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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3
 닉네임 : 박정희  2020-05-04 07:07:03   조회: 257   
"한국도 해냈듯, 우리도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공익광고가 격찬한 박정희 대통령 '한강의 기적'




 심민현 기자

 2019.03.03




우크라이나 고용연합회, 공익광고 통해 '박정희 리더십'이 만든 한국의 빈곤 탈출과 경제성장 소개

"1960년 대한민국 경제는 절망적 수준...박정희 대통령 등장 이후 불과 10년만에 수출 정상궤도 올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은 진정한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한국도 해냈듯이 우리도 할 수 있다"



김규나 작가, 페이스북에 해당 동영상 공유하며 소회 밝혀

김규나 "이게 진짜 대한민국...본받고 배우겠다며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는 최고의 모범"

"이런 분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게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이분 덕에 등따습고 배부르게 살았다는 걸 그들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 다 깨부수고 있다"




동유럽 개발도상국 우크라이나의 고용연합회가 공익광고를 통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초고속 경제 성장을 소개하며 "한국도 해냈듯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자국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눈길을 끌고 있다.


우크라이나 고용연합회는 44초 분량의 공익광고를 통해 과거 한국의 처절하게 빈곤한 모습의 영상을 보여주며 "1960년 한국의 경제는 절망적인 수준이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전 국민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팔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등장 이후 불과 10년 만에 수출은 정상궤도에 올라섰습니다"라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은 강력한 경제대국이자 세계 6대 수출 강국 그리고 진정한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공익광고는 '박정희 시대' 이전과 현저히 달라진 경제강국 한국의 영상과 함께 "한국도 해냈듯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해답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소설 '트러스트미'와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 이어 최근 신작 소설 '체리 레몬 칵테일'을 출간한 김규나 작가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당 우크라이나 공익광고 동영상을 공유하며 소감을 밝혔다.


김 작가는 "이게 진짜 대한민국이었다"며 "세계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기적. 배 아픔과 부러움의 차원을 넘어 존경하고 본받고 배우겠다며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는 최고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분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게 난 너무너무 자랑스러운데. 이분 덕에 등따습고 배부르게 살았다는 걸 그들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서 하나하나 다 깨부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 작가는 마지막으로 "우리 세대가 무엇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는 잘 봐둬야 한다. 그래야 포스트 코리아에서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내 좌파 세력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폄훼하고 어떻게든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달리 세계 여러 지도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롤모델로 삼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든, 다른 언어로 쓰였든 모두 구해달라. 박정희는 나의 롤모델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故 이슬람 카리모프 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역시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발전 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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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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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김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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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내가 1학년 때인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이 난 다음날, 아침 우리교실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던 일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대통령이었다는 쪽이었고, 나를 비롯한 소수, 거의 3명도 안되었던 우리는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하여 독재정치를 했다는 주장이었다.



교실 안은 목소리가 높아지고 격렬해서 몸싸움이 있을 지경까지 갔다.

싸움 직전까지 갔던 논쟁이 겨우 정리되었는데, 나랑 친한 반장이 일어나서 한마디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찬반 논쟁 다 좋은데 그동안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으니까, 일단 서거하신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 예의로 묵념은 하고, 차차 논쟁을 하자? 일순간 조용해지고, 다함께 반장의 주도로 묵념했다. 묵념으로 교실에 평화가 왔다.



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암살은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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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박정희 대통령



[ ....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 ]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1979.10.31

매일경제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全國(전국)서 총 5백85만명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故(고)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행렬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2천1백59개 분향소에 줄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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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 (내무부집계) ......


.....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 ...... ]





"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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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만명







[ .....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 ]



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1979.11.03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청와대∼중앙청



박대통령, 소나무 울창한 영부인 곁으로|마지막 길에 상복 2백만 명|조포 62발 은은히 말없는 유족행렬



3백여m에 이르는 장의행렬이 이날 상오9시25분 청와대 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연도를 메웠던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구차는 전후 40명씩, 좌우 10명씩의 3군사관생도 1백 명이 앞뒤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에 친족대표 10명·최규하 장의위원장등 추모제에 참석했던 장의위 일행· 친척·청와대비서실·경호실 간부의 순서로 영결식장인 중앙청으로 향했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와대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는 1백 명의 3군 사관생도가 길 양쪽에 앞에총자세로 도열했다. 정문부터 삼청동까지는 비서실·경호실 직원 5백여 명이 검은 옷에 흰 장갑차림으로 서서 떠나는 박대통령을 배웅하며 흐느꼈다.


상오 9시l5분 박대통령의 영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평소 박대통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주방직원·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통곡을 터뜨려 또 한 차례 흐느낌의 파도를 일으켰다.


영구가 청와대 정문을 나서서부터 영결식장에 이르는 동안 박대통령의 나이수대로 62발의 조포가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영구차 앞 영정을 모신 선도차에 탄 친족대표 박재석씨는 시종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연도에서 마지막 배웅을 한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직원들의 슬픔을 더 북받치게 했다.



청와대주변은 이날 아침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고 「아스팔트」위에는 낙엽이 흩날려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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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854









[ ..... 영결식 당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 ]




연합뉴스

장례식 조문 최대 인파는?


기사입력 2009-02-19



김구 200만 훌쩍..박정희는 추산 불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요구된다. 명동성동에 진입하기 위한 조문행렬은 통상 2~3㎞ 정도. 특이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9일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조문 첫 날 1천500명으로 '단출하게' 시작된 조문객 수는 17일 9만6천500명, 18일에는 15만2천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5시간을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야 김 추기경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리에 쥐가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10초라는 짧은 조문시간을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적으로 추앙받았던 다른 저명인사의 장례식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가 몰렸을까.


조계종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큰스님의 영결식(11월10일)에는 10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장례 당일에만 10만여명이 참가한 점에 비춰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에 수십 만명이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례가 끝난 후 3주간에 걸쳐 진행된 사리친견법회 동안 40만명이 다녀갔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해방 이후 100만 이상의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경우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순국한 김구의 장례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영업을 중지했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가득찼다"고 말했다.





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당일(1979년.11월3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됐고, 장례기간이 9일간 지속됐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은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김 연구사는 밝혔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영결식(1974년 8월18일) 때는 빈소가 마련된 청와대에 10만명이 모였다. 육 여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5일장이었다.



아울러 국민장으로 치러진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례식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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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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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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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 .... 노무현...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 김 前대통령...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 박정희 ...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 ]





故 노무현·김대중 前대통령 조문객수 큰 차이, 왜?



충격적인 자살과 고령에 병환··· 서거 원인 큰 영향

전두환· 노태우 前대통령, 국장 또는 국민장 힘들어





장기영 학생기자 | etwannabe@nate.com


2009.08.26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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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가 외치노라 !!!





10월4일, 난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칠것이다.


지금 정권의 대다수들이 과거에 고생? 할 때.

난 수출현장의 최일선인 전자회사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명 공돌이였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 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때 당시 이나라가 어려울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나라 어지럽히고,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영광스런 대한민국, 자랑스런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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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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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당시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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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61121989

[자료]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왜 지금 다시 박정희 인가?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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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을 위해 사치를 배격해야 한다는 신생활 운동을 펼친 학생들은 "커피 한 잔에 피 한 잔", "오늘의 커피는 내일의 독배"라며 커피 과소비가 문제라는 주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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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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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무렵 남대문 시장에서 ‘삼양라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 전중윤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쿠데타정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JP(김종필)를 통해 박정희에게 라면 샘플을 전달하고 라면 제조기 1대를 구입할 돈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는 총 16만 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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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西獨(서독) 광부




[.... 대학 졸업자...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 90 대 1의 경쟁률을 ........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905100062



[그 시절 우리는] 지하 1000m 막장에서 희망을 캔 派獨 광부 이야기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빵 씹으며 하루 종일 노동




⊙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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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은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西獨(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어학연수나 유학이 아닌,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苦學(고학)으로 마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派獨(파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 온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군에서 제대해 서울의 여러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일을 같이 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권형, 나하고 독일 광부로 갈 생각 없소?”

“난 대학도 안 나오고 광부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리고 광산 근무 경력서가 있어야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1963년 12월부터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派獨(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 조건은 ‘35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병역을 필한 광부 경력자’였다. 나 같은 경우 광부 경력이 全無(전무)했지만 한양대생의 도움으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했다. 순수 광부 출신부터 주먹깨나 쓰던 건달, 대학 졸업자(나와 같은 진에도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다), 학교 교사,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지원자들의 경쟁률도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내가 지원한 2진의 경우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치열한 만큼 선발과정도 까다로웠다. 우선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역도, 철봉 턱걸이, 모래주머니 나르기 등의 체력검사를 받았다. 지원자들 중에는 커트라인 체중인 60kg에 맞추기 위해 내의 속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일이 있었고, 자장면이나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있었다. 체력 테스트 다음으로 적성검사, 상식시험, 간단한 영어 테스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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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탄광에 근무하는 한편 기술 훈련을 받는다. 월급은 162달러 50센트(650 마르크), 중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로서 20세 이상 30세 미만〉



지원자 수는 2800명이었는데 1600명이 신체 조건으로 실격했고 나머지 1200명 가운데 약 500명은 광산에 근무성적이 없으면서 허위 경력 증명서를 붙였다 들통이 났다. 대졸 및 고졸 학력자가 태반이었다. 1차 시험을 거쳐 11월 28일에 최종 합격자 367명의 이름이 발표됐다. 신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듯이 사회면에 합격자 이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기양 기자를 선발 두이스부르그에 특파하여 '한국 광부들을 기다리는 서독 광산촌'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들은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의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 부럽지 않는 숙소/ 방마다 독서 장에 오락 시설까지 갖추어/ 돈과 맥주와 아가씨와/ 2주 휴가땐 파리에서 데이트도/ 지하 800m에서 콜라가 수도처럼/ 라인 강변 처녀, 동양 총각 좋아해 /민간 외교 역할, 코리아 자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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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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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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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년 방직공장 여공 평균월급 3천4백40원

1970 한달 급료 1만3백25원, 쌀 3백ℓ




[.... (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쌀 20ℓ 6백37원).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

.... 1970년이 되면서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 쌀 3백ℓ에 ....... ]




[ ....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 ]






수출 전략의 입안자가 쓴 20世紀 한국의 위대한 世代-女工 찬가

『女工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吳源哲




보릿고개


우리나라에는 古來(고래)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릿고개」는 農土(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農家(농가)에서 일어난다. 따로 소득도 없다. 그러니 「보릿고개」의 절박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난한 農家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産母(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된다.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食口(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열 살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딸들인데, 말이 양자이지 대개 식모살이를 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이 「보릿고개」였다. 이런 「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農家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딸이었다. 그 당시 어느 농촌 소녀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소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家事(가사)를 돕다가 15세가 됐다. 동생들은 늘어나고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바늘이 손가락에 박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給食(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필자 注그 당시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 6백g이 1백29원, 연탄 10장 76원, 쌀 20ℓ 6백37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해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19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日給(일급) 4백13원이 됐다.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당시 쌀값이 20ℓ에 6백92원이었으니 쌀 3백ℓ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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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199912100033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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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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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25132&C_CC=BB


이런 교과서로 공부하면 조국을 미워하게 된다
고교 國史 교과서의「대한민국 때리고 金日成 父子 감싸기」

裵振榮(월간조선)
*月刊朝鮮 200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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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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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가면 돈도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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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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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960년대의 여인상(女人像)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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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공의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여인상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여아였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이 아가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돕다가 만 15세가 됐다. 동생들의 수가 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녀인 이 소녀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을 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아가씨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자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뿐이니 기술이 있을 리 없었고,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으니 모두가 낯설고 두려울 뿐이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바늘이 손가락에 박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손재주도 좋았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당시는 토요일도 반나절만 일할 때가 아니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440원이다(註: 1964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600g) 129원, 연탄(10개) 76원, 비누(375g)가 38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 액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을 했다가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모두가 긴요한 물건이었으나 특히「라디오」선물이 한때 대유행을 했다(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이 아가씨는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일급 413원이 됐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급료가 10,325원(413원×25일), 당시 쌀값은 20 리터에 692원이었으니, 한 달 급료는 쌀 300 리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만한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이제 소녀의 나이 21세,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맵시도 좋아졌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어,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도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만 15세 때, 동네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언니 따라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자리는 곧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쯤에는 여성 근로자의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니가 보태준 학비로 중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기술은 없었다. 그래서 급료는 최하급인 일급 245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쳐서 6,125원이었다. 언니의 월급은 10,325원이니 언니가 약 69%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셈이다(註: 70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쌀(20리터)이 692원, 밀가루(22kg 한 포대)가 773원, 쇠고기(600g) 500원, 무(한 관)가 160원, 배추(한 관)가 222원, 마늘(100개)이 720원, 세탁비누(450g)가 4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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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eoi.org/resource/online_view.php





* 여공이 부러움 찬양의 대상이었음은 당시 농촌에 산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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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에 공장이 꽉 들어차 있던 ‘구로공단’에 자주 강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서 올라온 여공들이 합숙을 하면서 한 달에 노임을 6만원을 받는데 자기의 숙식비 등을 지불하며 최저 생활을 하면서 매달 3만원을 시골집에 보내서 남동생이 학비로 쓰게 한다는 근로회관 관장의 말을 듣고 감동을 금치 못했던 옛일이 생각납니다.



그 누나들이, 매우 검소한 나날, 고된 하루를 살면서, 벌어서 보내준 학비로 시골서 동생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러는 대학을 나오고 70년대의 ‘조국 근대화’, ‘한강변의 기적’을 일구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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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nas.net/article/article.asp?idx=48087

대한민국을 버티는 사람들
Written by. 김동길 입력 : 201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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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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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 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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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야간학교도 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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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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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5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

초등학교 5학년 때 탄광 지대로 전학을 갔는데 막장 광부들의 당시 월급이 10만 원이었다. 도시 화이트 칼라 월급의 두 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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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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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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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



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 「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엔統計(통계)는 우리나라의 工業成長率 ......




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1967.04.06 경향신문 5면 사회 기사(뉴스)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저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






1967.12. 엥겔계수 41.5 %


[ .....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 ]


前期比(전기비) 4.3% 增加(증가)

3/4分期家計動向(분기가계동향)



1967.12.14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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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支出内容(지출내용)을 보면 食料品(식료품)비에 지출하는 비율(엥겔係数(계수))이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반면 文化費目(문화비목)인 雜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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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1968.02.16 경향신문 3면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철도청의 일류기술자들을 상대로 각건설회사가 스카웃전을 벌이고 있다. 15일 철도청에 의하면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은 각건설회사...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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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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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 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갖...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企業主(기업주)들은 새로운 經營(경영)모토와 상징을 내...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은...





公務員退職(공무원퇴직) 激增(격증)문제

1968.07.10 경향신문 2면


.... 그중에서도 教育公務員(교육공무원)을 主(주)로하는 文教部(문교부)의 離職者數(이직자수)가 首位(수위)이고 다음은 警察官(경찰관)을 主... 그들의離職(이직)을 막을 道理(도리)가 없겠다는 것을 새삼 느끼 .....






[ ..... 우리도 하면된다. ....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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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60년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후진국이 1차 5개년 계획을 실천에 옮겨서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처음으로 봤던 시기가 아녜요?

또,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60년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요? 흔히 요즘 경제는 발전 시켰는데 정신은 발전이 안됐다, 정신의 개혁과 발전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전? 저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68년도라는 해는 아버지로선 잊을 수 없는 해라고 그러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버지를 비롯해서 처음으로 우리도 하면된다. 우리도 이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라고 보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자신을 얻은걸 바탕으로 해서 70년도에 조국근대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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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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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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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여공들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당시나 지금이나 학력은 신분을 표시한다. 그런데 당시 여공들의 대부분은 가정 형편상 중학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동창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들 중 한 여공(女工)의 이야기.


朴 대통령은 자주 공장시찰을 했다. 하루는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작았다. 먹을 게 귀했던 당시, 시골에서 영양분 섭취를 제대로 했겠는가. 朴 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여공들이 기특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수출을 할 때라, 영어 글씨가 여기저기 있을 때이다. 대통령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통령의 눈시울도 젖었다. 주위 수행자들도 순간적으로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朴 대통령의 의중을 눈치 챈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朴 대통령 "돈이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여공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나 새로 마련된 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교사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많은 사원들이 자진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이들 여공들은 휴가로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 그래서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공장으로 돌아올 때 이들은 자기 고장의 잔디를 한 장씩 떠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학교 마당에 깔았고, 이를 '팔도(註: 팔도강산, 전국을 뜻함) 잔디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과과정(커리큘럼)이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듣고 朴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주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하는 호통이었다.



졸업식 때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재학생도 따라 울었고, 교사도 울었다. 사장도 울었고, 참석한 귀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가 잠시 중단될 때도 있었다. 못 배운 한을 푸는 날.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인가.



여공들은 중학과정을 끝내고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급했고,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생겼다. 이들 대학생에게는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정부나 기업이 여공들에게 베푼「정」이었다. 이「정」이 순수했기 때문에 여공들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고마워했다. 서로가 학우로서 친하게 되니, 협동심도 생기고 단결심도 생겼다. 일의 능률도 올랐다. 이직률도 줄었다. 당시 각 공장에는 월 별로 품목마다 수출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여공들은 이 목표량을 생산하는데 스스로가 노력했다. 목표량이 달성될 때마다 기쁨의 환성을 올렸고 기업주는 이에 보답했다. 모두가 우리나라 경제건설에 앞장서는 개척자였으며, 그들의 목적의식은 뚜렷했다. 그래서 신명나게 일했다.


이런 일을 정치적이나 노동착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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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6-12>를 보면 1966년에서 70년까지 4년간 환율이 14.5% 인상되었는데도 제조업 근로자의 노임은 달러로 따져 평균 222.5%로 인상됐다.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상률은 업종별로 큰 차이가 났다. 인건비가 더 많이 오른 쪽이 근로자를 구하기가 더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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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리나라의 업종별 임금 비교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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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 ]



[ ....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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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의 여성 근로자의 노임 수준을 알아보기로 한다.


1970년 한국정밀기기 센터(註: 전자공업 진흥센터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는 전자공장 유치용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각국의 임금 실태를 조사했다(1970년 8월). 그 결과가 <도표 6-11>이다.



1970년 당시 신규로 채용한 우리나라 여공들의 하루 임금은 245원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의 경우는 343원으로 우리나라보다 40%가 비싸고, 싱가포르는 27%가 높다. 우리나라가 경쟁국보다 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참 여공들의 경우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국은 413원인데, 대만은 418원으로 101%, 싱가포르도 101%이다. 즉, 고참 여공의 경우 우리나라는 대만, 싱가포르와 거의 같은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평균으로 계산하면 대만이나 싱가포르의 노임 수준은 우리나라에 비해 11~16% 정도 높았다. 즉,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970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표 6-11>에서 우리나라 여자 조립공의 노임(日給)은 최하가 245원이고 최고가 413원이다. 그 비율은 100 : 169이다. 이에 비해 대만은 100 : 122, 싱가포르는 100 : 133으로 우리나라보다 노임 격차가 적다. 격차가 크다는 뜻은 경험이 많은 고참 여공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수출이 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신참 노동자는 구할 수가 있어도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변해 버렸다. 그 후부터 「값이 싼 한국 노동자」라는 말은 다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환언하면 「값싼 인력 시대」는 여성 근로자에 관한 한 1964년 중반부터 70년까지 약 7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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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여성근로자의 노임 한계점에 도달
저자 오원철 등록일 2010-11-01







[ ..... 1970년대에 평화시장 ....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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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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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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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간첩 박원식을 추적하던 경찰이 추풍령 산마루 경북 금릉군 봉산면 광천동 일대의 주민동향을 조사했을 때 속칭 돈목 마을 (27 가구) 은 11명의 처녀가 돈벌이를 하러 도시행, 17세가 넘는 처녀는 단 2명 뿐이었다. 속칭 곤천마을(30가구)은 처녀 13명이 모두 외지로 나가 '처녀 없는 마을'이 돼 버렸고 주민들도 "도시에서의 식모살이가 답답한 산골생활보다야 낮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부러워 하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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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2.03.27.






* 1971


[ ......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 ....... ]


1971.1.11. 경향신문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71년의 현장
지도에서만 수도

터져나온 만원 서울 .... 봉천동
빈부격차 두드러지고 도시속성 그대로

도시화과정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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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착민이건 원주민이건 이곳이 농촌이었던 옛날에 비해 현재의 주민들이 결코 못사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예찬론을 펴는 것을 보면 도시에로의 인구집중이 빚어지는 까닭을 알 것 같다.


날품팔이로 하루 5백원꼴을 번다는 박원규 씨(57 봉천동 101)가 "촌에서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것 보다는 지금 생활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게 이를 뒷받침 한다.


충남 예산군 삽교면 두리4구에서 10마지기 밖에 안되는 논과 밭을 경작하면서 머슴을 살았으나 7남매의 끼니 대기조차 힘들었다는 박씨가 무작정 상경한 것은 지난 69년 4월.


20년전에 앓다 죽은 본처의 약값을 대노라 진 1만원의 빚이 3만원으로 불어나자 농토를 처분, 빚을 갚고 나머지 2만원을 갖고 서울에 와 여의도에 움막을 짓고 지게 벌이를 하다 여의도가 개발되며 이 곳으로 옮겨저 8평의 땅을 받고 정착했다는 것.


그 뒤 그 자신은 날품팔이를 하고 큰 딸과 둘째 딸은 공장여공으로 취직하여 세 사람의 총 수입이 월 2만4천은 되므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며 그 나름대로의 도시생활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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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


......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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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여공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서울로, 도시로 떠났어요. 시골에서는 먹고 살 길도 없고 형제들이 많으니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했지요. 도시로 떠난 언니들이 휴가 받아 오면 다들 얼굴이 하얘져서 식구들 선물을 한아름씩 사가지고 오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그라고 왜 여고생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담임도 야간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단 걸 잘 알았죠. 그래도 어린 마음에 막상 진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대신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 합판공장에 취직했어요. 집안을 먹여살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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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 출신 ... 여성들이 ....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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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는 여공의 공장에 대한 동경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 민주노조 여공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하층사회 소녀들이 여공이 되는 것은 농촌탈출이란 소녀들의 적극적 선택과 가족적 요구간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그간 대부분 노동사 서술은 여공의 취직 동기는 가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슬픈 ‘哀史’가 담겨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담론을 재생산해냈다.

이런 담론들은 농촌 출신 혹은 도시 하층사회 출신 여성들이 자신의 자립과 독자적인 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공장을 동경했는지에 대한 익명적 지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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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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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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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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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부잣집 아들의,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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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은 박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 때였죠. 남대문에 코트라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다보면 수출목표액과 달성액이 전광판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출 많이 하면 애국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밤새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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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1972년에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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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9년 ....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 ..... 한국은 13%로 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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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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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6822&C_CC=BB

維新시절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자료
趙甲濟






* 1983.6.2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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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의 한 농촌지방에 들른 신대위는 "한국의 농촌이 이렇게 잘 살고 있는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면서 농민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는 "이런 음식은 북한에서는 당간부들의 연회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또 남이섬에 들른 신대위는 이곳에 가족끼리 나들이 나온 주민들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휴일을 즐기면서도 어떻게 잘살아 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신대위는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를 둘러보고는 "북한에서는 어릴때부터 모든 교육이 전쟁과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로 일관돼있다"고 비난하고 "청소년국방체육을 강화하고 키크기운동까지 시키고 있으며 야구경기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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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 우린 언제 잘 살아봅니까 ?


--- 홍사덕 국회의원




내가 밤새도록 통곡하듯 울었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여동생을 여의었을 때를 빼고도 세 번이다. 그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해외여행도 중 우리나라의 가여운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였고, 장소는 이집트의 카이로 미국의 그랜드정시였다. 그러나 나의 최초의 밤샘 통곡은 아직 대학에 다니던 64년 12월에 있었다. 신문기사 한 줄을 읽고서였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수출입국의 깃발을 걸고 어떻게서든지 농업국가인 이 나라를 공업국가로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을 지으려 해도 기계 사올 돈이 문제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최대의 공장은 요즈음 없어진 충주비료공장과 고 이병철 회장이 세운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외국에 내다 팔 만한 물건을 만드는 공장을 짓자면 다른 건 몰라도 기계는 돈주고 사와야 하는데 달러가 문제였다. 빌려줄 나라나 은행이라곤 없었고 모두가 그저 속만 끓이는 판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정부가 "같은 분단국인 서독에 가서 사정을 하면 돈을 좀 빌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의 서독방문을 결정했다. 64년 12월 7일서부터 12월 15일까지 박정희대통령은 독일 방문길에 나섰다.




나는 대통령의 등정 행색부터가 마음에 걸리고 가슴아팠다. 당시에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하고 kal의 전신이었던 kna의 보유 항공기 가운데서도 그렇게 먼길을 갈 수 있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서독의 민간항공회사인 루프트한자로부터 비행기 한대를 빌려서 태극기를 달고 대통령 일행이 타고 갔다. 그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와 있던 나는 한 줄의 신문기사를 읽고 그 자리에서 얼굴을 파묻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 일행을 맞아 서독의 교민들이 환영회를 열어줬다. 10여명의 유학생과 수백명의 간호원 광부들이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교민 대표로 뽑힌 간호사가 환영사를 읽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환영사의 첫줄을 읽자마자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했고 대통령과 수행원들도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의 환영사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하나의 연상을 했었다. 당시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처에 나가 있는 친척들을 통해 딸아이는 식모살이 그리고 아들같으면 점방의 고용원으로 내보내곤 했다. 월급을 받기 위해 그렇게 내보내는게 아니라 집에 그냥 있을 때보다 양식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생활급을 주는 직장은 삼성물산 한군데뿐이었고 식모나 가게 점원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집안에 무슨 급한 환자가 생기거나 우환이 있게되면 딸자식을 식모살이 보낸 부모가 그 주인집을 찾아가곤 했다. "가을걷이를 하면 갚을 테니까 얼마간만 융통해 달라"는 통사정을 하기 위해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면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기도 했으나 대개는 거절당하는 게 일쑤였다. 그런 때에 식모살이를 하던 딸자식이 모처럼 찾아온 아버지나 어머니를 제방으로 모시고 가서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올리면서 부녀간에 나눈 얘기는 늘 하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


사실 나의 이와 같은 연상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날 대통령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교민 가운데 십수명의 유학생을 뺀 나머지 수백명은 보도된 대로 간호사와 광부였다. 지금의 20대들은 먼 외국땅에 나가 광부 노릇하고 간호사 노릇한 사람들이니까 대략 그런 수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겠지만 그때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정규 4년제 대학을 나온 젊은 청년들이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하기 위해 몇 달씩 삽질과 곡괭이 질을 한 끝에 합격하곤 했다.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문여대를 나온 여성들이 새삼스레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 독일까지 간 것이다. 국내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직장보다 간호사나 광부로 일할 때 받는 월급이 서너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아들,딸들은 독일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기 싫어하는 일거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나라에 돈을 빌리러 간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봅니까?"라고 환영사의 첫마디를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지가 식모살이 하는 딸집에 돈빌러 간 시골의 어느 아버지와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늘 후하게 하는 편이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줄곧 야당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점 하나만 빼고는 늘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그였다 하더라도 64년 12월 그날, 딸같은 아이로부터 "각하, 우리는 언제나 잘 살아 봅니까"라는 말을 들었다면 독하디 독한 공업화의 집념을 평생 떨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준공 이후 한참동안 자동차라곤 그저 10분에 한대 다닐까말까 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기어 이 건설한 집념, 누구도 상대하지 않던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열의, 그리고 공업화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전쟁터건 사막이건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욕심등은 그날의 충격과 집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 1962년 서독 차관 비화



“후손은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게…반드시…“

朴대통령 말에 모두 눈물


[플래시백-되돌아본한국경제] ①1962년 서독 차관 비화

서독 차관 얻으려 광부·간호사 파견





1964년 12월 10일 오전 10시55분, 독일(당시 서독)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500여명의 한국인 광부, 한복차림의 한국인 간호사, 독일인들 앞에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났다. 실내에 애국가가 울려퍼졌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야 박 대통령과 광부, 간호사들의 목멘 소리가 간신히 들렸을 뿐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고문 자격으로 박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白永勳·74·전 중앙대 교수) 박사는 “탄광을 떠나는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뤼브케 대통령이 ‘울지 마십시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룹시다’라고 위로하는 말을 통역하면서 나 역시 울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 1진 600여명이 서독에 처음 도착한 때는 1963년 11월이었다. 이날은 타국생활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머
2020-05-04 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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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2020-05-04 07:08:07

* 1962년 서독 차관 비화



“후손은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게…반드시…“

朴대통령 말에 모두 눈물


[플래시백-되돌아본한국경제] ①1962년 서독 차관 비화

서독 차관 얻으려 광부·간호사 파견





1964년 12월 10일 오전 10시55분, 독일(당시 서독)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500여명의 한국인 광부, 한복차림의 한국인 간호사, 독일인들 앞에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났다. 실내에 애국가가 울려퍼졌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야 박 대통령과 광부, 간호사들의 목멘 소리가 간신히 들렸을 뿐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고문 자격으로 박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白永勳·74·전 중앙대 교수) 박사는 “탄광을 떠나는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뤼브케 대통령이 ‘울지 마십시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룹시다’라고 위로하는 말을 통역하면서 나 역시 울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 1진 600여명이 서독에 처음 도착한 때는 1963년 11월이었다. 이날은 타국생활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머나먼 조국에서 온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 기치를 내걸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지만 극심한 외자(外資)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달려간 곳이 독일이었다. 독일은 당시 우리처럼 분단상황이었고,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린 눈부신 경제발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경제사절단을 독일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간곡히 요청했고, 독일측은 아시아 수출시장을 넓히려는 의도하에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제공을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문제는 과연 지급보증을 누가 서느냐였다.

“당시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아올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방안이 서독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죠.”(백영훈 박사)


결국 이 지급보증 문제는 독일에서 일하는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의 3년간 급여를 독일은행인 ‘코메르츠 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방식으로 해결됐다. 박 대통령이 “타국에 팔려나왔다”고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을 눈물로 위로한 것도, 차관도입을 둘러싼 바로 그 사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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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없어 환자 못받아"…병동 폐쇄까지


2013-07-06


MBC Home > 다시보기 > 뉴스데스크

◀ANC▶

치료 시설은 훌륭한데도 환자를 받을 수 없는 병원이 있습니다. 간호사가 없어서라고 합니다.

지방 병원일수록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죠.

곽승규 기자가 현장 취재했습니다.

◀VCR▶

질좋고 값싼 의료 서비스로 인기 높은 전남 강진의료원.

입원환자만 200명 넘게 몰려 주사실까지 대기 환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SYN▶ 김혜정 간호사
"저희 병원이 병실이 부족해서 입원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8층에 새로 병동을 마련했지만, 병상만 휑하니 놓여 있을 뿐, 환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간호사가 20명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INT▶ 함주호 의사
"너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긴한데 저희 인력이 없다보니까..."



충남의 또다른 병원.

간호사들이 과로로 쓰러지고 일을 그만두면서 닷새 전 입원병동을 폐쇄했습니다.

울산의 한 민간병원은 중환자실 운영을 중단했고, 충남의 한 의료원은 산후조리원을 잠정폐쇄했습니다.


◀SYN▶ 병원관계자
"그렇게 채용공고를 해도 (간호사가) 오질않네요. 그래서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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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육아 부담에다 일까지 힘드니 아예 간호사 일을 그만두거나 근무 환경이 조금 더 나은 서울의 병원으로 떠나면서 지방 병원들은 간호사 부족의 악순환에 시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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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간호사 면허 취득자는 29만여명, 하지만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는 12만 여명으로 채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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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입력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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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8,83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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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귤이 아니라 사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간부들이라고 해서 일반 주민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그들도 굳이 남한과 비교하자면 대망님의 말이 맞습니다.

귤을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김정일과 김용순정도 일것입니다. 아마 김용순도 자기가 먹고싶을때 귤을 먹을 수 있을런지는 잘모르지만...

남한에 와서 사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노가다 하는게 북한에서 장관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아무리 서민이라도 외국에도 마음대로 나가고 하루벌지라도 돈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까...아마 김용순이도 외국가자면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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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6.


[ .....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 ]


1988.7.30. 경향신문



미일중소 4강 한반도인식급변

알게 모르게 교차교류 활발


한국발전모델에 매력
미소 데탕트가 촉진제

남북한의 대화진전 따라 역학구조 큰 변화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소 4개강국의 상호접촉이 최근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아직은 공식화하지 않고 내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으나 지금까지 거의 관계가 두절되어 왔던 양대진영의 교차교류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회에 회담을 제의하고 일본이 북한과의 직접접촉을 꾀하는가 하면 중국과 한국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또 지난달 열린 소련의 전국당협의회에서 한국경제를 배우자는 제안이 나오는등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눈에 띤다.

이같은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양대진영의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가 큰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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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동구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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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Hand in Hand’를 불렀다. 서울올림픽의 주제가는 그들의 혁명가였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삽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바츨라브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민주화된 뒤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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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904&num=335

2009년 겨울호

[특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김주성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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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年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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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뛰고 있을 때 나라를 운영한 세 군인 출신 대통령에게 특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 오늘 만난 한 60대 인사는 “나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굶어죽는 이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의 이렇게 풍요한 생활은 내가 어릴 때 공상속에서도 그리지 못하였던 수준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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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 45.<끝> 시리즈를 마치며


[중앙일보] 1997.12.29




지난 7월10일부터 6개월 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속에 연재돼온 '실록 박정희시대' 가 29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처 못다한 얘기들을 취재기자 방담으로 엮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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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주인공들중 일부는 이미 타계했고 생존자도 거의 70대 이상의 고령이었습니다.

증언을 채취하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 철저한 검증을 통해 박정희시대를 오늘의 시점에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 기획의도였죠. 취재과정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중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정희만큼 논의가치를 지닌 인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역대 대통령중 '공과 (功過) 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박정희'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 그의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치밀한 사후관리,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과 추진력,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끝없는 학습태도 등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 전직 장관은 "박정희를 좋아하는 기자.국민 수가 또 늘어나게 됐다" 고 하더군요. 박정희를 연구하다 보면 모두 그의 매력에 빠진다는 거예요. 하기야 박정희대통령이 기용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박정희를 못잊어 하더군요.


- 인간적 향기 때문이겠지요.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는 증언자들이 숱했고 김두영 (金斗永) 전청와대비서관은 "朴대통령을 모신 것은 가문의 영광" 이라고까지 말하더군요.


- 육사11기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孫永吉) 씨를 보세요. 육참총장감으로 촉망받다 '윤필용사건' 때 버림받아 강제예편은 물론 옥고까지 치렀는데도 “그전까지 각하께서 잘 보살펴주신 것만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는 거예요.


-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은 정작 한국에서 박정희를 소홀히 다루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연구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깊이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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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에 대해 시비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진보를 내세우는 학계나 언론에서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말라" 고 윽박지를 때는 어이없더군요. 사실 취재진은 거의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반독재투쟁에 가담하는 등 굳이 따지자면 반 (反) 박정희 정서를 갖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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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연재기간중 '박정희 신드롬' 은 정말 대단했지요.

- 역사속으로 사라진 박정희가 현실무대로 뚜벅뚜벅 걸어나온 셈입니다.

책이 언제 나오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습니다.
박정희기념관을 세우자는 단체만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경찰이 일부 단체에 대해서는 내사를 벌이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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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후보들 역시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말투.제스처에다 헤어스타일까지 흉내낸 후보도 있었고 아예 "역사는 다시 박정희의 공화당을 부릅니다" 라는 타이틀로 광고를 낸 후보까지 있었습니다.


- 그뿐입니까. 박정희시대 수난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金大中) 후보가 선거운동기간중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고개를 숙일 땐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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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통일문화연구소 김두우 차장, 이동현·정운현·오병상·오영환·정태수·정창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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