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닉네임 : 총소리  2020-07-20 22:37:57   조회: 105   
1945 김집



[ ......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 ]



[ .......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 .....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


....... 신의주에서 .....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 ]




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 (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

金鏶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한편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驛前 광장에서 열려 김일성이 주석단에 등장하여 연설을 시작하자 한 反共청년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김일성은 처단하지 못하고 소련 군인 한 명만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리 없이 끌려간 학생들



4월 초부터 학생들은 동맹휴학에서 벗어나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38선 以南(이남)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시베리아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양 학생들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은 했지만 신의주나 함흥에서처럼 공산당과 싸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야 했겠는가’하고 자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5월1일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되어 街頭(가두)행진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행진하는 평양거리의 요소마다 공산당이 배치한 선동원들이 학생대열을 향하여 親蘇공산구호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묵비권 행진을 하였다.


행사 주최 측은 無言(무언)행진을 해온 각 학교 학생들을 평양시청 앞 광장에 집합시켜놓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구호들을 선창했다. 그래도 親蘇 공산구호에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간부가 ‘조선자주독립만세’를 선창했는데 이때는 모든 학생들이 시청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으로 ‘조선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공산당은 각 학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범학교의 경우는 여름방학이 끝나자 강동군 보안서장을 하던 자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낯선 전입생이 늘어나더니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民靑’(민주청년동맹)이 침투해 왔다.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에 걸쳐 각 학교들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없어지는 학생들이 생기게 되었다. 각 학교들에는 학생들의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이 있기 마련인데 反共反蘇(반공반소) 사상 경향인 서클을 탐색해서 소리 없이 한밤 중에 잡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反共反蘇사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행동이나 표현도 하지 않은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 한밤중에 집단체포해, 소련군 軍犯(군범)재판에 넘겨 시베리아로 끌어간다.


나의 경우는 ‘희망단’이라는 이름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10여 명 회원이 모두 反共反蘇 행동을 한 바 없고, 단지 공산당 때문에 세상이 어렵게 되고 있지만 희망을 갖고 살자는 취지일 뿐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안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등교를 해서 모임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큰일 난 사건을 직감하고 담임선생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알리고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누님이 골목 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 ‘어젯밤에 너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나갔던 것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한 회원 집에서 소련군 통역관을 통해 알아본 즉 체포된 회원 모두가 ‘反動罪(반동죄)’로 7~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나는 생각 끝에 시골에 있는 내 유모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


38선을 넘다



출신 성분에서부터 성장과정을 면밀히 조사하는 思想검열에 ‘김집’을 ‘김원휘’로 위장한 내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조심스럽게 학교에 나갔더니 학생과에 근무하는 내 친척이 다가와서 ‘보안부에서 네 일건서류를 갖고 갔다. 뛰라’고 했다. 이제는 38선 以南(이남)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급히 아버지를 찾아가 이남으로 넘어가자고 말씀드렸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아버지는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니냐? 日帝 36년도 견뎠는데 참아 보자꾸나…’고 하셨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너는 잡히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본가집 친척이 초년 과부로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았는데, 광성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그 아들이 한밤 중에 잡혀가 시베리아로 끌려간 사실도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38선 안내비 등 급히 旅費(여비)를 마련해 주셔서 8월 한여름 밤에 38선을 넘었다. 그날은 황해도 청단의 장날이었는데 ‘가거라 38선’ 노래가 구슬프게 반복되고 있었다.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4174&C_CC=AP









.........................................................................................................................


당 간부들은 물론 주민들 모두가 김정일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고 김일성·김정일 사진만 보아도 감격에 겨워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 조선왕조 시대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집단 같기도 하다.

............................................................................................................................






..............................................................................................................................


실제로 북조선 인민들은 김씨왕조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북조선 인민들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김씨왕조의 초상화나 동상이 나타나면 조건반사적으로 긴장하고 신에 대한 경건심으로 맞이하는 습성이 익혀져 있습니다.


김씨왕조의 모습만 보면 무조건 경배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인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인민들은 김씨왕조 앞에서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모든 생각이 정지되고 마는 것입니다.

...........................................................................................................................







*

...............................................................................................................................


이씨는 또 공군사관학교에 들러 역대 공사교장들의 사진을 진열해둔것을 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외의 다른 사람 사진진열은 상상할수도 없다"고 말했다.

...........................................................................................................................





2003.8.28.


[ ...... 영정 사진을 모시듯 받쳐들고 울면서 다시 버스에 올랐다 ........ ]



北응원단 "장군님 사진을 비 맞히다니…"


예천~대구서 플래카드 회수소동
사진 위로 접어 마치 영정모시듯



대구=금원섭기자

2003.08.28




북한 응원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플래카드가 비에 젖은 채 도로변 가로수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 “장군님 사진을 이런 곳에 둘 수 있느냐”며 울면서 플래카드를 걷어 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28일 오후 1시40분쯤 북한 응원단 150여명은 경북 예천군 진호국제양궁장에서 응원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대구로 출발하던 중 양궁장 입구 등에서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든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플래카드에는 사진과 함께 ‘북녘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예천 농민회)라는 등의 환영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곳에는 지난 22일부터 세로 90㎝, 가로 6m 크기의 플래카드 14장이 도로변 가로수 2m 높이에 걸려 있었다.


버스 6대에 나눠탄 북한 응원단은 플래카드를 보고 일단 지나갔다가 갑자기 버스를 세웠으며, 여러 대의 버스에서 30~40명이 내려 300~500m 거리를 되돌아 달려 왔다. 이들은 “장군님 사진 위에 검인을 찍어놓다니 이럴 수 있느냐” “장군님 사진을 어떻게 이토록 비바람 속에 놔둘 수 있느냐” “장군님 사진을 왜 이렇게 낮게 걸어 놓았느냐”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들은 이어 서로 몸을 밀어올려 플래카드가 걸려 있던 가로수에 기어 올라가 노끈으로 묶여 있던 플래카드 4개를 걷어냈다. 이들 중 일부는 김 위원장의 사진 부분이 앞으로 오게 플래카드를 접어 마치 영정 사진을 모시듯 받쳐들고 울면서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현장을 취재하던 경북매일신문 정후섭 기자가 북한 응원단 10여명에게 카메라를 빼앗겼다.


경찰 관계자는 “북한 응원단원 중 일부는 마치 남편 잃은 여자가 상갓집에서 오열하는 것처럼 큰소리로 울며 버스에 올랐다”며 “주변에서 지켜보는 주민들이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 2001


.................................................................................................................................


“우리 김정일 위원장님이 비를 맞고 계신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겠다”.


2001년4월20일 서울에 온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한 단원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가 비를 맞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








2006.2.



“北 미녀응원단 수용소 끌려갔다”

“南서 보고 들은것 발설” 탈북자들 잇달아 증언




........................................................................................................


남북한이 함께 출전한 국제 체육행사 때 남한을 방문했던 북한의 미녀응원단<사진> 일부가 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지구의 대흥수용소에서 풀려나 최근 중국으로 탈북한 이명호(가명)씨는 “작년 11월쯤 수용소에 21명의 젊은 여자들이 수감됐다”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남한에 응원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현지에서 들은 얘기로는 이들이 남조선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어겼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넘었다는 다른 탈북자는 “미녀응원단은 출신성분이 좋은 대학생이나 선전대, 음악대학 학생들로 구성됐다”면서 “이들은 남한으로 떠나기 전에 국가안전보위부에 서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용은 ‘적지(남조선을 적들의 지역이라고 부름)에 가면 장군님의 전사답게 싸운다’ ‘돌아와서는 남조선에서 보고들은 것을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라고 한다.

...........................................................................................................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602/200602160463.html








......................................................................................................................................


성혜랑의 책 "등나무집"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망명객이면서도 북한 정권에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있는 형제 가족들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특히 김정남) 성혜랑이 김정일 특각에 너무 오래 살아서 북한 인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잘 모르고 있는 대목도 여러군데 눈에 띕니다.


그 책에 보면 수령숭배체제 아래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오는데,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도 나오는 미술사학자이자 문장가로 유명한 김용준 선생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북한에서는 노동신문을 재활용하기 위해 수거할 때 김일성이 나온 사진을 오려내고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집이 썩어 무너지려고 해도 노동신문을 벽지로 쓰지 못합니다. 당에 대한 충실성이 없는 행동이기도 하고 혹시 김정일 사진이라도 거기에 들어있는 날에는.... ㅡ.ㅡ

헌데 김용준이 그걸 잊고 김일성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을 그대로 내놓았다고 비판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그 문제로 괴로워하다 김용준은 자살을 합니다.

...................................................................................................................







[신 남북시대] 초상화 교체 배경


[중앙일보] 2001.02.20



"1978년 어느날 저와 함께 일하던 출판사의 한 기자가 사색이 돼 업무를 인계하더라고요. 일곱살난 아들이 집에서 놀다가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초상화 액자를 깨뜨렸다는 거야요. 이 기자는 결국 출당(黜黨)조치를 받고 산골로 추방됐습니다."

한 탈북 여기자의 증언이다.


북한 주민들은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金주석.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닦는 '정성사업' 부터 시작한다.


초상화를 훼손시키면 처벌을 받고, 기관장도 3일 이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문책당할 정도로 엄격하다.

......................................................................

그동안 북한의 신문.방송은 종종 화재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金주석.金위원장의 초상화부터 건져낸 군인이나 주민들을 '수령결사옹위의 표본' 으로 대서특필해 왔다. 이들에게는 영웅 칭호까지 부여한다.

...............................................................................................

http://news.joins.com/article/4040144






[..... 오늘도 아버지 대원수님의 영상을 정중히 모셨다는 기쁨이 가득찼습니다 ....... ]




.......................................................................................................................


첫째, 1학년의 경우69) 제1과에서 제10과까지는 글은 없고 그림만 있다.


그런데 제21과 “정중히 다루어요”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교과 내용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수령님의 영상이 모셔진 신문은 (보)관관리를 특별히 잘하여야 합니다.》(40쪽)



그리고 김일성 영상을 본 어린이가 얼마나 감격하는가를 자세히 보여준 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신문을 다 본 정철이는 아버지대원수님의 사진이 꺽어지지 않게 잘 접은 다음 속지로 감쌌습니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들고 웃방에 올라가 신문함에 정히 보관하였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오늘도 아버지 대원수님의 영상을 정중히 모셨다는 기쁨이 가득찼습니다.(42쪽)



인민학교 1 공산주의 도덕 (평양 : 교육도서출판사, 1995).


...........................

우리는 승냥이 미국놈들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73쪽)

...........................

우리는 남녘땅에 둥지를 틀고앉아서 못된짓을 다하고 있는 양키놈들을 끝없이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히 싸워야 합니다.(87쪽)

...................................................................................................................







2005-11-14



[사설] 주민 목숨보다 수령 초상화가 소중한 北



평안남도 남포시의 한 농촌에서 불이 났다. 퇴근길의 한 광산 지배인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 고(故)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부터 들고 나왔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다시 불 속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를 보고받은 김 위원장은 “온 나라가 알도록 은정 깊은 사랑을 베풀었다”고 북한 노동신문이 12일 보도했다. 사람 목숨이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만도 못한 나라다.

..................................................................................................................







2007


[..... “수령님과 장군님의 초상화를 보위해낸 인민의 모습은 선군시대의 빛나는 화폭” ....... ]




“수해 현장서 ‘장군님 초상화’부터 구해”

北 대남선전선동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26일자 보도


김필재 기자 2007-08-26




북한이 최근 수해 현장에서 김정일의 초상화를 우선적으로 들고 나온 북한 주민들의 ‘엽기적 미담’(?)을 소개하며 ‘수령결사옹위’ 정신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대남 선전선동 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26일 ‘수해지역들에서 펼쳐진 화폭’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평양시 강남군 주민들이 “시시각각 차오르는 물 속에서 하나같이 재산보다 먼저 품고나온 것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님의 초상화였다”면서 이 같이 전했다.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7일 갑자기 내린 폭우로 강남군의 주택 50여 가구가 물에 잠겼는데 이 지역에서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화폭들이 펼쳐졌다”며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성격도 서로 다른 그들이었지만 한 모습으로 초상화부터 들고 대피했다”고 밝혔다.


사이트는 이어 “어찌 이곳 사람들뿐이랴! 온 나라 피해지역의 그 어디를 가보아도 수령결사 옹위는 행동의 구호, 실천의 구호로 우리 인민의 심장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며 “수령님과 장군님의 초상화를 보위해낸 인민의 모습은 선군시대의 빛나는 화폭”이라고 주장했다.


사이트는 또 “수령과 당, 군대와 인민의 일심단결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선군조선의 모습이고 향기”라며 “우리는 선군영장(김정일)의 두리(주위)에 굳게 뭉쳐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반드시 사회주의 부강조국을 일떠(일으켜) 세우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그동안 화재나 수해 현장에서 주민들이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구하는 것을 높이 평가해 왔다. 일례로 지난 2003년에는 아홉 살 난 한 소녀가 불길을 피하지 않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구하려다 숨진 사건을 미담사례로 소개한 바 있다.


당시 평양 미산소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향림양은 지난 2003년 1월 자신의 집에 불이 나자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불 속에 뛰어들어 초상화를 구하다가 희생됐다.


북한 당국은 이 사건과 관련 “화재를 진압한 군인들이 아랫방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의 초상화를 모포에 정히 싸안은 채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면서 “유양은 부모가 직장에 나가고 혼자 있는 속에서 불이 일자 주저함 없이 타래 치는 불속에 뛰어들어 초상화를 구원해 내고 희생됐다”고 전했다.


북한은 “조선 인민의 영도자에 대한 충성심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면서 유양에게 ‘김일성 소년 영예상’을 수여하고, 유양이 다니던 학교 이름을 ’유향림 소학교’로 명명하는 한편 학교에 동상까지 세웠다고 덧붙였다

.....................................................

한편, 김정일 정권은 노동신문으로 담배를 말아 피거나 김일성·김정일 이름이 들어간 물건을 훼손할 경우 살인강도보다 더 무거운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


북 “김정일 초상화 못구했으니 화재 복구 못해줘”


2009년 07월 30일



북한 노동당 간부가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태웠다며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지 좋은벗들에 따르면 지난 6월11일, 함경남도 홍원군 남산협동 농장에서 화재가 나 두 세대가 완전히 불에 타버렸다. 불에 탄 세대는 3작업반 농장원 세대로, 5살짜리 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했다. 농장원 정란희(가명, 30대)씨는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집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작년에 분배받았던 식량이 다 타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홍원군 주둔 인민무력부 자동차 양성소 소장이 화재 세대들의 살림 복구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는 “선군정치로 군민관계 미풍을 발휘하여 우리가 화재 난 세대들을 원상태로 해 주겠다”며 지난 6월 25일부터 살림집 복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군당을 비롯한 리당 간부들은 “장군님 초상화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며 군부대의 살림집 복구 지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한 간부는 “초상화만이라도 살렸으면 이 군대의 지원이 칭찬받을 만했는데, 타버렸기 때문에 칭찬거리가 못 된다”며 “초상화를 태워 장군님께 불충불경을 지은 죄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






2012


北청년 불길 속 뛰어든 이유 "초상화 생각에…"

北매체 "수령결사옹위 영웅적 소행"…탈북자들 "정치적 보복에 가식적 충성심"


최송민 기자 | 2012-09-04




북한 노동신문이 4일 화재현장에서 '백두산 3대장군(김일성·김정일·김정숙)' 초상화를 구해낸 일화를 소개했다.


이날 신문은 지난 7월15일 회사작업장에서 철수하던 중 외딴 곳에 위치한 가정집의 화재를 목격하고 창문으로 뛰어들어 초상화를 구해낸 함경북도 나선시에 거주하는 20대 노동자의 인터뷰를 실었다.


이 노동자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백두산 3대장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을게 아닙니까"라고 말했고, 신문은 그를 '수령결사옹위' 정신의 영웅적 소행이라 칭송했다.



신문은 지난 6월에도 함경남도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소녀가 산사태가 일어나자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구해내고 숨진 일을 소개한 바 있다. 북한 당국은 당시 소녀에게 '김정일 소년영예상'을 수여하고 부모와 교원, 해당 소년단책임지도원 등 7명에 대해서도 포상했다.

..........................................................................


이 과정에서 김 씨 일가의 초상화를 먼저 구해내는 주민은 영웅, 사람이나 살림살이를 구해내면 사상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한 탈북자에 따르면 2001년 3월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에서 전기누전으로 단층집 4채가 화재가 발생했는데, 초상화를 구한 두 집은 인민반 차원의 생활용품 지원과 함께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두 집은 도·시·구역 당에 불려 다니며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주됐던 일이 있었다.


여기에 초상화를 구하지 못한 가정은 세대주 뿐 아니라 그 자녀도 이력 문건에 평가가 남아 평생 꼬리표를 붙이고 다녀야 한다.


또 다른 탈북자도 "2009년 살림집 화재에 뒤늦게 달려 온 아버지가 불에 뛰어들어 5살짜리 어린 딸을 구해내면서도 초상화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로 노동당에서 출당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소회했다.

....................................................................................................







2015.8.



“나선서 자식 아닌 ‘金초상화’ 품은 엄마 시신 발견돼”

소식통 “수해 복구 작업서 초상화 품은 시신 다수 나와”




이상용 기자 2015-12-03




올해 8월 함경북도 나선 특별시에서 홍수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수해 발생할 당시 일부 북한 주민이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익사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함경북도 소식통은 3일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10월 말 수해로 실종된 시신 수색 작업 과정에서 발견된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품에 안고 있었다”면서 “이 여성 외에도 비닐로 꽁꽁 싸맨 초상화를 갖고 죽은 주민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어 소식통은 “이후 최초 발견된 이 여성 시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 여성의 아이를 품고 익사한 할머니가 발견됐다”면서 “생사를 오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아이보다 초상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 주변 주민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 당국은 김정은 일가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평생 진행하지만, 당국의 배급과 의료 등의 혜택이 줄어들면서 주민들의 충성심이 약화됐다. 때문에 주민들은 처벌이 두려워 겉으로는 충성심을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소식통의 전언이다.


이에 대해 소식통은 “일반적으로 당국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수령의 권위를 목숨으로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충성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신성시하고 화재나 수해 등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지켜야 한다고 교육시키고, 이를 어길시 인민의 의무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해 처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식통은 “그동안 주민들이 북한 당국의 행태를 지켜봐왔다는 점에서 이 여성은 초상화를 건사하지 못할 경우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면서도 “적은 수가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초상화를 안고 죽었다는 점에서 우상화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고 분석했다.

.................................................................................................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5&num=107412







2016.6.



[ ...... 침몰될 경우에는 수령님의 초상화를 비닐에 꽁꽁 싸서 .......

...... 품속에 안고 바다에 뛰어들라 ......... ]



북, 해상사고 없다더니 웬 어민 표창?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16-06-08


................................................................................................................................

정영: 지난 달 말에 “해상사고 기록이 특별히 없다”고 주장했던 북한이 이번 달 6월 7일에는 ‘70일 전투’기간 강풍 속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선장 등 어민 8명이 배가 침몰하는 위급한 순간에도 ‘수령결사 옹위 정신’으로 초상화를 지키고 숨져 이들에게 높은 국가표창이 수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북한은 지난해에도 북한어선 수십 척이 난파되어 일본 해안까지 떠내려왔을 때도 해상사고 소식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이번에는 수령의 초상화를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사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상 북한 매체의 2중 보도 행태를 뒤집어보겠습니다.

...................................................................................................

정영: 조선중앙통신은7일 “평안남도 수산관리국 가마포 수산사업소 2선단 1728호 선원들에게 국가표창이 수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보도 내용을 들어보면 이 1728호는 어선인데요, 이 배는 지난 3월 9일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가 침몰되는 그 순간에도 이 배의 선장 홍성관을 비롯한 8명의 선원들은 자기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안전하게 모시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겁니다.



최민석: 그러니까, 고기 잡으러 나갔던 배가 풍랑을 만나 가라앉게 되자, 선원들이 자기 목숨보다도 초상화를 안전하게 건사했다는 소린데, 어떻게 안전하게 지켰다는 겁니까?

정영: 북한에서는 어로공(어민)들에게 이렇게 교양합니다. 만일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거나 사고를 당해 침몰될 경우에는 수령님의 초상화를 비닐에 꽁꽁 싸서 습기가 들지 않게 하고 품속에 안고 바다에 뛰어들라고 교양합니다.



최민석: 그러면 북한에는 작은 배에도 김부자 초상화가 있나요?

정영: 아주 매생이 같은 즉, 유개가 없는 쪽배에는 김부자 초상화를 걸 수 없지요. 하지만, 수십톤급 이상 고깃 배에는 학습장 크기만한 초상화를 겁니다.

북한엔 어딜 가나 김부자 초상화가 있습니다. 가정집은 물론 학교 교실이나 사무실, 배, 갱도 안에도 초상화가 있습니다. 언제나 김부자 만을 바라보면서 충성하라는 소린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초상화 때문에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하는 그야말로 북한의 한 역사입니다.

..........................................................................................................

정영: 북한에서 이렇게 해상사고를 당하면 초상화를 구하라고 교양한 게 1970년대 중반부터인데요, 어느 한 고기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되기 시작할 때 그 배의 선장이 초상화를 품에 안고 무거운 연투를 몸에 매달고 바다에 떨어졌다고 소개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북한당국은 어민들에게 배가 침몰될 때는 김 부자 초상화를 꼭 안고 뛰어들라고 교양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런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겁니다.

.........................................................................................................................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media_in_out/fe-jy-06082016120419.html








*

...............................................................................................................................

평양시민을 포함한 북한 전체주민들의 공통점은 수령에 대한 공개비판은 상상도 못하고 노동당 정책을 조금이라도 의심한 자는 무조건 감옥행이다.


그들은 공민의 의무로 자기 집에 걸은 김일성 부자 사진을 아침저녁으로 깨끗이 닦아야 하며 화재로 초상화가 불타면 그에 대한 책임으로 감옥에 가야 한다.

또한 수십 년 전 굴뚝연기가 멎은 공장에서 혁명학습을 매일 같이 한다. 빤히 아는 학습을 반복하여 시키는 이유는 인민들에게 잠시라도 한가한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








[ ......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초상 휘장, ..... 정중히 모시고 다루며 철저히 보위하여야 한다. ........ ]




* [ 누구나 외우고 실천해야 하는 헌법, 당규약 보다 위에 있는 최고절대규범 살인마노예교 10계명 ]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1.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

4) 주체 사상의 위대한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5) 전 세계에서의 주체 사상의 승리를 위하여 끝까지 싸워 나가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심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


3.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은 우리 혁명의 지상의 요구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 의지이다.

.................................

3)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위대성을 내외에 널리 선전하여야 한다.

..................................

5)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비상 사건 화하여 그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


6)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초상 휘장, 수령님의 초상화를 모신 출판물, 수령님을 형상한 미술 작품, 수령님의 현지 교시판, 당의 기본 구호들을 정중히 모시고 다루며 철저히 보위하여야 한다.

..........................................................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하여야 한다.

....................................................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무조건 접수하고 그것을 자로하여 모든것을 재여보며 수령님의 사상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나가야 한다.

.................................................................................................................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100789






* 살인마노예교 10계명과 대한민국 헌법은 양립불능입니다.

소위 주사파는 10대원칙을 잘 압니다. 그래도 "민주화" "진보" 어쩌구합니다.









....................................................................................................


각 가정에서는 설날마다 당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았을 때, 초상 사진 앞에 경례하며 감사를 드린다. 말하자면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매일 사진 앞에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또 모든 사회적 행사에서는 반드시 당 최고의 구호를 외치며 초상 사진 앞에 경배를 함으로서 행사를 시작한다. 대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 만세!” 라는 구호를 정면에 써 붙이고 수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실제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화시키는 구호는 무려 1,20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숭배모임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사상 연구실’에서 주 1회씩 연구모임을 갖는 것이다. 이 모임은 일종의 정기예배와 같다. 이 모임에는 지역 구성원이나 직장 구성원 또는 학교단위 구성원 등이 빠짐없이 참석해야 한다. 이 모임은 절대적 모임이고 성스러운 모임이기 때문에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다.


이 모임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된 말씀을 읽고 그들의 업적, 사상, 전통 등을 다시 교육받는다. 이와 함께 반드시 계급교양을 받는다. ‘계급교양’이란 ‘미 제국주의 원수놈, 남조선 괴뢰도당, 일본놈’ 등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일깨우는 일을 말한다.



이 모임에 올 때는 복장을 단정히 해야 하고 연구실에 입장할 때는 깨끗한 버선을 신고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소(聖所)이기 때문이다.

................................................................................................................................








인민학교 1 공산주의 도덕



[ ....... 오늘도 아버지 대원수님의 영상을 정중히 모셨다는 기쁨이 가득찼습니다. ......... ]



.......................................................................................................


첫째, 1학년의 경우69) 제1과에서 제10과까지는 글은 없고 그림만 있다.


그런데 제21과 “정중히 다루어요”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교과 내용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수령님의 영상이 모셔진 신문은 (보)관관리를 특별히 잘하여야 합니다.》 (40쪽)



그리고 김일성 영상을 본 어린이가 얼마나 감격하는가를 자세히 보여준 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신문을 다 본 정철이는 아버지대원수님의 사진이 꺽어지지 않게 잘 접은 다음 속지로 감쌌습니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들고 웃방에 올라가 신문함에 정히 보관하였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오늘도 아버지 대원수님의 영상을 정중히 모셨다는 기쁨이 가득찼습니다.(42쪽)



인민학교 1 공산주의 도덕 (평양 : 교육도서출판사, 1995).


.............................................................

우리는 승냥이 미국놈들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73쪽)

............................................................

우리는 남녘땅에 둥지를 틀고앉아서 못된짓을 다하고 있는 양키놈들을 끝없이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히 싸워야 합니다.(87쪽)

..................................................................................................






....................................................................................................

이씨는 또 공군사관학교에 들러 역대 공사교장들의 사진을 진열해둔것을 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외의 다른 사람 사진진열은 상상할수도 없다"고 말했다.

.....................................................................................................






.............................................................................................................


우리 사회에서 黨證(당증)이라고 하면 얼마나 값있고 중시하는지를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육체적 생명은 부모가 주고 수령님과 장군님께서는 죽어도 잃지 않는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주시었다는 징표가 바로 당원증이다.


당원증 첫장에는 金日成의 초상화가 박혀 있어 잘못 보관해도 문제시되고 잊어버렸거나 불에 탔을 때는 黜黨(출당), 경우에 따라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후대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조선노동당원의 당증이 .......

.........................................................................................................








...................................................................................................


당 간부들은 물론 주민들 모두가 김정일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고 김일성·김정일 사진만 보아도 감격에 겨워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 조선왕조 시대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집단 같기도 하다.

.........................................................................................................








******


1945.10. 신의주



[ .....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 ]



.......................................................................................................................................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






[ .....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 「레닌」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 ....... ]


[ .....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 ]




...................................................................

▲박선봉(朴善鳳)씨(46)·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기념회부회장·당시 평안중학 졸업반)= 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 「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한데 불만을 품어오던 차에 용암포 사건이 터졌다고 해요。기차 통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시내 6개 중학생 대표들은 제일공업 윤순호(尹淳浩)군 집에서 2、3차례 밀회를 갖고『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읍니다。그때 반공애국청년단체인 「우리청년회」의 유형무형의 지원도 계산했었지요。


22일 동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만난 당시 도 학무국장 함석헌(咸錫憲)씨는 거사의 뜻을 알리자 의로운 일을 억제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미의 말을 해 학생들의 결심을 굳게 해준 일도 있읍니다。


23일이 되어 내가 다니던 평안중학과 상업학교는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기로 돼 11시부터 각기 교정에 모여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의 본부격인 제일공업학교에서 12시에 거사하자는 연락을 받아오던 학생이 중도에 그 무렵 행패가 가장 심했던 특별보안대원을 만나『너 오늘 죽어봐라』며 싸움을 벌이는 통에 늦어 이날 1시경에야 학교문을 나섰읍니다。남신의주의「평중」에서 보안서까지는 약 4㎞나 됐읍니다。


1천여명의 두 줄로 된 학생대열이「공산당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행장 옆을 지나쳤는데 그때 보니까 200m앞 둑 위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고 보안대원들이 공포를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신의주에 못들어 간다고 소리치고 있었읍니다。대치하고 있던 학생들이 몇 개 분대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투석전을 막 벌이는 순간이었읍니다。


그 비행장에서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퍼부었읍니다。그러자 학생들은 도로 옆 논두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읍니다。나도 몸을 피해 벼 낱가리 속에 숨어서보니까「야크」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논바닥에다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









[ .......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 ]



[ .....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 ]


[ ......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 .......

......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 ]


[ ......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 ]




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

金鏶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한편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驛前 광장에서 열려 김일성이 주석단에 등장하여 연설을 시작하자 한 反共청년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김일성은 처단하지 못하고 소련 군인 한 명만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리 없이 끌려간 학생들



4월 초부터 학생들은 동맹휴학에서 벗어나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38선 以南(이남)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시베리아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양 학생들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은 했지만 신의주나 함흥에서처럼 공산당과 싸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야 했겠는가’하고 자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5월1일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되어 街頭(가두)행진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행진하는 평양거리의 요소마다 공산당이 배치한 선동원들이 학생대열을 향하여 親蘇공산구호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묵비권 행진을 하였다.


행사 주최 측은 無言(무언)행진을 해온 각 학교 학생들을 평양시청 앞 광장에 집합시켜놓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구호들을 선창했다. 그래도 親蘇 공산구호에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간부가 ‘조선자주독립만세’를 선창했는데 이때는 모든 학생들이 시청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으로 ‘조선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공산당은 각 학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범학교의 경우는 여름방학이 끝나자 강동군 보안서장을 하던 자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낯선 전입생이 늘어나더니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民靑’(민주청년동맹)이 침투해 왔다.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에 걸쳐 각 학교들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없어지는 학생들이 생기게 되었다. 각 학교들에는 학생들의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이 있기 마련인데 反共反蘇(반공반소) 사상 경향인 서클을 탐색해서 소리 없이 한밤 중에 잡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反共反蘇사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행동이나 표현도 하지 않은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 한밤중에 집단체포해, 소련군 軍犯(군범)재판에 넘겨 시베리아로 끌어간다.


나의 경우는 ‘희망단’이라는 이름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10여 명 회원이 모두 反共反蘇 행동을 한 바 없고, 단지 공산당 때문에 세상이 어렵게 되고 있지만 희망을 갖고 살자는 취지일 뿐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안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등교를 해서 모임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큰일 난 사건을 직감하고 담임선생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알리고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누님이 골목 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 ‘어젯밤에 너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나갔던 것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한 회원 집에서 소련군 통역관을 통해 알아본 즉 체포된 회원 모두가 ‘反動罪(반동죄)’로 7~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나는 생각 끝에 시골에 있는 내 유모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4174&C_CC=AP









1946.4. 평양



[ .....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

....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 ........ ]



[ ......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 ]




3.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 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 『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 『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 『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

.............................................................................................................................









1948.4.13. 김규식



...................................................................

金奎植은 스탈린 肖像畵 떼야 가겠다고



김구는 우유부단한 김규식의 태도도 마뜩지 않았다. 평양에 갔던 두 특사의 보고를 토대로 4월 13일 오후에 경교장에서 열린 대책회의에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6개항의 요구조건을 북한에 제안할 것을 제의했다.



(1)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주는 스탈린 초상화를 제거할 것.

(2)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3) 북한지역에서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남한 대표 200명과 회합할 것.

(4) 북한은 유엔위원단의 최소 1명을 선거 감시를 위하여 초청할 것.

(5) 평양회담에서는 독립 실현의 방법만 토의하고 헌법 채택, 국가 수립, 국기 선정 등을 토의하지 않을 것.

(6) 미소양군의 공동철수에 관한 선전을 중지하고 군대철수에 관한 미소회합을 갖도록 소련에 요구할 것.



김규식은 이 6개항 제의에 북한이 동의한다면 자신은 남북회담에 참석하고 유엔에 남한 단독선거 연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구는 유엔위원단과의 관계를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 김규식은 평양행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3)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李承晩과 金九
98. 單獨政府수립이냐 南北協商이냐







1948.4. 신화당당수 文容彩



[ .....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

.....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 ]



동아일보 1948년 04월 27일


신화당당수 文容彩, 북조선시찰담 피력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난 20일에 서울을 출발한 新化黨 당수 文容彩는 38선 부근 남천에 4일동안 강금당하고 있다가 24일 아침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방문한 기자에게 며칠동안 그가 보고 온 이북의 생생한 소식을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이번 남북회담을 기회로 그 회담광경을 구경할겸 이북의 모든 상황을 좀 살펴보려고 갔는데 회담 구경은커녕 38경계선 부근 남천에서 약 나흘동안이나 감금당하고 말았는데 그들 관헌의 소행으로 미루어 남북회담이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 서울로 돌아왔었다.

........................................................................................

우리는 우리여관이란 숙소에 들어갔는데 감시하는 보초가 총에다 칼을 꽂고 문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변소에 갈 적에도 보초병이 따라 다니니 산보삼아 거리에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속여 잠깐 문밖에 나가 보니 거리는 쓸쓸하고 사람하나 볼 수가 없어 옆집 노인에게 그 연고를 물어보니 요즈음은 금족령이 내려 외출을 못한다고 머리를 쩔쩔 흔들면서 기운없이 대답하였다. 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동족끼리 말 한 마디 못하게 외출을 금지하는 이북 관헌들을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원망하고 분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때쯤 되니 거리에 학생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데 첫째 그 복색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중에는 걸레같은 옷을 감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 남조선 학생들은 아직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일제시대의 천황사진 모시듯 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제시대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었다.

23일 밤에는 평양 중앙민전에서 누가 왔다기에 그이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하던 끝에 실업자는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 실업자가 많다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실업자가 없다는 곳에서 그렇게 실업자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니 우물쭈물 답변을 못하였다.


그리고 그쪽 신문을 몇 가지 주는데 보니 전지면이 백힌듯이 꼭같은 공산주의 선전이고 변화가 없어 싫증이 나서 그래도 남조선의 신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여간에 이북은 말 한마디 자유롭게 못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감옥에 얽매여 있는 듯한 곳이라는 감을 주게 한 것은 아마 나 개인의 감상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948.4.25. 김구



[ ...... “서울에서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가. ........ ]



..................................................................


4월24일 하루는 휴회한 데 이어 4월25일 오전 11시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광장(현재의 김일성광장)에서 연석회의 경축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오후 4시에는 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조선인민위원장이 주최한 경축연회가 열렸다. 평양시민대회는 30만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대규모 행사였다.(중략)


김일성이 주치한 경축연회는 당시 이북 형편으로선 최대 연회였다. 김구와 김규식도 평양시민대회와 경축연회에 참석했다. 김일성과 김구, 김두봉과 김규식이 헤드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경축연회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은 38선을 넘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 대표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축하연설을 했다. 이에 대해 김구·김규식·조소항 등의 답사발언이 있었다. 김일성의 초대연은 거의 7시 무렵까지 계속됐고 공연도 진행됐다.



평양시민대회와 관련해 이 행사에 참석했던 김구가 기자들과 나눈 얘기가 북로당 지도부내에서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북로당은 김구·김규식·조소앙 등 거물 정치인들이 연석회의 행사와 북측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촉각을 세우고 여론 수집을 하고 있었다.(중략)

아무튼 김구는 30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질서정연하게 시민대회를 진항한 데 감탄했다고 하면서, 다만 시민대회에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한 데에는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기자들에게 “서울에서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가. 친소적인 인상이 들어 기분이 언짢다”고 지적했다.

...................................................................
연석회의 사흘째, “김구 도착” 선언에 우레 같은 박수[특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본 남북연석회의(3)

김동원 기자
승인 2018.04.20






1948.4.30.


[ ......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 ]


................................................................


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는 작30일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

문: 남북협상축하대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답: 질서 있게는 보였으나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느꼈다.

.................................................................









[ ......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 ]

[ .....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 ]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

(2) 북한의 인상

................................................

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




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







1950



[ .....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 ]


[ .....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

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
2020-07-20 22:37:57


닉네임 :  비밀번호 :  자동등록방지 :    

총소리 () 2020-07-20 22:38:49



1950



[ .....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 ]


[ .....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

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에도 구석에 포개둔 이불속에 머리만 틀어박고 온몸은 훤히 드러낸 채로 덜덜덜 떠는 데에 똑같았고, 꿩이 그렇다던가,


큰집에선 반대로 옥살이 할아버지가 마당까지 일부러 나와 비행기를 쳐다보며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소리소리 지르셨다. 사랑하는 문태 숙부가 잡혀가 숱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학교에 나가면 친공적 교사들의 지휘통솔 하에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행군하는 것이 다였다. 그 때마다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나는 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이란 김일성 노래와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을 원수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했지만 코쟁이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라 하는 건 더욱 이상했다.

...................................................................................................







----------------------------------------------





2019.10.12.



[ ...... 조국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서는 그의 웃는 얼굴 동영상이 반복됐고 인파 속에서는 그의 얼굴 사진을 박아넣은 ‘조국 수호’ 피켓이 물결쳤다 ....... ]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이틀만에 시효 다한 마지막 ‘조국 수호’ 집회 무엇을 남겼나


[중앙일보] 입력 2019.10.15


.............................................................................

서초동 9차 촛불집회의 한복판에서

...............................................................

그래도 이날의 주인공은 역시 조국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서는 그의 웃는 얼굴 동영상이 반복됐고 인파 속에서는 그의 얼굴 사진을 박아넣은 ‘조국 수호’ 피켓이 물결쳤다. 개그맨 강성범, 서울대 우희종 교수 등이 무대에 서서 조국 수호 연설을 했다. 대검찰청 외벽엔 ‘당신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는 빔 프로젝트가 반복됐다.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팬덤의 향연이었다.



팬덤의 실체는 딱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그의 외모, 따른 하나는 문프(문 대통령) 지지의 연장선이다. SNS에서 숱하게 봤던 ‘전국미남보존협회’ 명의의 ‘힘내라 조국’ 현수막과 깃발이 나부끼는 건 그의 외모에서 기인한다. 그가 뭘 했는지, 또 뭘 할 수 있는지보다 그의 외모에 끌린 팬덤은 증거 인멸 범죄의 피고인인 그의 아내 정경심 교수와 대학·대학원, 의전원까지 모두 가짜 스펙으로 들어간 그의 딸 조민씨로까지 확장됐다.


이날 집회 사회를 맡은 개그맨 노정렬은 검찰의 비공개 소환을 비롯해 조사 시간보다 조서 열람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온갖 특혜를 받은 정 교수를 놓고 거꾸로 “떡검들이 초미세먼지털이식으로 망신주고 인격모독했다”며 “정 교수님 힘내세요 사랑합니다”를 선창했다. 지난 집회 땐 생일날 온 가족이 모여 생일 파티를 못 한 조민씨가 불쌍하다며 생일노래 떼창까지 나왔다고 한다.


기자들이 28세인 조민씨를 밤 10시에 찾아갔다고 인권유린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이 사람들은 불과 3년 전 고작 20살짜리 젊은 여성에게 가해진 온갖 모진 일엔 환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두 돌 안 된 아이와 함께 덴마크에 머물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 얘기다. 그를 좇던 기자는 한밤에 정유라를 발견하자 불법체류로 현지경찰에 고발했고, 불법체류가 아니었던 정씨는 현지 경찰에 구금당한 후 특검의 긴박한 범죄인인도 청구 요구로 감옥에 구금됐다 결국 수개월 만에 수갑을 찬 채 귀국해 포토라인에 섰다. 입시 비리로 이미 고교 졸업 자격까지 박탈된 그에게 당시 특검은 입시비리에 따른 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도 윽박질렀다. 입시 비리의 기획자가 아닌 수혜자라는 점에서 조민씨와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검찰과 언론에서 받은 대우는 이렇게 달랐다. 누구도 인권을 말하지 않았다.

.............................................................

지난 8차 집회엔 서울신문이, 이번 9차 집회는 YTN이 수 시간에 걸친 집회 전 과정을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하고 지상파 KBS·MBC는 물론 친여매체 한겨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언론은 사실상 조국 가족 수사 중단을 위한 촛불집회에 검찰 개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한 왜곡에 가까운 보도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고위 공직자와 그 가족의 비리 의혹, 즉 사실을 보도하는 소수의 언론을 적폐로 몰며 언론개혁을 외쳤다.

.............................................................................

https://news.joins.com/article/23603824






2019.12.7. 민노총 --- 통진당 이석기




[ ..... 민노총 등 56개 단체가 참가 ....... ]


[ ..... 이석기 전 의원의 얼굴 사진이 붙은 하늘색 피켓을 .......

.... "우리가 이석기다!" ....... ]



이석기 사진 들고 북치고 춤추고… 우상숭배 같던 친북집회



조선일보 최원국 기자

2019.12.09



같은색 옷 맞춰입고 靑으로 행진… 피아노·통기타 동원해 공연도

여의도선 "조국 잊지말자" 집회 열고 정경심에 편지 보내기 운동



지난 7일 오후 3시쯤 하늘색 셔츠를 맞춰 입은 군중 수천명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로 춤을 추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왕복 4차선 도로를 가득 채운 대열의 선두에서는 300여명이 드럼을 두드렸고, 수제 타악기도 동원해 흥을 돋웠다. 뒤따르는 군중이 그 장단에 맞춰 군무(群舞)를 펼쳤다. 행사 사회자가 스피커를 통해 "이 (북)소리는 야만을 떨치는 정의의 북소리" "굳게 닫힌 감옥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했다.



마침내 도착한 청와대 사랑채 인근에는 그랜드 피아노 수십 대가 놓여 있었다. 통기타, 하모니카 등 다른 악기도 보였다. 주최 측은 "피아노 50대, 통기타 100대, 하모니카 100대 등으로 구성된 450인 합주단이 이석기 의원 석방을 염원하는 공연을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이 집회는 이석기 전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이 전 의원은 북한과 동조해 국가 기간 시설을 타격하는 방안을 논의한 혐의로 2013년 징역 9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친북(親北), 친문(親文) 단체 주도 집회에서 특정인에 대한 우상화와 종교적인 숭배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날 이석기 석방 집회에는 민노총 등 56개 단체가 참가했다. 오후 2시부터 서울역과 독립문, 을지로, 종로 등에서 단체별로 행진을 시작해 광화문광장에 집결했다. 여러 단체 소속임에도 참가자들은 하늘색 재킷을 맞춰 입고 하늘색 깃발을 흔들었다. 한쪽에서는 수백 명이 이석기 전 의원의 얼굴 사진이 붙은 하늘색 피켓을 들었다. 참가자들은 사회자 지휘에 맞춰 "우리가 이석기다!"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야구장이나 콘서트장에서 응원하는 팀이나 사람의 상징 색깔 옷을 맞춰 입은 팬들의 행동 같았다.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합창하기도 했다.



집회에서는 이 전 의원이 옥중에서 보낸 편지가 낭독됐다. 이 전 의원은 편지에서 "계급의 문제에서 여당과 야당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며 "농지개혁처럼, 자산 재분배 정책과 같은 대담하고 근본적인 발상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집회 참가자가 무대에 올라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을 대통령이, 정부가 나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이 전 의원의 편지에 화답했다.

...................................................................................................







2019.12.7.


[ ...... "이석기를 석방하라" .......

...... 민주노총과 민중당 등 60여개 단체 ... 참석 ....... ]




'피아노·드럼 수백개 두드린' 이석기 석방집회..."굳게 닫힌 감옥문 두드리는 소리"


고성민 기자
이은영 기자
이소연 기자


2019.12.07



"이석기 석방이 正義다" 특사 앞두고 ‘또’ 대규모 집회
피아노·드럼·수제 타악기 수백개 등장…바투카다 연상


주최 측 "굳게 닫힌 감옥문을 두드리는 소리"
옥중서신 보낸 이석기 "조국 사태, 가진 자의 낯을 그대로 봤다"


정부가 연말·연초 특별사면을 검토하자,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지지자들이 또다시 "이석기를 석방하라"며 7일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지난 8·15 광복절 특사를 앞두고 광화문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지 4개월여 만이다.



◇피아노 36대 등 수백대 악기 동원…이석기를 석방하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구명위원회(‘이석기 구명위’)는 이날 오후 4시 청와대 앞에서 ‘12·7 이석기 석방대회’를 열고 이씨 특별사면을 요구했다. 집회에 앞서 오후 2시부터는 ‘이석기 석방이 정의(正義)다’, ‘감옥에서 7년째’라는 문구와 이씨 사진이 인쇄된 손피켓을 들고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로 행진했다. "이석기를 석방하라" "(이석기는) 평화를 말한 사람" 등의 구호를 외쳤다.



청와대 앞엔 그랜드 피아노 36대가 등장했다. 바로 옆 무대 위에선 30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통기타와 우쿨렐레, 하모니카를 들고 합주를 했다. 이들은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를 본 인근 주민은 "남의 집 앞을 다니지도 못하게 다 막아놓고 뭐하는 거냐"며 큰소리로 항의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로 행진하는 동안 30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축제처럼 수백개의 드럼과 타악기를 동원해 바투카다(Batucada) 군무를 펼쳤다. 바투카다는 브라질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추는 춤의 일종이다. 드럼이나 수제(手製) 타악기, 손뼉 등 리듬을 타면서 원형으로 춤을 추는 식이다. 일부 집회 참가자들은 힙합 춤을 추기도 했다. 주최 측은 "야만을 떨치는 정의의 북소리" "굳게 닫힌 감옥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서울역과 서울시청을 지날 때는 인근 보수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보수집회 참가자들은 이석기 집회 참가자들에게 "이석기는 감옥으로" "빨갱이들이 들끓는다"고 소리쳤다.


이날 집회에는 통진당 출신 인사들을 비롯해 민주노총과 민중당 등 60여개 단체 약 1만2000여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했다.




이씨는 내란음모·내란선동·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2013년 구속됐다. 대법원은 이씨가 전쟁 발발 시 지하혁명조직 ‘RO(Revolutionary Organization)’를 통해 북한과 동조해 통신·유류·철도·가스 등 국가 기간 시설을 타격하는 방안을 논의한 혐의(내란선동·국가보안법 위반 등)를 유죄로 확정하고 징역 9년을 선고했다.



◇이석기 옥중서신 공개…"조국 사태, 가진 자의 낯을 그대로 봤다"


이날 집회 연사로 나선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라면 도무지 만들어질 수 없는 사법적 판단에 의해 이석기 의원이 골방에 갇혀 있다"며 "지난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은 현 대통령과 정부가 바로잡아야 한다. 이석기 석방이 곧 촛불 혁명"이라고 했다.


이어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는 "촛불로 들어선 정권이 이다지도 모질 수 있느냐"며 "문재인 정권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느냐"고 주장했다.

......................................................................................................







'감옥에서 7년째! 석방이 정의다! 이석기의원 석방대회'


추광규 기자 | 기사입력 2019/12/07 [10:50]




'이석기 석방 대회’...광화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다!

추광규 기자 2019/12/07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회가 오늘(7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광화문과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다.



'감옥에서 7년째! 석방이 정의다! 이석기의원 석방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날 대회는 60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주관하는 이날 행사는 전국 각지의 2만여 명이 광화문으로 결집해 청와대로 행진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날 대회에서 진행될 대규모 행진에서는 역대 최대규모의 300인 바투카다 대열이 선두에 선다. 또 청와대 앞 마무리 집회에서는 상징 퍼포먼스로 '이석기 의원 석방'을 염원하는 피아노 50대, 통기타 100대, 하모니카 100대, 오카리나 100대, 우쿨렐레 100대로 구성된 450인 합주가 예정되어 있다.



행사의 대미는 이 합주에 맞춰 2만 참가자가 함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합창이 장식할 예정이다.



청와대 앞 집회에서는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태호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이상규 민중당 상임공동대표가 발언하며 이석기 의원 석방을 촉구할 예정이다.



특히, 대회 막바지에는 이석기 전 의원의 옥중 서한을 낭독하는 순서가 예정되어 있다.

...........................................................................

한퍈 이날 공동주최주관하는 69개 단체는 다음과 같다.



공동주관 (13개단체)

: “이석기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원회/ 서울 구명위/인천구명위/경기구명위/강원구명위/충남구명위/대전구명위/전북구명위/광주구명위/전남구명위/제주구명위/울산구명위/ 청년.학생.청소년구명위



공동주최 (56개단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사)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구속노동자후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인권센터/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민중공동행동/

한국진보연대/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국여성연대/한국청년연대/전국빈민연합/빈민해방실천연대/가톨릭농민회/노동인권회관/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주노동자전국회의/국민주권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통일광장/새물약사회/민족문제연구소/사월혁명회/통일의길/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4.27연구원/서울진보연대/경기진보연대/광주진보연대/전남진보연대/대구경북진보연대/부산민중연대/울산진보연대/경남진보연합(준)/

촛불문화연대/노동자연대/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전태일 재단/인권중심“사람”/다산인권센터/인권운동사랑방/민생문제연구소/평화재향군인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천주교인권위원회/천주교수원교구정의평화위원회/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불교인권위원회/실천불교전국승가회/원불교인권위원회/예수살기/주권자전국회의/사회변혁노동자당/민중당(56개단체)


http://lawyersite.co.kr/1442







“감옥에서 7년째, 이석기 의원 석방이 정의다”



추광규 기자 2019/12/08



연말 사면이 큰 폭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정치인들도 상당수가 포함 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7년째 수감중인 이석기 전의원이 포함될지에 관심이 간다.


이런 가운데 7일 오후 3시부터 광화문과 청와대 인근에서 '감옥에서 7년째! 석방이 정의다! 이석기의원 석방대회'가 열렸다.



69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주관하는 이날 행사에 앞서 오후 2시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시민 2만여 명이 광화문광장에 모여 청와대로 행진을 진행하였다. 서울역, 독립문, 을지로, 종로 총 4개 방향에서 출발한 대열은 300인 바투카다(브라질 타악기) 대열을 선두로 서울시내를 행진해 3시에 광화문 광장에 집결하였다.



참가자들은 이석기 의원 얼굴 피켓을 높이 들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석기 의원석방하라", "감옥에서 7년째다, 이석기 의원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광화문 광장을 거쳐 청와대 사랑채 앞에 당도한 참가자들은 4시경 마무리 집회를 진행하였다. 집회에서는 상징 퍼포먼스로 '이석기 의원 석방'을 염원하는 피아노 50대, 통기타 100대, 하모니카 100대, 오카리나 100대, 우쿨렐레 100대로 구성된 450인 합주단의 공연이 펼쳐졌다.



집회에서는 장원섭 통합진보당 전 사무총장이 이석기 의원의 옥중편지를 대독하였다.



이석기 의원은 서한에서 “촛불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민중이 거리에서 찬바람과 맞서야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자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지들이 저의 석방을 외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고 심경을 전했다.



또한 이석기 의원은 “친미냐, 반미냐, 친중이냐 반중이냐는 질문을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서서 우리 민중의 이익을 중심으로 협력하자는 것이 자주”임을 강조하며, “미국이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가 한미동맹의 낡은 틀을 고집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의 이른바 ‘조국 사태’와 관련한 언급도 있었다. 이석기 의원은 “구조적인 불평등, 그러한 불평등의 세습, 그리고 이와 같은 계급의 문제에서 여당과 야당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고 평가하며, “(해방 이후) 농지개혁처럼, 자산재분배 정책과 같은 대담하고 근본적인 발상이 필요합니다. 구조적 불평등, 세습되고 있는 계급관계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지 않고서는 우리는 한 치도 전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주장하였다.



서한 마무리에서 이석기 의원은 “자주 평등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이들이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단결한다면 민중의 새날은 어느새 닥쳐올 것입니다.”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서한 낭독에 이어 각계 인사들이 연단에 올라 석방을 촉구하였다.

............................................................................

이태호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유엔인권선언에는 신념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가 있다. 이것이 인권의 제 1 원칙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이석기 의원을 가두어 둔다면 촛불정신과 민주주의는 제 길을 갈 수 없다."라며 이석기 의원 석방을 촉구하였다.



이상규 민중당 상임공동대표는 “수천 수만의 이석기가 힘차게 뻗어가는 이 행진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민중의 친근한 벗 이석기 의원과 함께 새로운 백년을, 자주의 정치인 이석기 의원과 함께 새로운 천년을 만들어나가자”고 주장하였다.



행사의 대미는 450인 합주에 맞춰 2만 참가자가 함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합창이 장식하였다. 이날 대회에 앞서 10시에는 이석기 의원이 복역하고 있는 대전교도소 앞에서 '감옥에서 7년째다. 이석기의원 석방하라! 대전교도소 결의대회'가 2천여 명 규모로 개최되었다.



한편, 이날 행사에 즈음하여 각계의 이석기 의원 석방 탄원서가 청와대에 전달되었다.



최근 제출된 1차 탄원서에는 김희중 대주교,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오도철 원불교 교정원장 등 주요 종단 지도자와 정강자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공동대표, 김민문정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공동대표, 백미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신철영 경실련 공동대표, 김호철 민변 회장,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자가 이름을 올렸다.

.................................................................................................

http://m.imb.or.kr/a.html?uid=4571







2018.12.8.



[ .....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 “70년 분단의 적폐를 걷어내는 길은 이석기 전 의원과 감옥에 갇혀있는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는 것” .......


...... 이석기 .... “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해 힘을 합치자. ........ ]




“분단적폐 청산의 길은 모든 양심수 석방”

1만여 명 광화문광장서 ‘사법적폐 청산 종전선언 촉구, 이석기 석방대회’



조혜정 기자

2018.12.09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원회’와 56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사법적폐 청산, 종전선언 촉구 이석기 의원 석방대회’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광장에 모인 1만여 참가자들은 “이석기 전 의원은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의 최대 피해자”라며 이석기 전 의원과 양심수의 전원 석방을 촉구했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지난 2013년 이른바 ‘내란선동’ 혐의로 징역 9년을 선고받고 현재 6년째 복역 중이다.


대회에선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방송인이자 시사평론가인 김용민씨 등이 무대에 올라 “70년 분단의 적폐를 걷어내는 길은 이석기 전 의원과 감옥에 갇혀있는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세훈 시인과 가수 안치환씨, 락밴드 타카피도 시낭송과 노래 공연으로 참가자들과 함께 ‘양심수 석방’ 목소리에 힘을 실어 큰 박수를 받았다.



이석기 전 의원은 옥중편지를 보내 참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 전 의원은 편지에서 “광장에 모인 분들이 춥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저의 석방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했다. 이어 “오늘 이렇게 마음을 모아주신 것은 저의 구명만을 위해서가 아닌, 촛불을 들었던 시민으로서 흔들리는 촛불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모이신 것 같다”면서 “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해 힘을 합치자. 우리 한번 잡은 손 놓지 말자”고 힘줘 말했다.


서울진보연대, 서울여성연대(준),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은 이날 ‘석방어묵’이란 이름으로 참가자들에게 따뜻한 어묵탕을 제공해 인기를 끌었다.

...................................................................................................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466


















번호
제 목
작성자
첨부
날짜
조회
118
  친미예속적인 괴뢰정권을 세우고 분단을 영구화시키려는 미제에 반대하는 범민족적인 민족해방투쟁'   625   -   2020-08-17   51
117
  외부의 '비밀 회의체'에서 합의제 형태로 주요 인사가 결정   대한민국농단   -   2020-08-17   60
116
  중국이 향후 수복해야 할 영토로 한반도 전체가 포함 (1)   교과서   -   2020-08-12   58
115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1)   총소리   -   2020-07-20   105
114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해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1)   반공민주건국전쟁공신   -   2020-06-26   100
113
  무노조특구를 만들자 !!!!!!!!!!!!!!!!!!!   노조박멸구국   -   2020-06-10   110
112
  오류정치가 일류경제를 죽입니다.   백년반역타도구국   -   2020-06-10   120
111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기념관이 없다 (1)   정의   -   2020-06-10   106
110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   '나는 공산당이 좋아   -   2020-05-27   127
109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 냅니다   계산   -   2020-05-22   144
108
  親北左派보다 무서운 僞裝右派   결정적인 순간에   -   2020-05-22   142
107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 가능한 많은 의견을 듣는다   박근혜   -   2020-05-16   148
106
  국민발안개헌연대   죽창연방타도구국   -   2020-05-07   164
105
  박정희 3 (1)   박정희   -   2020-05-04   154
104
  박정희 2 (1)   박정희   -   2020-05-04   160
103
  박정희 1 (1)   박정희   -   2020-05-04   145
102
  생활은 유치원부터 군대가 다 같다 (1)   군사독재타도   -   2020-04-27   163
101
  “북의 연방연합제 1단계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다”   죽창연방타도구국   -   2020-04-19   178
100
  개헌저지선(100석)도 위태롭다   구국총궐기   -   2020-04-14   200
99
  죽창연방망국저지 마지막 투쟁기회입니다.   구국총궐기   -   2020-04-11   213
제목 내용 제목+내용 이름
 1 | 2 | 3 | 4 | 5 | 6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전남 나주시 예향로 3803 (이창동) 2층 나주투데이  |  대표전화 : 061)334-1102~3  |  팩스 : 061)334-1104
등록번호 : 전남 다00334   |  발행인 : 윤창화  |  편집인 : 이철웅  |  e-mail : njt2001@hanmail.net
Copyright © 2013 나주투데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