김일성의 옹호자가 된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리야의 보고서를 읽은 직후 김일성을 비공개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을 했다. 이에 김일성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예, 예”를 연발하자 스탈린은 흡족해했다는 것이다.



● 김일성은 결코 개선한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88국제여단 1대대 부하들과 함께 소련 군함인 푸가초프호를 타고 추석 전날 귀국했다. 소련 극동군 산하 제25군이 평양에 주둔군 사령부를 개설한 1945년 8월 26일로부터 24일이 지난 9월 19일 원산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을 떠난 지 20년 8개월 만이었다.


김일성이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 그는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개선이 아니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스탈린의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돌아온 것일 뿐이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40912/8105836/1







1945.8.24. 저우바오중



[ ......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


......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 ]




" 소련이 김일성 키운 건 1942년부터 "




유석재 기자

2008.07.01



김국후씨 군사 보고서 공개


김일성이 광복 3년 전부터 소련군에 의해 체계적인 정치·군사지도자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낸 김국후(金局厚·62)씨는 최근 출간된 연구서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아카데미)을 통해 당시의 중요 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한 상황이었던 1945년 8월 24일, 소련 제2 극동전선군 제88 정찰여단장인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 대좌는 소련 극동군 바실레프스키 총사령관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다.


"제게 위임된

" 소련이 김일성 키운 건 1942년부터 "




유석재 기자

2008.07.01



김국후씨 군사 보고서 공개


김일성이 광복 3년 전부터 소련군에 의해 체계적인 정치·군사지도자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낸 김국후(金局厚·62)씨는 최근 출간된 연구서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아카데미)을 통해 당시의 중요 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한 상황이었던 1945년 8월 24일, 소련 제2 극동전선군 제88 정찰여단장인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 대좌는 소련 극동군 바실레프스키 총사령관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다.


"제게 위임된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중국 동지들 대부분은 …만주에서 일본 강점자들에 맞서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입니다.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소련 국방성 중앙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한 이 비밀문서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제88 정찰여단이야말로 김일성(金日成)이 일제 말기 3년 동안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 전 교수는 평양주둔 소련군정 고위정치장교와 구 소련 망명 북한 군·정 고위인사와의 인터뷰, 소련 국방성,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비밀문서 등을 분석했다.



저우바오중이 지목한 '중국 동지'들 중에는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김일성 부대 80여 명도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이 이미 1942년부터 극동 지역에서 위성 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사·정치 지도자를 양성했던 것이며, 김일성은 이미 이때부터 소련에 의해 지도자로 키워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보고서는 또 "대일(對日) 전투작전이 개시된 지 4일 후 여단의 작전 계획이 전면 취소됐고 현재까지 여단을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제88 정찰여단이 소련군의 대일전에서 총 한 방 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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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30/2008063001742.html








[ ...... Stalin .... asked Lavrenty Beria to recommend possible candidates.

Beria met Kim several times before recommending him to Stalin. ........ ]



Kim Il-sung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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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lin realized he needed someone to head a puppet regime. He asked Lavrenty Beria to recommend possible candidates. Beria met Kim several times before recommending him to Stalin. It is widely believed that Kim was selected over several more qualified candidates because he had no ties to the native Communist movement.[11]


Kim arrived in North Korea on 22 August after 26 years in exile. According to Leonid Vassin, an officer with the Soviet MVD, Kim was essentially "created from zero." For one, his Korean was marginal at best; he'd only had eight years of formal education, all of it in Chinese. He needed considerable coaching to read a speech the MVD prepared for him at a Communist Party congress three days after he arrived. They also systematically destroyed most of the true leaders of the resistance who ended up north of the 38th parallel.[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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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원동방면 책임자인 솔로킨 소장의 비밀정보원이자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원동방면군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과 솔로킨 소장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조선의 수령감으로 지목 ...... ]


[ ..... 모스크바에 두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 ...... ]



1990.4.22. 동아일보



비화 김일성과 북한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수기

<1> 김은 소 KGB 정보원이었다.



동아일보 1990.4.22.





비화 김일성과 북한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수기



<1> 김은 소 KGB 정보원이었다.


항일 유격대 시절 대원 고작 20여명 지휘
평양 입성 연설문 소장군이 써준 것 읽어
덧니 많아 모두 뽑고 틀니로 ... 최현이 김정숙과 결혼 중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그러나 김일성 개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정권 45년의 역사는 북한 당국의 미화작업에 의해 혹은 과거 우리정부의 굴절된 시각에 의해 진실에의 접근이 차단돼 왔다. 본보는 초기 북한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여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돼 줄 전북한군 보병사단 정치위원 여정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여정은 45년에서 50년까지 중국인민군의 일원으로 만주에서 일본군의 패잔병과 싸웠으며 50년초 귀국, 6.25 때는 북한군 보병연대 당위원장으로 참전했다. 여정은 종전 후 여러 차례 무공훈장을 받고 승진을 거듭했으나 1959년 군부내 연안파 출신 간부숙청 때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만기 출감한 뒤 북한을 탈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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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 안전을 염려한 그의 요청에 따라 그의 이름은 가명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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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원동방면 책임자인 솔로킨 소장의 비밀정보원이자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원동방면군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과 솔로킨 소장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조선의 수령감으로 지목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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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고록 첫머리에 이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함께 소련이 김일성을 선택하게 된 진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다. 만일 소련이 김일성을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북조선은 오늘날과 같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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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소장 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의 증언 (최원은 본래 소련군 상위로서 원동사령부 솔로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을 했었다.)


" 소련 원동방면군 사령부에서는 중국만주 항일연군 사람을 믿지 않았지요.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이나 솔로킨 소장도 그랬소. 솔로킨 소장은 베리야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고 소련 국가안전위원회의 원동방면책임자였는데 자주 항일연군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김일성은 믿을 수 있는 우리 사람이라고 합디다. 솔로킨은 88여단의 내부 상황을 김 장군을 통해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솔로킨 소장이 김장군을 우리 사람이라고 한 것은 국가안전위원회 사람이란는 뜻이지요. 김 장군이 88여단에 있을 때 모스크바에 두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 .....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


.......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 ]



스티코프가 김일성을 下人처럼 다뤘다


金學俊 박사 강연에서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조갑제닷컴



소련군 연해주軍官區 실력자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심지어 1946, 47년에 북한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잖습니까 그때마다 스티코프가 직접 평양에 오고, 진남포, 해주까지 다 시찰합니다. 시찰하면서, 여기 선거현수막 이거 바꿔, 이거 가지고 안돼, 심지어 김일성의 연설문을 자기가 고쳐 써줘요, 고쳐 써준 것을 김일성이 읽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자율성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고 그 때 북한은 자율성이 있었는데, 남한은 자율성이 없었고 ― 이건 그러한 原자료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제가 더 놀라웠던 것은, 공산통치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고요. 황해도 해주에서 무슨 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그 회의를 할 때의 회의 계획서, 이것까지 다 북한점령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더라고요. 국기 경례, 스탈린 대원수에 대한 인사, 그것까지 다 써 있어요.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해요.


미군이 남한을 통치하는 동안에 미국의 백악관이나 미국의 본국 정부나 미국의 펜타곤에서 서울의 韓人들에게 韓人들이 지방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대해 사전에 보고하고 검열을 받도록 지시를 했다는 것이 지금 문서로 나온 게 없습니다. 소련은 그만큼 철저하게 북한을 장악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뭘 말하느냐, 그때 북한은 우리가 배워왔던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자율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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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동아일보 회장 金學俊 박사 강연에서)

[ 2011-07-19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9414&C_CC=AC









[김용삼 칼럼] 북한의 ‘건국’에 대해 알아보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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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건국’이 문제란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민중의 열망을 무시하고 미제의 힘을 끌어들여 분단정권을 출범시킨 몹쓸 날이란다. 따라서 ‘건국’은 1919년 중국 땅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이 되어야 한다고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언을 해버렸다.


제 나라 건국일에는 침을 뱉는 인간들이 북한 정부가 출범한 1948년 9월 9일은 ‘건국절’이라고 정중하게 예우한다. 반제 반봉건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수렴하여 식민 잔재와 봉건 잔재를 척결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으니까 예우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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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구․최장집은 1989년 한길사가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제4권에 게재한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논문에서 해방공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하여 반혁명으로 귀결된 데 비해 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란 공산화를 말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실패했고,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후원을 얻어 공산화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193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정립한 민족·민주혁명 이론은, 나라에 따라 신민주주의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실천한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실패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비난·거부·부인하는 좌익·전체주의 신봉세력들의 난동에 혈압을 높이기에 앞서, 그들이 그토록 경하해 마지않는 38선 북쪽에 공산정권을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진짜 건국 과정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통해 해부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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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유엔의 자손,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건국되었나? 우선 북한에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조직을 위해 복잡한 다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과정을 도식화하면 아래 표와 같이 정리되는데, 모든 과정이 소련군정의 철저한 기획과 연출, 감시와 협박, 조종과 인큐베이팅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을 예의주시하기 바란다.



소련군정 지도부는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의 수립에서부터 실행계획과 대회진행 및 의사일정, 심지어 대의원(국회의원)의 정당별 의석 배분, 출신성분별 구성 인원과 숫자까지 세세하게 결정하여 이를 지령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대한민국의 제헌의원 선거 과정에서 미군정이 선거를 실시하기 전에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고, 출신 성분별로 인원을 정해놓은 다음, 그에 맞춰 당선자를 결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소련공산당 당중앙(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소련군정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후보자에서부터 정당 및 성분별 비율까지, 후보자 개개인의 사상과 일제하에서의 활동 등을 엄격하게 심사한 다음 소련공산당 당 중앙의 재가를 받았다. 스티코프의 일기가 바로 김일성과 북한이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괴뢰정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남한이 ‘유엔의 자손’이라면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인 셈이다.



국호·헌법까지 소련이 만들어줘



북한의 정치 드라마는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군구와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확정되면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후 소련군정에 전달되었다. 소련군정 사령부는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드라마의 대본과 한국인 출연자들을 준비시키고 기획자의 최종적인 결재를 받아 드라마를 연기했다.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의 재가를 얻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명단 하나하나가 소련군정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형식상으로 투표를 거쳤는지는 몰라도, 지구를 반 바퀴 도는 요란스러운 기획 및 결재 과정을 거쳐 모스크바 당 중앙의 의지대로 선출된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뿐만이 아니라 아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헌법까지도 소련공산당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스티코프 일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이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을 결정하자 나흘 뒤인 11월 8일, 북한은 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 임시헌법’ 작성에 착수했다. 그런데 헌법의 작성자는 북한 헌법학자가 아니라 소련공산당이었다.


소련군정은 1947년 말부터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법률 전문가들에게 동유럽 위성국들을 창설할 때 작성한 헌법을 참고하여 북조선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이 초안을 소련 외무성과 소련공산당에 보고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세부적으로 검토한 후 평양의 소련군정에 지령하여 1948년 2월 초에 헌법안 작성을 끝냈다.


1948년 4월 24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북한의 헌법문제에 대하여’를 결정했다. 이날 모스크바 교외 스탈린의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외상, 즈다노프 서기, 그리고 주북한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참석한 가운데(북한 인사 중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북한의 국가건설, 즉 헌법 제정으로부터 독립에 이르는 내용이 결정되었다.


북한 헌법과 그 이후 국가건설계획의 골격이 이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스탈린은 스탈린 헌법에 따라 작성된 북한 헌법 초안에 대해 제2장, 제14장을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은 전적으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작품이다. 소련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 임시헌법 제정위원을 선정하라고 지령했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남조선에서 미국인들이 유엔 임시위원회의 협조 하에 금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북조선 영내에서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 선거(남한의 총선에 해당)를 실시하며 내각제 정부를 수립하라”고 그 시기와 방법까지 세세하게 지령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스탈린 헌법의 영향이었다는 점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조선인민은 위대한 스탈린 헌법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의 영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스탈린 헌법은 그 천재적인 기초자가 말하고 있듯이 파시스트의 야만성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는 전사들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민에게 정신적인 원조와 실제적인 지지를 주고 있다.”



모든 것이 스탈린 뜻대로



남한에서 제헌의회가 제헌헌법을 만들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던 1948년 7월 31일, 소련군정은 북한의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남한의 국회의장단에 해당) 결정을 위해 한 달여 심의에 돌입했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북한의 정부 조직 및 각료 인선 문제도 자신의 지시에 의해 준비되고 연출되었다.


소련은 남한의 장․차관에 해당하는 상(相)․부상(副相)의 인선은 물론, 최고인민회의 회의 장소와 청사, 내각 청사, 정부 선언문까지 작성하여 김일성에게 넘겨주었다.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은 발라사노프 정보팀은 추천된 인사들의 경력과 소련에 대한 충성도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소련군정 사령부가 초대 내각 구성원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선정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 부분은 소련에 우호적인지의 여부, 북한에서 실시한 소련 정책을 지지하는지의 여부였다. 소련군정은 이 기준에 근거하여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배치하고 그 명단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어 9월 9일 발표하도록 했다.


그런데 명예직과 권위 있는 정부의 상(相·장관) 자리는 국내파와 연안파 등에게 양보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내각의 주요 부상(副相·차관)에는 소련파들을 집중 배치했다. 얼굴마담 자리는 다른 파벌에 넘겨주고, 실권은 소련 출신들이 차지하는 ‘2중 구조’ 내각 형태를 만든 것이다.



1948년 9월 8일,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제1차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승인하고, 이날부터 “전 조선 지역에서 인공 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를 이끌어갈 의장단과 상임위원회 위원장단, 상임위원 등을 선출했다.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수상으로 선임됐으며, 내각 조직을 김일성에게 위임했다.



다음날인 9월 9일 오전 10시, 김일성 수상은 소련공산당 당 중앙이 결정해준 내각 성원 명단을 발표했고,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내각 구성을 승인했다. 이어 김일성 수상이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3년에 걸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와 평양 주둔 소련군정 사령부의 기획 및 연출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스탈린의 뜻대로 된 것이다.


이것이 북한 건국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칼럼 내용을 석 줄로 요약한다.



1. 북한의 건국절인 9․9절은 스탈린의, 스탈린에 의한, 스탈린을 위한 북한이 탄생한 날이다.

2. 북한의 초대 내각 수상은 물론 각 부처의 상․부상(장․차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국회의장단)과 대의원(국회의원)들은 소련 당중앙이 충성 심사를 거쳐 선정해주었다.

3. 북한 헌법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 이름도 소련공산당 작품이다.



무식이 죄다


이따위 사이비 괴뢰집단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자주․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정신 나간 짓이 백주에, 그것도 중인환시리(衆人環視)리에 자행되고 있다. 이 나라의 학교와 언론, 포털과 영화관에서는 애오라지 김일성의 가짜 항일투쟁만을 무뇌아처럼 되새기고, 저들의 날조된 주장을 확대재생산 하는 작업에 시간과 비용과 노력과 정열을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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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 전 월간조선 편집장)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8









[ ...... 해방초기 소련군정을 지원하고 김일성 빨치산파와 함께 북쪽을 통치해나간 중심세력은 소련파였다. ........ ]



[ ..... 실권을 쥐는 부상(차관)자리는 고려인이 장악 ....... 고려인이 부상을 차지하지 못한 성은 하나도 없을 정도 ........


..... 각 도당 위원장은 대체로 고려인이 ...... 당중앙에서도 조직부장 허가이, 선전선동부장 박창옥 등이 장악 ........ ]


[ ..... 소련파는 .... 스탈린에 의해 「수령」으로 정해진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였다. ........ ]




소련파 입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중앙일보] 1991년 11월 14일



◎ 김일성 집권 터 닦은 「정치일꾼」 / 소 지시로 5차례 2백여명 평양 도착 / 50년대초까지 당·행정기관 요직 장악



해방초기 소련군정을 지원하고 김일성 빨치산파와 함께 북쪽을 통치해나간 중심세력은 소련파였다.

소련국적이거나 또는 소련에 살고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일단의 한인들을 소련정부는 북한통치에 투입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인이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군정을 용이하게 운영하겠다는 행정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장차 소비예트화할 북쪽의 지도자로 내밀하게 정한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전준비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생활 경험이 풍부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어서 해방후의 북한을 급속하게 장악, 북한사회의 골격을 만들어냈다.


45년 8월 하순부터 46년 9월까지 북한에 파견돼 직·간접으로 김일성 정권을 도왔던 한인들은 줄잡아 2백여명.

그후 50년대 중반까지 개별적으로 입북한 인사들까지 합하면 모두 4백27명이라는 증언도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57년말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시에 있는 한인신문 고려일보 부주필로 있는 정상진씨(73·일명 정율)의 증언.


『정치일꾼으로 참여한 이른바 정통 「소련파」 2백여명은 편의상 입북시기를 기준으로 1진부터 5진까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 88특별여단 소속으로 김일성과 함께 입북한 「빨치산파」등 60여명은 제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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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소련파의 총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허가이.


○허가이가 핵심인물


그는 소련에서의 풍부한 당사업 경험과 실무능력으로 김일성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파역을 수행했다.

「당박사」로 불렸던 그의 배후에는 소련군사령부와 소련파로 불리는 대규모의 「고려인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내무성부상을 지내다 억지 사상검토끝에 소련으로 탈출한 강상호씨(83·레닌그라드 거주)의 증언.


『소련군사령부의 기본정책은 명예직과 권위있는 정부의 상(장관)자리는 국내파와 연안파 등 타파에 양보하고 실권을 쥐는 부상(차관)자리는 고려인이 장악토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내무상은 연안파의 박일우에게 넘기고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은(후에 사회안전성) 소련파인 방학세를 시켰지요. 48년 1차내각때 고려인이 부상을 차지하지 못한 성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당기관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조선공산당 분국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6·25까지 「팔도장군」으로 불리는 각 도당 위원장은 대체로 고려인이 점했습니다. 이와 함께 당중앙에서도 조직부장 허가이, 선전선동부장 박창옥 등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이같이 잘 조직된 인맥을 가진 소련파는 총수 허가이를 중심으로 스탈린에 의해 「수령」으로 정해진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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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911114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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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 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김규식(金奎植).김두봉(金枓奉)등 남북정치지도자들의 회담이 소련측의 주도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김구선생 암살당할것 예견했었다


〈관계기사 8面〉 이같은 사실들은 中央日報가 창간 30주년사업으로 추진중인 현대사 자료발굴과정에서 단독 입수한 소군정(蘇軍政)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소장(少將.92년5월 모스크바에서 90세로 사망)의 일기 형식 비망록(대학노트 크기 1백97쪽)에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 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게 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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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極東)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大將)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 ▲유엔 한국(韓國)임시위원회 조선(朝鮮)에서 추방 ▲소.미군 철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위해 소군정은 「혁명논리와 투쟁전략」을 주 내용으로 연석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문에 해당하는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사전에 작성해 남한대표들에게도 이같은 지침을 미리 시달하여 지침 내용대로 연설을 준비토록 지도하라고 했다.



소군정은 또 북한 정부 수립 두달전 김일성이 수상과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박헌영(朴憲永)은 외무상만 맡도록 하는등 초대 수상과 내각,최고 인민회의 상임의장단 등에 대한 후보명단을 작성해 모스크바「중앙」(소련공산당 중앙 위원회 또는 스탈린을 지칭)에 상신했으나 「중앙」이 남한인사들이 소외됐다고 지적, 김일성은 수상만 맡고 박헌영은 제1부수상겸 외무상, 남로당(南勞黨)의 이승엽(李承燁)을 사법상, 조선인민공화당 당수 김원봉(金元鳳)을 검열상으로 각각 추가 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군정은 이밖에 남북 정치협상의 와중에서도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속히 제작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지금까지 남북연석회의와 북한정부 수립등을 소군정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을 해왔을 뿐 이를 증명할만한 소련측의 사료가 없었으며 특히 이들 과정 모두를 김일성이 주도했었다는 북한 당국과 한국의 일부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게 된 계기가 됐다. .


https://news.joins.com/article/2970187







<평양의 4김회담>


1. 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11.15



◇ 3월24일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에게 지시) - 南北韓 정세보고는 김일성파,김두봉파,허헌파(남로당 위원장 박헌영이 보고를 못할 경우) 3개 그룹 대표가 한다.

-의견을 교환한 후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을 채택한다.


-회의 일정을 채택한다.


〈회의첫날〉 1,개회사 2,주석단-당수,단체 지도자들 3,회의 순서와 절차 채택 ※축사- 김두봉.김구.허헌.김규식.김달현(북조선 천도교청우당 당수).이극로(건민괴 대표).최용건(조선민주당당수).김원봉(조선인민공화당)8명 축사자의 이름을 밝힌다. 회의경축공연은 합창과 오케스트라.


〈회의 2일째〉 1,첫 문제에 대해 3통의 보고- 토론은 15분 2,첫번째 문제에 대한 결정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 선출

〈회의 3일째〉 1,토론 후 첫번째 문제에 관한 결정서 채택 2,두번째문제 보고자는 허헌(보고내용은 선전효과와 조직에 대해 강조할 것)



〈김일성에게 지시〉

▲48년 8월15일까지 소련과 미국정부에 보내는 소군과 미군 철수에 관한 메시지를 채택할 것 ▲남한의 총선을 반대 분쇄하기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



◇3월25일


(당)대회에서 중앙검열위원을 선출하지 말라고 김일성에게 충고했음. 당에서는 노동자가 우선이다. 근로대중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노동당. 노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을 기초로 한다.(여타 민주적 정당들도 마찬가지) 〈김일성 보고〉 ▲국내정세=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해 남조선 국민은 미국을 의심하고 있다.



◇3월26일


(남조선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일체의 라디오를 통제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

〈스티코프와 회담(20시30분)〉 1,북한 인민들은 다른 당의 (남북 연석회의에)참석을 반대하지 않는다.

2,조선인민은 미군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없이도 조선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3, 2~3일간 더 기다리자. 그래도 오지 않으면 신문기사를 내거나 기자회견을 통해 성명을 발표한다.

4,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는 모스크바 결정을 기반으로 한다. 누가 (蘇美공위)결렬시켰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벌써 3년동안 정부 없이 허송했다. 모스크바 결정을 관철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즉 정부가 이미 수립됐을 것이다. 일치 단결하여 당은 사업을 잘 한다. 단결만이 이런 결과를 가져다준다.


4,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자료준비가 중요하다.

▲대회에 대해서는 보안을 유지한다.

▲스티코프가 불가닌(국방부차관)을 만나기 위해 월요일에 모스크바에 간다. 남북 연석회의에서 제정당의 단합을 반드시 강조하고 기타 소수정당들을 격려해야 한다.



◇3월27일


북로당 제2차 당대회 개회. 참석인원 9백90명(여자 1백42명) ▲노동자 4백61(46.6%)▲고등교육 1백44(14.5%)▲농민 2백56(25.9%)▲중등교육 1백95(19.7%)▲사무원 2백32(23.4%)▲초등교육 6백51(65.8%)▲기타 41명(4.1%) 김일성의 총화보고에 대해 16명이 발언했다. 토론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초청에 따른 문제와 ○(반당적 요소가 짙은) 오기섭에 대해 집중 토의했다.



◇3월 31일


〈김일성에게 지시〉 김창만(북로당 선전부장)이 소련을 비판하고 다닌다. 우리는 앞으로 그를 신임하지 않을 것이다. 당대회 개회사를 할 늙은이를 고를 것.


〈스티코프에게 문의〉 ▲조만식을 연석회의에 초청하거나 만나겠다는 문제가 제기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남한 기자들을 회의장에 출입시켜야 할지.이들이 연석회의를 어떻게 보도할까.북한 기자들의 출입은 ▲연석회의에서 소련군 사령부의 축사 가 필요한가 ▲기타 정당 단체 대표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해야 할지 ▲이회의를 임시인민회의(전조선을 대표한)의 성격으로 부여할 필요는 없는지 ▲회의에서 꼭 만장일치를 고집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되는지.


◇4월2일


서울방송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중도당들이 우리가보낸 연석회의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 그들이 동의한것 같다.

〈문일(김일성 비서.소련파)의 남한정보 보고〉 김구 집에서 연석회의에 초청된 당수들이 회의를 갖고 앞으로 평양에서 개최 될 연석회의에 대한 대책을 토의했다. 회의 식순과 어떤 노선을 택해야 할지 등이 집중 토의됐다고 한다.



-남한기자들이 앞으로 개최될 연석회의에 대해 딘 미국소장에게 질문

-연석회의에 대한 당신의 의견 ▲우리는 선거를 준비중이므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당신은 남한 대표단 평양수송에 협력하겠는가 ▲우리는 북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들이 북한에 가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고,협력도하지 않겠다.

-남한의 주요 지도자중 한 사람인 김구가 방북을 한다면 안내할 의향은 ▲김구는 북한 가는 길을 모르는가. 기차도 있고 자동차도 있지 않은가. 소련군사령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했다. 우린 더 이상 입북 신청을 하지 않겠다. 김구등은 회의 일정 등 문제를 북측과 사전에 협의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표를 북에 보낼 예정으로 알고 있다.


〈스티코프에게 남한에 대한 정보보고〉

▲국경이 모두 닫혀 있다 ▲군대와 경찰이 아주 많다.계속 감시를 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책을 전화로 지시해달라.



◇4월2일 4월3일 새벽 3시에 청년대표단이 도착한다. 그들을 마중해야 한다. 그들에게 음식과 돈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






<평양의 4김회담> 2. <해설> 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11.16



비망록 내용의 대부분이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들이다.


1948년 3월25일밤 평양방송을 통해 4월14일 평양에서 「남북 정치협상」을 개최한다고 발표한 평양주둔 소군정(蘇軍政)과 북한지도부는 남한의 좌익세력등을 통해 미군정(美軍政)과 남한의정세를 면밀히 파악해가면서 김구(金九)와 김규 식(金奎植)의 입북 지연 대처방안 등 남북정치협상에 대한 전략을 짜나가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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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군정과 북한지도부는 회의를 여러차례 연기해가면서도 김구와 김규식의 입북을 기다리면서 이들 두 지도자를 기여코 참석시키려는 의지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두 지도자의 입북과 회의 참석을 관철시키기 위해 김구에게 언론.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참석자들에게 비용까지 지원할 것을 결정했다.


소군정의 이같은 의도는 두 지도자가 법통을 갖고 있는 임정(臨政)의 대표이자 당시 남한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에 소련의 「민주기지」인 북한정권수립의 정통성과 두 지도자의 상징성을 감안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의 두 김씨가 남한의 두 지도자에게 직위를 주고 헌법 채택이후 범민족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회유한 것 등도 같은 의도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소군정(레베데프)은 김구가 남한의 단독선거를 막는데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도가 어느 정도인지 등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모스크바=金局厚연구위원] .






<평양의 4김회담> 3. 蘇, 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 1948년 4월 9일


〈소련군 극동(極東)사령관 비루소프 암호전문〉앞으로 조선에 대한 모든 지시는 나를 거쳐야 한다고 스티코프동지에게 전하라. 그는 나의 정치부관이지 소련대표가 아니다.

○북조선에 스탈린의 초상화가 너무 많다(레베데프 지적).



◇ 4월 12일


〈스티코프 전문〉 김일성에게 아래와 같은 신문보도문을 전달하라.

북조선 정당과 사회단체의 요청에 의하여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조선의 민주정당과 사회단체 초청으로 평양에서 개최되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북하는 남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의 입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


○4월12일 현재 평양도착.

△백남운(白南雲.근로인민당부위원장)과 비서 2명 △나승규(羅承圭.민중동맹조직부장) △홍남표(洪南杓.남로당 중앙위원) △허성택(許成澤.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의장)등 2명 △민중구락부 2명 △전국농민총연맹 1명.


〈스티코프(오전6시)와 둔킨(외무부 고문.오전4시)지시〉 김일성은 김구의 요청에 의해 회의가 연기됐다고 보도하고 대표단이 도착하면 순차적으로 맞이할 것. 회의에서 ▲조선인민과▲소.미정부에 보내는 두개의 간단한 호소문을 채택할 것.



◇4월14일


〈스티코프와 협의.오후7시〉 ▲입북한 정당대표들의 명단을 보도할 것인지 -남조선 사람들과 협의하라 ▲그들의 사진은 -회의에서 논의하라 ▲신문에 공개.비공개 대상자는 -해당자들이 결정하되 나의 재가를 받을 것 ▲김원봉(金元鳳.조선인민공화당 당수)의 공개 또는 비공개 여부-본인과 상의,신중히 결정하고 나의 재가를 받을 것.


〈스티코프의 지시〉 ▲남조선 대표들이 사전에 연설을 준비토록 그 내용을 지도 ▲연설내용에 스탈린의 말을 인용 ▲회의에 대한 라디오방송 홍보를 계속.



◇4월15일


〈김일성에게〉 ▲인민회의 4월말 소집할 것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제작하되 붉은 색과 청색,흰색과 검은색(선과 악상징)을 배합하도록.


◇4월16일


미군정 하지에게서 전기요금협상에 관한 서한이 오지 않으면 김일성에게 4월20일부터 남조선에 대한 송전을 중단토록 지시.



◇4월17일


서울방송에 의하면 김구가 4월18일 출발한다고 성명했다.


〈김구의 기자회견 문건〉 나는 이북에 가고 싶다.일부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북조선에 잘못을 빌러 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결코 그러기 위해 가는게 아니다. 나는 긴 편지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편지는 우선 외국인들의 손에 들어 갈 수가 있다. 나는 한 핏줄인 동포들과 모국어로 이야기하러 간다. 나의 방북은 내 신변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나 내가 조선인민을 위해 평생을 싸워왔기에 두렵지 않다. 5월10일 내로 나를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 4월 18일에 우리는 떠난다. 김규식은 1주 늦게 출발할 것이다.



〈스티코프의 지시. 오후8시〉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내용에 혁명 논리와 투쟁 전략을 강조 ▲북조선 인민이 선택한 노선이 옳음을 간접적으로 표현 ▲남북인민들이 공동으로 투쟁하도록 유도 ▲제민주정당은 이승만(李承晩) 반대투쟁에 일치단결 ▲회의 참석자들이 남조선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계속 흘려 미군정과 남조선 당국이 혼란에 빠지도록 할 것 ▲남조선 대표와 상의해 신문에 진짜 이름이나 가명으로 발표할 것 ▲반동자와 미군간첩이 낄 수 있으니 자격심사위를 강화하여 진짜 이름은 꼭 알아둘것 .


◇4월19일 11시 김구의 출발정보에 따라 4월19~20일 지도자회의 개최여부 결정. 김규식측 두 대리인이 도착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동의를 받았다고 라디오로 보도할 것.

4월18~19일 밤에 김규식측의 두 대리인 평양도착. 이들은 『민족통일을 위해 유엔의 후원을 받는 것은 민족자주독립 실현의 조건이다』는 연석회의에서 토의될 원칙적인 문제를 제의하고 다음과 같은 메모를 가지고 왔다.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배격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는국가를 건설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해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어떠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미.소군의 철수는 양군 당국이 조건.방법.기한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라디오로 방송할 것〉 배성룡과 권태양 연락자들이 가지고 온 준비조건은 전적으로 해결되었다.기술적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모두 해결되었다.

○회의는 시작하되 신문엔 아직 발표하지 말라.소회의에 31명이 참석했다. .






<평양의 4김회담> 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김두봉(金枓奉.北勞黨위원장)개회사(註:예비회의.오전11시)=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의 요청에 의해 회의가 연기되었다. 조선해방을 위해 피를 흘린 소련군은 북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제의했다. 미군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이 두사람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기다린다는 것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총선거(註:남한의 총선)가 실시될 것이니 더 기다릴 수 없다. 온갖 난관을 헤치고 회의에 온 남측대표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김원봉(金元鳳.인민공화당 위원장)= 우리나라의 긴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모일 수 있게 된 것도 김일성(金日成)의 공로가 컸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회의에서 우리는 완전한 의견일치를 얻어야 한다.


▲백남운(白南雲.근로인민당 부위원장)= 김일성이 제안한 회의일정을 지지한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당수도 조선의 재건을 위한 우리의 회의를 지지했다. 빨리 남으로 가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본회의(註:모란봉 극장)는 18시5분에 개회되고 1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김일성.박헌영(朴憲永.南勞黨 부위원장).허헌(許憲.남로당위원장)이 등단했다. 개회사는 김월송(金月松.82.남조선 反日투사회)이 맡고 주석단은 만장일치로 선출 됐다.김두봉.허헌.최용건(崔庸健.조선민주당 당수).백남운이 축사를 했다. 모두 소련의 역할과 업적에 대해 말했다.


〈스티코프에게〉 국경을 차단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회의참석을 이유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더 이상 통과시키지 말아야 한다.


〈김일성.김두봉, 김구 예방〉

김 구= 나는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김일성=근본과업은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나는 아무 욕심이 없다. 당 대표들이 많이 왔다. 당수는 회의에 꼭 참가해야 한다. 나는 홍명희(洪命熹.민주독립당)와 엄항섭(嚴恒燮.韓獨黨 선전부장)도 만나고 싶다.


김 구=나는 회의의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그런 곳에 참석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다(註:그가 결코 참석을 거절한다면 참석하지 말라고 하고 그의 대리인이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비망록의 필자 레베데프는 적고 있다). 나는 이 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 단독회담에서 우리가 해야 할 긴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김규식이 제안한 선행조건 질문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그것은 김규식이 한 것이다.


김두봉=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있는가.

김 구=그들은 내쫓기 전엔 안 나간다고 생각한다. 북의 헌법은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김두봉=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김 구=남에서 북의 헌법에 대한 보도가 많아 그렇게 믿게 된다.

김두봉=뱃속에 있는 아이를 놓고 아들이다,딸이다 하며 왈가왈부하는 것과 같다.


김일성과의 회견때 김구는 자기 당 대표들과 협의하기 전에는 회의에 참가할 수 없으며 결코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듭말했다.

〈우리의 결정은〉 공개회의는 계획대로 4월21일에 시작한다.47명의 지도자 호소문에는 정부수립 제안이 포함돼야 한다고 김일성과 김두봉이 제의.


※ 문제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어떻게 하나. 『나가라』고 하고 그들을 미국간첩으로 몰자.


그리고 회의는 계속한다. 김구와 대화를 계속한다. 중요한 것은 ▲총선반대-조선분단및 정당.단체 분열 불허 ▲蘇.美 주둔군 철수후 정부수립-상부(註‥스탈린 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지시대로 ▲회의는 계획대로 진행된다. 김구측 사람들 중 참석 할 사람은 참석해도 좋다. 그들이 소란을 피우면 이 대회는 총선을 반대하자는 것인데, 왜 퇴장하느냐고 몰아붙일 것.


〈도착 또는 오는 중〉 조소앙(趙素昻.한독당 부위원장).이극노(李克魯.建民會대표).엄항섭.여운홍(呂運弘.社會民主黨 선전국장)등 75명이 오는 중이다. 합하면 남조선 사람은 2백5명. 김규식은 이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고 있는 사람은 아침에 평양도착 예정 .홍명회가 평양에 도착했다.



◇ 4월 21일 〈김일성- 김구 회담〉


김일성=만일 당신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김 구= 나는 ▲정치범 석방 ▲38선 철폐등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 내가 어떻게 총선거를 실시하는데 동의하는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 당은 비합법적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서울방송에 의하면 김규식이 오전 6시 평양으로 출발했다.

4월20일 아침 기차로 21명이 도착했다. 사회민주당 3명,한국독립당 8명,민주독립당 9명,건민회 1명. .











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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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 .... 9월 8일 ...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 ....

.... 9월 9일 경성에 도착 ....... ]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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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둔 초기​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쇼와 천황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 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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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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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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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1945.9.20. 스탈린



[ .....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 ]



북조선에서 소련군과 현지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소련 극동사령관 및 제25군에 내린 소련군최고사령관(스탈린)의 훈령



적군 군대에 의한 북조선 점령과 관련하여 최고 총사령부는 다음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1.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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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안토노프

1945년 9월 20일



- 소련방 과학 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편, (1981),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 문헌 및 자료』, 국토통일원 번역(서울: 국토통일원, 1987.









1945.9. 한경직 목사의 증언



[ .....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 ]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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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1945.10. 신의주



[ .....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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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
2020-10-09 23: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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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 () 2020-10-09 23:01:18

1945.10. 신의주



[ .....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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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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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 「레닌」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 ....... ]


[ .....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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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봉(朴善鳳)씨(46)·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기념회부회장·당시 평안중학 졸업반)=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 「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한데 불만을 품어오던 차에 용암포 사건이 터졌다고 해요。기차 통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시내 6개 중학생 대표들은 제일공업 윤순호(尹淳浩)군 집에서 2、3차례 밀회를 갖고『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읍니다。그때 반공애국청년단체인 「우리청년회」의 유형무형의 지원도 계산했었지요。


22일 동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만난 당시 도 학무국장 함석헌(咸錫憲)씨는 거사의 뜻을 알리자 의로운 일을 억제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미의 말을 해 학생들의 결심을 굳게 해준 일도 있읍니다。


23일이 되어 내가 다니던 평안중학과 상업학교는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기로 돼 11시부터 각기 교정에 모여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의 본부격인 제일공업학교에서 12시에 거사하자는 연락을 받아오던 학생이 중도에 그 무렵 행패가 가장 심했던 특별보안대원을 만나『너 오늘 죽어봐라』며 싸움을 벌이는 통에 늦어 이날 1시경에야 학교문을 나섰읍니다。남신의주의「평중」에서 보안서까지는 약 4㎞나 됐읍니다。


1천여명의 두 줄로 된 학생대열이「공산당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행장 옆을 지나쳤는데 그때 보니까 200m앞 둑 위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고 보안대원들이 공포를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신의주에 못들어 간다고 소리치고 있었읍니다。대치하고 있던 학생들이 몇 개 분대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투석전을 막 벌이는 순간이었읍니다。


그 비행장에서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퍼부었읍니다。그러자 학생들은 도로 옆 논두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읍니다。나도 몸을 피해 벼 낱가리 속에 숨어서보니까 「야크」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논바닥에다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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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 ]




[ .....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 ]


[ ......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 .......

......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 ]


[ ......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 ]




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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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한편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驛前 광장에서 열려 김일성이 주석단에 등장하여 연설을 시작하자 한 反共청년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김일성은 처단하지 못하고 소련 군인 한 명만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리 없이 끌려간 학생들



4월 초부터 학생들은 동맹휴학에서 벗어나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38선 以南(이남)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시베리아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양 학생들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은 했지만 신의주나 함흥에서처럼 공산당과 싸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야 했겠는가’하고 자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5월1일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되어 街頭(가두)행진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행진하는 평양거리의 요소마다 공산당이 배치한 선동원들이 학생대열을 향하여 親蘇공산구호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묵비권 행진을 하였다.


행사 주최 측은 無言(무언)행진을 해온 각 학교 학생들을 평양시청 앞 광장에 집합시켜놓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구호들을 선창했다. 그래도 親蘇 공산구호에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간부가 ‘조선자주독립만세’를 선창했는데 이때는 모든 학생들이 시청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으로 ‘조선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공산당은 각 학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범학교의 경우는 여름방학이 끝나자 강동군 보안서장을 하던 자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낯선 전입생이 늘어나더니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民靑’(민주청년동맹)이 침투해 왔다.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에 걸쳐 각 학교들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없어지는 학생들이 생기게 되었다. 각 학교들에는 학생들의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이 있기 마련인데 反共反蘇(반공반소) 사상 경향인 서클을 탐색해서 소리 없이 한밤 중에 잡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反共反蘇사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행동이나 표현도 하지 않은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 한밤중에 집단체포해, 소련군 軍犯(군범)재판에 넘겨 시베리아로 끌어간다.


나의 경우는 ‘희망단’이라는 이름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10여 명 회원이 모두 反共反蘇 행동을 한 바 없고, 단지 공산당 때문에 세상이 어렵게 되고 있지만 희망을 갖고 살자는 취지일 뿐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안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등교를 해서 모임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큰일 난 사건을 직감하고 담임선생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알리고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누님이 골목 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 ‘어젯밤에 너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나갔던 것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한 회원 집에서 소련군 통역관을 통해 알아본 즉 체포된 회원 모두가 ‘反動罪(반동죄)’로 7~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나는 생각 끝에 시골에 있는 내 유모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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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4. 평양



[ .....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

....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 ........ ]



[ ......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




3.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 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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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 『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 『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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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 『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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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13.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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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奎植은 스탈린 肖像畵 떼야 가겠다고



김구는 우유부단한 김규식의 태도도 마뜩지 않았다. 평양에 갔던 두 특사의 보고를 토대로 4월 13일 오후에 경교장에서 열린 대책회의에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6개항의 요구조건을 북한에 제안할 것을 제의했다.



(1)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주는 스탈린 초상화를 제거할 것.

(2)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3) 북한지역에서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남한 대표 200명과 회합할 것.

(4) 북한은 유엔위원단의 최소 1명을 선거 감시를 위하여 초청할 것.

(5) 평양회담에서는 독립 실현의 방법만 토의하고 헌법 채택, 국가 수립, 국기 선정 등을 토의하지 않을 것.

(6) 미소양군의 공동철수에 관한 선전을 중지하고 군대철수에 관한 미소회합을 갖도록 소련에 요구할 것.



김규식은 이 6개항 제의에 북한이 동의한다면 자신은 남북회담에 참석하고 유엔에 남한 단독선거 연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구는 유엔위원단과의 관계를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 김규식은 평양행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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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98. 單獨政府수립이냐 南北協商이냐








1948.4. 신화당당수 文容彩



[ .....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

.....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 ]



동아일보 1948년 04월 27일


신화당당수 文容彩, 북조선시찰담 피력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난 20일에 서울을 출발한 新化黨 당수 文容彩는 38선 부근 남천에 4일동안 강금당하고 있다가 24일 아침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방문한 기자에게 며칠동안 그가 보고 온 이북의 생생한 소식을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이번 남북회담을 기회로 그 회담광경을 구경할겸 이북의 모든 상황을 좀 살펴보려고 갔는데 회담 구경은커녕 38경계선 부근 남천에서 약 나흘동안이나 감금당하고 말았는데 그들 관헌의 소행으로 미루어 남북회담이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 서울로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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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여관이란 숙소에 들어갔는데 감시하는 보초가 총에다 칼을 꽂고 문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변소에 갈 적에도 보초병이 따라 다니니 산보삼아 거리에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속여 잠깐 문밖에 나가 보니 거리는 쓸쓸하고 사람하나 볼 수가 없어 옆집 노인에게 그 연고를 물어보니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머리를 쩔쩔 흔들면서 기운없이 대답하였다. 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동족끼리 말 한 마디 못하게 외출을 금지하는 이북 관헌들을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원망하고 분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때쯤 되니 거리에 학생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데 첫째 그 복색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중에는 걸레같은 옷을 감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 남조선 학생들은 아직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제시대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었다.

23일 밤에는 평양 중앙민전에서 누가 왔다기에 그이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하던 끝에 실업자는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 실업자가 많다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실업자가 없다는 곳에서 그렇게 실업자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니 우물쭈물 답변을 못하였다.


그리고 그쪽 신문을 몇 가지 주는데 보니 전지면이 백힌듯이 꼭같은 공산주의 선전이고 변화가 없어 싫증이 나서 그래도 남조선의 신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간에 이북은 말 한마디 자유롭게 못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감옥에 얽매여 있는 듯한 곳이라는 감을 주게 한 것은 아마 나 개인의 감상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948.4.25. 김구



[ ...... “서울에서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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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4일 하루는 휴회한 데 이어 4월25일 오전 11시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광장(현재의 김일성광장)에서 연석회의 경축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오후 4시에는 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조선인민위원장이 주최한 경축연회가 열렸다. 평양시민대회는 30만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대규모 행사였다.(중략)


김일성이 주치한 경축연회는 당시 이북 형편으로선 최대 연회였다. 김구와 김규식도 평양시민대회와 경축연회에 참석했다. 김일성과 김구, 김두봉과 김규식이 헤드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경축연회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은 38선을 넘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 대표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축하연설을 했다. 이에 대해 김구·김규식·조소항 등의 답사발언이 있었다. 김일성의 초대연은 거의 7시 무렵까지 계속됐고 공연도 진행됐다.



평양시민대회와 관련해 이 행사에 참석했던 김구가 기자들과 나눈 얘기가 북로당 지도부내에서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북로당은 김구·김규식·조소앙 등 거물 정치인들이 연석회의 행사와 북측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촉각을 세우고 여론 수집을 하고 있었다.(중략)

아무튼 김구는 30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질서정연하게 시민대회를 진항한 데 감탄했다고 하면서, 다만 시민대회에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한 데에는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기자들에게 “서울에서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가. 친소적인 인상이 들어 기분이 언짢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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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회의 사흘째, “김구 도착” 선언에 우레 같은 박수[특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본 남북연석회의(3)

김동원 기자
승인 2018.04.20







1948.4.30.


[ ......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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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는 작30일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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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남북협상축하대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답: 질서 있게는 보였으나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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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 ]

[ .....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 ]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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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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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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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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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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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 ]


[ .....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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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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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에도 구석에 포개둔 이불속에 머리만 틀어박고 온몸은 훤히 드러낸 채로 덜덜덜 떠는 데에 똑같았고, 꿩이 그렇다던가,


큰집에선 반대로 옥살이 할아버지가 마당까지 일부러 나와 비행기를 쳐다보며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소리소리 지르셨다. 사랑하는 문태 숙부가 잡혀가 숱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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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나가면 친공적 교사들의 지휘통솔 하에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행군하는 것이 다였다. 그 때마다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나는 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이란 김일성 노래와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을 원수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했지만 코쟁이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라 하는 건 더욱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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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1. 김일성



[ ..... 5도연합 회의가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 개최되는 데 대하여

전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연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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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문이 해방일보 1945년 11월 5일자 「정치노선 조직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로 게재됐는데, 이것은 1945년 10월 13일 열성자대회에서 29개 항이 채택된 겁니다. 여기 14항에 “대회는 중앙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는데, 중앙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습니다. 이 결의서에 따라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보낸 대회에서 채택한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금번의 세계대전에서 스탈린 대원수의 세계 평화의 해방을 위한 참으로 위대한 정책하에 시도된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모든 유리한 조건이 실현된 조선에서 5도연합 회의가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 개최되는 데 대하여 전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연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조선 무산자계급의 영도자 박헌영 동지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동지의 정당한 볼셰비키적 지도하에서 우리의 볼셰비키진영을 일층 확대, 강화함으로써 목전에 다가온 모든 정책을 기대하여 동지의 건강을 기원한다.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영수, 스탈린 동지 만세! 조선무산자계급 영수, 박헌영 동지 만세!


1945년 10월 13일”



이런 내용의 편지문도 보냈어요. 이 내용이 임은의 일어판에도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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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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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자신이 내무부차관보로 재직시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1987년 헝가리를 방문했던 당시를 언급했다.


"그 때는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인데 수상실로 들어가자 수상의 첫 인사가 '축하합니다'였다"며 "당신네 나라는 2차대전후 선조를 잘 만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기에 오늘날 발전한 게 아니냐. 2차대전 전 산업화를 했음에도 완전 평등이라는 달콤한 이론에 넘어가서 동구권은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세계사를 미리 예측한 사람은 이승만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부심을 가졌다" 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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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통령 이승만"
written by. 이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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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대한 역사의 교훈은 다름 아닌 소비에트 러시아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에 의하여 표명된 적이 있다. 1991년 11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대그룹의 정주영(鄭周永)과 이명박(李明博)에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이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에게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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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명박,《신화는 없다》, 김영사, p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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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마지막회 에필로그> 이승만과 김구의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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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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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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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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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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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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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1945.12.17.



[ .....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

.....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 ........ ]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방송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5년 12월 21일



李承晩은 17일 7시반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하에 그 대변인으로 하여금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共産黨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가 다 잘못한 죄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艱幸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 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조심해서 어린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처럼 대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우선 동서 각국에서 遂要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렬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獨立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英·美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고 급기야 러시아가 독일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軍機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歐羅巴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뭣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투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 분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蔣介石總統의 애국심과 용감한 軍略으로 전국 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 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합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蔣總統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뺐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줄 우리는 의심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憑藉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機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왜 조선사람의 形容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치 않는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 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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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이승만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










1946 정치지도자 지지도


[ ..... 이승만 32%, 김구 22%....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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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두 차례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우파 정당은 43%·40%였던 데 비해, 좌파 정당은 33%·31%에 그쳤다.


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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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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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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