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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2
 닉네임 : 박정희  2020-05-04 07:03:38   조회: 160   
1975



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중앙일보] 1975.03.31



월남 제2의 대도시며 북부 지역 최대의 군사 기지인 「다낭」이 공산군에 함락된 최후의 날인 29일 「다낭」 시내는 약탈과 동족 살륙의 생지옥을 연출했으며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사이공=외신 종합>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수송기 타려다 밟혀 죽고…| 바퀴 상자 속에 7명 탑승…기체에 매달려가다 추락도 | 약탈 성행…군단사령관·공군사단장 실종


28일 밤부터 29일 새벽에 걸쳐 공산군의 총 공격 전주곡으로 일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날이 새고 시 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공항에는 수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다낭」의 공항으로 밀어닥친 필사적인 난민 군중 속에선 오직 재빠르고 힘세고 가장 비겁한 수단을 지닌 자만이 최후의 난민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기상에 오르려고 아귀다툼하다가 밟혀 죽었고 7명은 바퀴 상자 속에 들어갔으며 간신히 기체에 매달렸던 사람들도 수백m의 고공에서 비행기의 기대를 움켜쥐었던 손의 힘이 빠지자 해상으로 떨어져 낙엽처럼 사라졌다.



<해상 수송 작전 무위>


「다낭」시 함락 최후의 날인 29일 피난민 공수 작전은 비행기의 부족과 피난민의 폭동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해상 수송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국제 개발처 (AID)는 한번에 1천7백명을 철수시킬 수 있는 「점보·제트」 수송기들을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월드·에어웨이즈」 항공 사장 전용기「보잉」 727 항공기 1대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이 항공기가 착륙하자마자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으며 일부만을 태우고 수많은 난민들을 남겨놓은 채 떠나고 말았다.



<50여명이 밟혀 죽어>


「사이공」으로 피난 온 익명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인은 피난 비행기에 몰려든 인파 속에 항공기계단위에서 밟혀 죽은 사람은 약 50명이나 되며 그 중에는 손에 어린이를 안고 임신까지 한 부인도 끼여있었다고 말했다.


피난 비행기에 채 타지 못한 군복 차림의 한 월남군 대위는 군복을 갈기갈기 찢고 적에 가담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피난민 후송 작전을 담당했던 한 미국 수송기 조종사는 월남군 병사까지 서로 비행기를 타려고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고 전했다.
또 4백명의 정부군이 민간인들을 제쳐놓고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했다.



<먼저 타려 총격전도>



이 수송기에 타지 못한 정부군 낙오병들은 비행기를 향해 발포했으며 수류탄 1발이 주익 밑에서 폭발했다. 조종사는 멀리서 「로키트」 포성이 다가오는 가운데 수송기를 급히 이륙시켰는데 「리엔·후옹」 UPI 사진 기자는 기체에 매달렸던 난민이 고공에서 남지나 해상으로 추락하는 참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다낭」 공항에서 한 정부군 병사가 던진 수류탄으로 한쪽 날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바퀴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조종사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우려고 민간인들이 몰린 곳으로 비행기를 끌고 가려했으나 어느 곳에나 군인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몇몇 군인들은 기관총과 권총을 쏘아댔으나 비행기에는 총알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며 일부는 무기를 내던진 채, 그리고 일부는 수류탄과 기타 무기를 가진 채 비행기로 뛰어들어 왔다.



<정부군 수만명 투항>


월남 정부는 29일 「다낭」시에서 8명의 범법자를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정부의 이 같은 강경책도 무법천지화한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베트콩」 성명은 「다낭」 시내에 갇혔던 수만명의 월남 정부군은 무기를 버리고 「베트콩」에 투항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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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도 최대 불안>


「다낭」 함락이란 비보가 전해진 30일의 「사이공」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했다.
이날이 부활절이라는 사실 외에 「사이공」 시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공포나 불안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군의 남하가 계속되는 한 이곳에도 미구에 전쟁의 공포가 밀어닥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시민들의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국민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한 약 5천명의 「사이공」시민들은 29일 「사이공」시내에서 월맹과 「베트콩」의 무력 공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월남 국기를 흔들며 월맹과 「베트콩」의 「파리」 협정 위반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이 월남에 적절한 전투수단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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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2742







난민에 무차별사격


[중앙일보] 1975.04.01



한편 월남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구 왕도 「우에」시로부터 탈주해온 한 경찰관은 31일 5명의 고위경찰관과 아직도 피 교육중인 1명의 경찰간부 후보생이 경찰서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다낭」시로 가는 어선을 타려고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해안선을 따라 수천 구의 군인 및 민간인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경찰간부 공개처형 | 「후에」시 점령한 공산군



「다낭」시에 입성한 공산군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으며 그가 탄 연락선은 「모터」가 불붙은 속에서도 무사히 소개선에 도착. 소개선 편으로 지난달 30일 「사이공」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했다. .





「사이공」의 명운


[중앙일보] 1975.04.02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바로 같은 날 「사이공」의 주 방어선인 「나트랑」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2일 전에는 「다낭」이 함락되었다. 「사이공」은 완전히 풍전의 등화처럼 시각을 다툴 만큼 명운이 급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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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티우」대통령에게는 꿈결같기만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된 것은 73년 1월 27일.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월남군의 전력이 그토록이나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가 완전히 「스탬피드」현상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월남의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 난중으로 변했고, 지휘관들은 탈출에만 능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군중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나보다.



이를 또 공산 측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도 같다. 공산 측에서는 점령지구 주민들을 자기네 편에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부측에 피난시켰다.


이리하여 생긴 1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은 정부의 행정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산 측은 「크메르」에서도 이런 전술을 썼다. 그리고 일견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도인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은 2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식량보급에 실패한 것이 「론·놀」정부를 자멸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월남 수도는 미군의 출동만이 유일한 구제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대 출동권을 크게 제한 받고 있는 「포드」 대통령으로서는 월남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협상의 마지막 기회도 이제는 잃은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 「사이공」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공산 측은 「티우」정권의 내부 붕괴를 기다리는 재미(?)만이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https://news.joins.com/article/1402895






사이공 최후의 목격자 | 한국인 74명 「괌」 도착


[중앙일보] 1975.05.06



월남 최후의 날 「사이공」을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74명(확인된 사람) 은 기아와 폭서 속에서 남지나해의 거센 풍랑을 뚫고 6일만의 긴 항해 끝에 「필리핀」의 「수빅」만에 도착했다가 비행기편으로 5일 「괌」도에 도착, 급조된 수용소에 입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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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주월 대사 등 공관 직원들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날인 29일 상오 10시 미 대사관으로부터 즉시 철수할 것을 연락 받고 집결지 미군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아파트」 경비병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김 대사를 비롯한 이들은 할 수 없이 다시 제2집결지인 미 대사관 「게이트」 25로 뛰어야 했다. 미 대사관 주변은 탈출하려는 인파로 들끓어 철수 난민이 들어설 틈도 없을 만큼 탈출자들이 숲을 이루었다.


<집결지에 못 들어가>


김 대사와 이상훈 참사관은 대사관 본관으로 들어가 보니 해군 연락 장교 이문학 해군 중령(38) 등이 이곳에서 철수 「헬」기를 기다렸다.
미 해병대 경비병들은 개미떼처럼 밀려 닥친 월남인과 외국인들에게 질서를 잡기 위해 공포를 쏘아 댔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이 중령 일행은 침착히 「헬」기를 기다렸고 「게이트」 25에 들어서지 못한 한국인 40여 명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탈출의 길을 찾으려고 아우성쳤다.


<공포쯤엔 막무가내>


이들이 김 대사의 주선으로 미 대사관 안으로 들어온 후 30일 상오4시쯤 미 「치누크」 「헬」기가 닿아 미 대사관에서 철수가 시작됐다.

질서 있는 철수가 있을 수 없다. 저마다 먼저 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이따금 미 해병대 경비병들이 공포를 쏘며 질서 유지에 안간힘을 썼으나 막무가내며 미 대사관 뒤뜰은 혼란 그것이었다.


이 중령은 자신이 어떻게 「헬」기 안에 들어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필사의 탈출에 몸부림치는 인파에 저절로 밀려 「헬」기를 탄 자신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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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5775








1975.4.30.


[ .....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 ........

.....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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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 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 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 1일,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사)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서)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 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 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자립)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駐韓미군 철수에 관한 朴 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駐韓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 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朴 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 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 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 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공언)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 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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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秘話/미국은 박정희의 核개발을 이렇게 좌절시켰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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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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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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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日記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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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간 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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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1970


[ .....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사력 비교(Military Balance)를 3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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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970년 11월 2일에 개최된 제5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당의 4대 군사방침이 훌륭히 관철된 결과 인민군대는 강력한 공격수단과 방위수단을 다 갖춘 불패의 혁명무력으로 되었다. 전체 인민이 다 총을 쏠 줄 알며, 총을 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지역에 방위시설이 구축되었고 주요 시설이 요새화 되었으며, 소총은 물론 다른 여러 가지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까지 만들 수 있는 자립적 군수공업기지가 건설되었다"고 호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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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는 영국 전략연구소 보고(1970년 9월 14일)에 의한 남북한 군사력 비교이다. 몇 가지 항목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전차(戰車)를 보면 한국군의 주력 탱크는 M-4인데, 이 전차는 2차대전 때 쓰던 구식 병기로서 장착한 포는 76㎜이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T-54, T-55, T-59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100㎜ 포를 장착하고 있으니 한국군의 탱크로는 대적할 수 없다. 전차 대수도 무려 900대나 된다. 화포(火砲)에 있어서도 북한은 대공포 1,500문, 화포 6천 문으로 한국군을 압도하고 있다. 전투기에서는 남한이 200기를 보유한 데 비해, 북한에는 최신예기인 MIG21 90기를 포함, 총 580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인 전략 평론가는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사력 비교(Military Balance)를 3 : 1 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꼭 같다. 한국전쟁 때 남한은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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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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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1월 11일에 있었던 연두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과 관련, 미국 대신 일본을 반공 대역(反共 代役)으로 내세우자는 논의도 있는데, 만약 일본의 이런 역할이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일환으로 제기된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에 의한 극동지구의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의 역할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애그뉴 부통령은 美 7사단의 철수는 1971년 6월 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미군은 계획보다 3개월을 앞당겨 71년 3월 27일 부랴부랴 한국을 떠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닉슨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온 신경을 쓴 나머지 제7사단 철수를 강행했으며, 철수 시기도 앞당긴 것이었다. 닉슨으로서는 약소국인 한국에 대한 고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고별식에서 美 제 7사단을 부대 표창하고 사단장에게 보국훈장 국선장(保國勳章 國仙章)을 수여했으며, 특히 6·25 전쟁 중의 무공과 희생에 대하여 치하와 애도를 표했다. 美 제7사단 2만 2천 명이 철수하자 서부전선에서 약 18마일에 대한 제1선의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주한 美 제2사단은 이 임무를 한국군에 인계하고 제7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155마일 휴전선 전체의 방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김일성이 휴전 후 18년간을 자나깨나 바라던 주한미군 철수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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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美 7사단뿐만 아니라 앞으로 5∼6년 사이에 모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이 추진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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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완전철수가 앞으로 5∼6년 후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해이며,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2∼3년 사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국군의 현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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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0).htm






한국 미사일 개발의 산 증인 구상회 박사 회고(1)

박대통령 자리까지 날아온 탱크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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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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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2/nd99020340.html







1971.11.10. 경제제2비서실 수석비서관 오원철


[ .....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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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돈이 제일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여 유사시에는 민수부문의 전용으로 병기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석이조의 신전략에 찬성, 결단을 내리면서 관계부처와 협조해서 우리들 안대로 진행토록 지시했다.


나와 吳 차관보는 서재를 물러 나왔는데 박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급히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방위산업 육성은 물론 그 기본인 중화학공업 건설도 박 대통령이 몸소 챙겨야겠다면서 참모진으로서 오원철씨를 청와대비서실에 근무케 하라는 분부였다. 나는 경제제2비서실을 신설하여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에 임명할 것을 건의, 오원철씨는 그 다음날 정식발령을 받고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71년 11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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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22).htm






1971.11.11. "번개사업"


[ ...... 총포.탄약 등 ...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 .......

.....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 ........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집념



1. 군장비 국산화 작전 "번개사업"


71년 11월 11일 청와대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ADD)로 밀명이 떨어졌다.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 장비를 앞으로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는 황당한 지시였다. 이 명령은 "번개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금속,기계,전기,전자,화공학 등 무기 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 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한 당시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국산 기관총이나 박격포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같은 무리한 작전이 감행된 데는 물론 그 이전의 1. 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과 이 해 3월의 주한미군 철수(2만명)가 빚어낸 안보 위기 의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번개 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소장들로 손꼽히던 10여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했다. 후에 품목 변동이 있었지만 우선 소총.수류탄.지뢰 등을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구에 들어갔다. 11개 부문에 책정된 총예산은 겨우 9백70만원이었다고 한다. "총알이 안 나가도 좋으니 일단 만들어 보라"는 엄명 아래에서였다. 연구 작업의 야전 지휘관은 물론 자타가 공인한 "맹장 오원철 수석"이었다. 당시 연구 작업에 참여 했던 과학자들은 지금도 한결같이 "그때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뒤에는 반드시 "요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사심없이 일에 몰두한 사연들을 더도 말고 사실 그대로만 전해달라" 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해 연말의 성탄절은 물론 신.구정 때도 집에 들르지 못했고 연구실의 전등은 24시간 밝혀져 있었다. 사업 하나하나가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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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주 국방 계획사업


당시 왜 이런 무리한 일들이 감행됐을까? 당시 우리의 탄약 비축량은 전쟁이 터지면 불과 10여 일밖에 지탱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개인화기의 주종이던 M1 소총도 미국이 생산을 중단하는 바람에 부품 공급이 끊겨 절반 가량만이 반자동 사격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발 사격 기능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0개 사단 병력의 예비군도 장비는 2개 사단분밖에 없었다. 거기다 북한군은 병력을 휴전선쪽으로 자꾸 전진 배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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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박정희의 야심찬 구상이 미국 유학을 거친 이들을 주축으로 한 젊은 과학자들의 정열과 맞물려 밤낮없는 연구.개발 작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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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예산은 방위산업에 20억원, 기계공업 육성에 10억원이 잡혀 있었다.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 1백원일때로, 50원짜리 동전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이 화제가 될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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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국과연으로 오수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제품으로 즉시 사격시험을 하라는 지시였다. 사격시험은 2차 시제품부터 할 것으로 믿고 있던 우리는 이 지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수석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격시험은 1971년도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미군 군사규격의 로켓 포열재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어 강도가 떨어지는 창틀용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시제했기 때문에 사격시 혹시나 폭압을 못 이겨 파열되지는 않을지, 파열된다면 인명 피해는 얼마나 클지 등등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전차 로켓탄은 위력이 큰 병기인데다 규격 재료를 쓰지 않은 시제포여서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안전 대책을 취해야 했다. 로켓포 주위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방호벽을 만들고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장치를 포에서 분리해 2m 길이의 전선으로 연결한 후 포와 사수 사이에도 모래가마니를 쌓았다. 참관인들은 로켓 발사시 뒤로 분사되는 후폭풍(後暴風)을 피해 로켓포 측방 50m 위치에 자리잡게 했다.


발사준비가 완료됐는데도 사격을 위해 차출된 병사가 겁을 먹고 쏘려고 하지 않아 첫 발은 개발 책임자인 내가 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눈을 감고 격발기를 당겼다. 순간 3.5인치 로켓탄은 『꽝』하는 굉음을 내고 날아가 표적에 명중했다. 이 순간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감사 기도가 나왔다. 연구원들과 같이 로켓포를 육안 검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제포 3문에 대한 사격을 연구원들이 차례로 실시했다. 명중률도 높았고 염려했던 포열도 이상이 없었다. 규격 재료만 사용하면 로켓포 국산화는 문제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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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의 극비명령


1971년 12월24일 제1차 번개사업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날 오랜만에 귀가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과 이발소를 찾았다. 번개사업이 시작된 지 한달 반밖에 안 됐는데 마치 수개월이 지난 것 같았다.


월요일 일찍 출근해 2차 번개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있는데, 오수석으로부터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때는 대개 비서관을 통해서 연락했는데 그 날은 오수석이 직접 전화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수석 사무실로 들어가니 공군 작전참모부장인 김중보(金重寶) 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오수석의 표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다. 오수석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각하의 명령을 하달한다. 극비사항이다. 보고 난 후 즉시 파기하라. 오늘 당신들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사전 준비를 위한 것으로 정식 명령은 국방부를 통해 하달될 것이다. 국과연은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즉시 개발계획을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하고, 공군은 유도탄이 개발된 후 작전운영계획을 수립해서 대통령께 보고할 것. 이상』



오수석이 내민 것은 놀랍게도 박대통령의 친필 메모였고, 메모지 서두에는 빨간 잉크로 「極秘」라고 씌어 있었다. 그 내용이 하도 엄청난 것이라 나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메모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도탄 개발지시


극비

⊙ 방침

(1) 독자적 개발체제를 확립함.

(2)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1단계는 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함.

(3) 기술개발을 위하여 국내외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외국 전문가도 초청하며 외국과도 기술 제휴함.


⊙추진계획


(1) 비교적 용이한 것부터 착수한다.

유도탄 사거리 200km 내외의 근거리

(비행거리가 멀면 투자비가 고가, 기술의 고도화를 요하게 됨).

탄두 전략표적 파괴목적으로 파괴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을 유지함.


(2) 유도탄 기술연구반을 ADD(국과연)에 부설하고 공군에 유도탄 전술반을 설치함.

이상.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이 3.5인치 로켓탄도 못 만들어 쩔쩔매던 판국에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그것도 4년 안에 개발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기술수준이 어떤지 대통령이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대통령이 적극 도와준다고 해도 의욕만 갖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수석의 숨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번개사업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은 지나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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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3일


朴대통령은 전해 12월에 만들었던 국산 兵器 시제품의 試射會(시사회)를 참관했다. 이날 시사회는 26사단 지구에서 있었다. 對전차지뢰를 터뜨리는 것을 朴대통령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고물탱크 밑에 파묻어놓은 지뢰가 터지자 불기둥이 쏫았다. 그 순간 내빈석에서 보니 무슨 검은 물체가 '휙'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악'하면서 몸울 움츠렸다. 그 물체는 내빈석을 넘어 멀리 날아가렸다. 모두 '휴'하고 안도하는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당담수석비서관 吳源哲의 발밑으로 '탁'하면서 떨어지는 게 있었다. 쇠조각이었다. 吳수석이 대통령을 보니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파편이 날아온 것을 모르는지 '지뢰란 대단한 것이구만. 砲身이 떨어져 나갔어'라고 했다.


劉載興 국방장관은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순서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통령은 81mm 박격포쪽으로 가서 포신 윗부분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吳수석이 보니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그는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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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5월엔 전방기지에서 대공화기 벌컨포 시험사격이 있었다. 잘 나가던 포가 갑자기 멈췄다. 관계자가 약실(藥室) 뚜껑을 열자 벌겋게 달아오른 포탄 하나가 폭발했다. 떨어져 서있던 이석표 경제2 수석실 비서관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박 대통령이 서울대병원 의사들에게 “반드시 살려내라”고 했지만 그는 1주일 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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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2일 (목)



음력 11월 12일 동지(冬至), 백 억불 수출의 날. 백 억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천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천여만 불이었다. 그후 1964년 11월말에 1억불이 달성되었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 억불 목표를 달성했다. 그 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 억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억불에서 백 억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모든 여건이 우리가 더 불리한 여건 속에 이룩한 성과라는 데서 우리는 크게 자부를 느낀다.



1981년에 가면 2백 억불을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6백 억불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무서운 저력이 이제야 폭발적으로 발산될 때가 왔다.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분발해야 한다. 오늘 이 날은 우리 한국경제사상 길이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수행에 있어서도 길이 부각될 이정표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백 억불,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굳게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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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9.26.


유도탄 개발에의 꿈


유도탄을 자체개발 보유한 7번째 나라




1978년 9월 26일, 이 날은 오원철 수석비서관이 그의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에 기술한 대로 바야흐로 우리 나라가 '미사일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 날, 안흥 종합시험기지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들과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존 배시 주한 유엔사령관 및 국내 보도진 등을 포함 1백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이 날 공개된 국산 유도병기는 모두 우리 과학기술진에 의해서 전 과정이 설계, 제조, 개발된 것으로서 한국형 지대지 장거리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장 로켓, 대전차 로켓 등등이었다.


이 날 시험발사는 대전차 로켓부터 시작했는데 계곡에서 발사된 로켓포는 발사 순간 맞은편 벼랑 및 목표물에 정확하게 꽂혔으며 그 때마다 지각을 찢는 폭음과 함께 바위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다음은 왼쪽 언덕 위의 다연장 로켓이었다. 발사신호가 떨어지자 로켓은 연기를 뿜으며 단숨에 바다를 건너 약 5km 떨어진 무인도 앞바다로 날아가 목표물에 명중되어 불꽃이 피어올랐으며 잠시 후에 폭음이 산울림으로 되돌아왔다. 뒤이어 20__30방의 로켓이 비오듯 날아갔고 목포지점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바뀌었다.


다음 하이라이트인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의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화살 모양의 비행체가 불기둥을 뿜으며 수직으로 솟아오르고 1단계 로켓이 떨어져나간 다음 2단계 로켓이 점화되고 포물선으로 궤도를 잡아 순식간에 시계를 벗어났다. 몇 분 후에 군산 앞바다의 목표물에 명중했다는 신호가 전해졌으며 관람대와 통제소에선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이르는 유도탄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탄을 자체 개발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이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은 우리 나라가 독자적인 무기체제를 이룩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비로소 우리 방위산업이 고도 정밀과학 병기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해 주었다.


특히 1.21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납치, 현충문 폭파 등과 같은 북쪽의 도발이 있을 때 즉각 보복응징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어 북쪽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날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유도무기 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돼 불과 4년 만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관계관들 참관하에 역사적인 시험 발사가 있었다. 1) 대전차 로켓, 2) 다연발 로켓, 3) 중거리 로켓, 4)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 다 성공적이었다.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오원철 수석비서관에게 친필로 지시했던 유도탄 개발


이 날의 시험 발사 성공이 있기까지는 1971년 12월 26일 박 대통령이 오원철 수석 비서관에게 친필로 '유도탄 개발 지시'를 내렸고, 오 수석 비서관은 국방부와 협의한 후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책임하에 국내 관련 전문가들로서 연구계획단을 협의, 편성, 추진키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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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78년 9월 26일 앞서 기술한 대로 박 대통령을 모시고 개발에 성공한 유도탄을 공개 실험 발사했다. 이 유도탄에 사용된 외국제 부품은 유압 장치 한 개 뿐이어서 완전 국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압 장치는 수량이 적어 국산화하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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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朴 두 대통령은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朴正熙(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그의 정치철학을 담은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출간)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경제·정치·사회적으로 균형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연륜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의 심리와 같다.」


그가 직접 쓴 19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建軍 초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 우리들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공산침략자들이 우리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이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평화와 번영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 알거나 또는 절제할 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큰 자유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침략자들은 우리의 내부에 어떠한 헛점이 생기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우리도 남과 같이 달고 맛있는 것은 다 먹고 다 누리려고 한다면, 또 그러면서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세상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朴正熙는 역사의 惡役 자임



이석제(李錫濟) 전 감사원장에 따르면 朴正熙대통령은 金日成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와 승부를 한 번 해보겠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김일성과 맞설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도 강했습니다. 세 金씨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朴正熙는 金日成에 대한 감정을 일기책에서도 원색적으로 나타냈다. 1976년 6월25일의 일기를 본다.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은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시기상조라고 단호히 거부하고 그에 따른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유아독존의 자세를 한 치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북의 金日成과 국내의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면서도 오직 國富증진의 길로 매진하였다.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 金日成은, 확인된 것만 해도 네 번 朴대통령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특공작전을 명령했다. 그의 아내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다. 아내의 죽음은 인간 朴正熙의 내면을 붕괴시면서 그의 지도력에 금이 가게 했고 그의 종말을 단축시켰다.



한편 金日成은 朴正熙를 奮起시킴으로써 한국인의 집단적 신바람을 폭발시켰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열매맺었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시간중 50∼60%를 안보에, 30%쯤을 경제에, 10%쯤을 국내정치·사회문제에 배분하였다. 경제정책도 안보적 발상에서 추진하였다. 농민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자주국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수공장을 만들려고 하다가 그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들어갔다.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만큼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된 것이 행정수도 구상이었다. 안보적 관점에서 출발한 경제정책이 대성공을 이룬 데는 역사의 時運과 함께 朴正熙가 담당한 역사적 惡役의 뒷받침이 있었다.



1972년의 유신선포로 朴대통령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약하고 독재자란 국내외의 비난을 자초하였다. 그 대신 그는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국력을 경제 발전에 집중시켰다. 특히 1973년부터 추진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였다. 1973년과 79년의 두 차례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투자에 국가의 운명을 건 일대 모험을 감행하도록 한 것은 朴正熙의 긴 안목과 역사의지였다. 남덕우(南悳祐)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은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에 도저히 재정적 뒷받침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합디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국민이 이를 따라 주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전쟁도 아니지 않는가.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해주어서 되나」


당시엔 무리로 보였던 게 돌이켜 보면 최고의 기회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계 시장에서 최신 설비를 최저가격으로 도입할 수 있었어요. 다른 나라에선 투자를 엄두도 내지 못할 때이니까요.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지금 수준의 중화학공업을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화학공업은 한국을 차원이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포항제철, 현대중공업·자동차, 삼성전자 등으로 상징되는 세계적 대기업을 가진 한국의 발전 잠재력은 대만·싱가포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사이의 수출부진 속에서도 중화학공업만이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金泳三대통령도 그런 면에선 朴正熙의 덕을 보고 있다. 1980년대의 물가안정(기초소재가 헐값에 공급돼 수출제품의 경쟁력이 높아졌다)은 유신시대에 이루어진 중화학공업 투자 덕분이었다. 朴正熙 자신은 중화학 투자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히려 투자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오르고 이것이 정치불안과 겹쳐 그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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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0. 김대중 대통령후보



[ ...... 향토예비군폐지 ... 노자공동위구성과 소득의 균분 .......

......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미·일·소·중공의 공동보장책 ....... ]



불균형 고쳐 대중시대 구현


[중앙일보] 1970.10.16



신민당의 김대중 대통령후보는 16일 기자회견을 갖고 그가 내세울 정책기조를 밝혔다.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후 처음으로 가진 의견에서 ①각분야의 자율조화 ②향토예비군폐지 ③노자공동위구성과 소득의 균분 ④민족외교를 통한 비정치적인 남북간교류 ⑤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미·일·소·중공의 공동보장책 등을 제시했다.


한국평화 국제보장 요구 | 남북간 비정치 교류 모색·예비군은 폐지 | 김대중 신민 후보 첫 회견


당사에서 있은 회견에는 유진산 당수를 비롯한 많은 간부들이 동석했다.

김후보는 『70년대는 소수가 지배하는 반대중적 현상을 일소해서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를 실현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선거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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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채 교수하고는 같이 좀 했어요. 책 내는 것도 도와줬고. ........ ]



계간지 《역사비평》인터뷰

o 일시 : 2008년 7월 3일 오전 10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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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학계에서 궁금해 하는 것은, 대중경제론이 등장하면서 박정희의 성장지상주의, 혹은 개발독재의 대척점에서 사회경제적인 대안으로 주목을 받았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 당시는 내재적 발전론이나 민족경제론 등이 나오던 때이기도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또 내외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셨고요. 그래서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혹시 젊은 학자들과 한국 경제의 대안 모색을 위한 세미나나 긴밀한 교류를 가지셨던 건 아닌지, 그런 점도 궁금한데요.


김대중 : 박현채 교수하고는 같이 좀 했어요. 책 내는 것도 도와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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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다 ....... ]



1987.8.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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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구조의 식민지적 파행성을 타파하고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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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2. 민통련 통일위원회 '남북한 통일안의 기본틀' 시안


민통련 통일위원회 위원 = 박현채 문익환



[ ....... 국영기업을 주요 축으로 하고 이것에 민족계 자본을 보조 축으로 하는 계획시장의 원리를 혼합한 체계에서 국가계획경제체계로의 점진적 이행. .........


....... 농업의 협동화, 공장기업의 협동조합적 운영 노동자의 자주적 관리 ........ ]



민통련 통일위원회, '남북한 통일안의 기본틀' 시안 마련

기간 1988-12-21 ~ 1988-12-21



1. 통일문제의 기본 전제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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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민주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반민주 반통일적 악법과 기구는 철폐되어야 한다.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을 억압하는 반민주 악법, 국가보안법 등의 반통일적 악법, 그리고 기무사·안기부 등 반민주·반통일적인 기구와 제도는 폐지·해체되어야 한다.


⑤ 통일국가의 완전한 자주성이 쟁취되어야 한다.




2. 정치 쪽에서의 통일에의 접근


① 1민족 2국가 연방제(과도적 방안)

② 통일의회의 설치.




3. 경제 족에서의 통일에의 접근


① 민족경제론적 입장에 선 민족경제 상호간의 통합을 위한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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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혼합경제체제 국영기업을 주요 축으로 하고 이것에 민족계 자본을 보조 축으로 하는 계획시장의 원리를 혼합한 체계에서 국가계획경제체계로의 점진적 이행.


③ 농업의 협동화, 공장기업의 협동조합적 운영 노동자의 자주적 관리 민중의 참여의 폭을 확대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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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북한 통일안의 기본틀`은 `88년 12월 중순 문익환·김낙중·박현채·노중선·김선택 등 민통련 통일위원회 위원들이 1박2일 동안의 토론을 토대로 하여 실무간사 김선택이 작성한 시안이다. 이 시안을 가지고 뒤에 광범한 공개토론을 거쳐 완성하려 했으나 당시 전민련 출범문제와 관련한 민통련 내부사정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http://www.tongilnews.com/pds/pdsView.html?pdsNo=3763&pdsType=5&page=1&startYear=1988






1987.9. 민통련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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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9월 26일 민통련은 ‘범국민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통련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중앙위원회를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한 뒤, ‘김대중선생 단일 후보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김대중 지지활동을 펼쳤다.


노태우 당선 이후에도 민통련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투쟁에 돌입했다. 문익환 의장도 12월 23일부터 무효화투쟁에 전 국민이 참여할 것을 호소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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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61




[ 민통련 -- 노무현 -- 문재인 -- 이해찬 ]



대통령·총리·여당의장 ‘한솥밥’

[ 한겨레 2005-03-28 ]



[한겨레] 민통련 창립 20돌 29일로 창립 20돌이 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 출신 정치권 인사들의 면면에 새삼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 당시 민통련에서 일하며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던 인물들이 20년이 흐른 지금, 정치권을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 임채정 열린우리당 의장 등 당·정·청의 최고 수뇌부가 민통련 출신이다. 이밖에 민통련 출신 여야 의원 20여명이 국회에 포진해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987년께부터 부산민주시민운동협의회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 4층 민통련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당시 조직국장으로 일했던 이명식씨는 “더벅머리에 고집스러운 표정이었고 말수는 적었다”고 노 대통령을 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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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련 출범 당시 서른셋의 ‘청춘’이던 이해찬 총리는 정책실장을 맡아 이미 ‘정책통’으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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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의 문재인 민정수석과 이강철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제도개선비서관, 장준영 시민사회1비서관 등도 산하조직 등에 참여해, ‘민통련 사람’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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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8 김대중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굳건하게 손을 잡고 시민사회단체 등과 손을 잡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 투쟁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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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국면에서도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는 등 정제된 발언에 그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27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이명박 정부가 의도적으로 남북관계를 파탄내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면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굳건하게 손을 잡고 시민사회단체 등과 손을 잡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역주행을 저지하는 투쟁을 한다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등의 고강도 발언을 작심하고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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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64

정치권, 'DJ 소용돌이로' 反이명박 연대 구축되나?
윤태곤 기자
200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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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여 년 만에 2천5백 군데 개인목장을 조성하고 3천만 평 황무지를 우유의 원천인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목초지로 개간 ....... ]




[박정희(朴正熙)]



불굴의 혼

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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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농업에서 낙농으로



1968년 9월 15일 오전 10시 50분,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최규하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공식 및 비공식 수행원 20명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을 출발해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길에 올랐다. 그것은 배달민족 역사 시작 이래로 쌀과 보리를 주종으로 한 곡물농사를 지속해오던 우리나라 농업 패턴에 낙농(酪農)이 접목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박정희는 매년 6월 10일 권농일(勸農日)이 돌아오면 열 일 제치고 김포나 수원 등 서울 근교에 나가 바짓가랑이와 팔소매 걷어 올린 채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하는 것을 그 자신의 연중행사로 삼고 있었다.


1968년 그해 권농일에도 수원에서 모내기 행사를 가졌는데, 박정희는 동행한 이계순 농림부장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장관, 우리 농민들이 못사는 건 쌀과 보리 위주의 곡물농사만을 해왔기 때문이오. 곡물농사는 수해나 가뭄 같은 자연조건에 너무 예민하고 취약해서 문제거든. 쌀과 보리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고 토지 이용을 좀 더 다각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까 목초를 심어서 양이나 젖소를 키우면 사시사철 농한기(農閑期)란 게 없어져 농가소득도 높아지고, 농민들도 우유에다 고기도 먹을 수 있게 되지 않겠소? 엄민영 주일대사가 그러는데, 일본은 쇠고기 소비가 엄청나서 막대한 돈을 주고 호주에서 수입한다는군. 우리가 연간 소 10만 마리만 일본에 수출하면 무역역조(貿易逆調)가 해소된답디다. 한번 연구해보시오.”



일단 마음먹으면 자나 깨나 그 생각에 골몰하는 집념의 화신이 박정희였다. 권농일 석 달 뒤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에 나선 데에는 그런 곡절이 깔려 있었다.


홍콩을 경유하고 6월 16일 오전 10시 호주 페어베인 공군기지에 안착해 3박4일 간의 호주 방문 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고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우리나라 지하수와 목초 개발을 위한 양국 기술협력 문제를 협의한 다음, 이계순 농림부장관과 김용래 축산국장(서울시장 역임)에게 특별지시를 내린다.

“호주에서 가장 젖이 잘 나게 하는 목초 종류가 뭔지, 재배방법이 어떤지 자세히 메모해가지고 그걸 우리나라 토양에서도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연구해보시오.”



박정희가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의 식생활 패턴을 전통적 곡물 위주에서 우유와 육류 등 낙농제품이 소비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선진국형으로 개선하기 위해 축산을 획기적으로 개발하고자 결심을 굳힌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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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가 ‘젖과 꿀이 흐르는’ 목초지로



1968년 9월 19일 오후 3시, 호주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방문국인 뉴질랜드의 오하키 공항에 도착해 폴리트 총독과 홀리오크 수상의 환영을 받았다.

총독관저에다 여장을 푼 박정희는 이튿날 국회의사당 수상실(首相室)에서 홀리오크 수상과 정상회담에 들어갔고, 그 자리에서 양국 정상이 가장 먼저 합의한 사항은 뉴질랜드가 전폭 지원하는 시범목장을 한국에 개설한다는 것이었다.


경기도 평택에 탄생한 시범목장은 한국의 낙농초년생들을 위한 모기지(母基地)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했고, 그곳을 거친 교육생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개인목장을 조성할 때 필수적인 목초지(牧草地) 개간과 관리, 젖소 사육관리 등에 실질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낙농불모의 땅을 낙농 적지(適地)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뉴질랜드는 낙농산업 전반에 걸친 전문가를 한국에 파견해 지속적인 교육지도를 했다.


한뉴 시범목장은 콜롬보 계획(Colombo plan)에 의한 것으로서, 뉴질랜드 정부는 5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기자재와 기술을 한국에 5년간 공여해 낙농초보자들의 자립을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다. 콜롬보 계획이란, 195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영연방국(英聯邦國) 정상들이 모여 아시아 저개발국가에 기술과 자본을 원조하기로 한 결정을 말한다.



한·뉴 시범목장은 같은 무렵 개설한 한·독(韓獨)목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낙농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으며, 한·뉴 시범목장의 후신인 한국낙농(韓國酪農)에 차관(借款)을 제공했던 세계은행(IBRD)은 한국에서의 종합개발사업이 종료된 10년 뒤 발표한 평가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했다.

(……)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한국의 경우처럼 낙농개발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한국의 낙농개발 사업을 모델케이스로 제시하고자 한다.


젖소를 사진이나 그림으로밖에 볼 수 없던 시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차관으로 젖소를 들여온 지 10여 년 만에 2천5백 군데 개인목장을 조성하고 3천만 평 황무지를 우유의 원천인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목초지로 개간했으니, 세계은행 평가단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신선한 우유를 물처럼 흔히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축산개발에 착상(着想)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박정희의 덕이었다.

“박 대통령이 축산에 관해서 어찌나 자세한 질문을 많이 하는지, 대답하느라 아주 혼났다.”

홀리오크 뉴질랜드 수상이 이렇게 토로했을 정도로 박정희는 가는 곳마다 낙농부국(酪農富國)의 강한 의지로 이것저것 질문하고 직접 메모를 했다.



존스턴 목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축사(畜舍)를 캄캄하게 해놓은 채 사료를 먹이는 것을 보고, 박정희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목장 관리인이 대답했다.

“방목하던 소를 수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어둡게 해놓고 사료를 먹여야 소가 다른 데 신경을 덜 써서 살이 많이 오른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 웃었으나, 웃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직 하나 박정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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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43372
2011.04.27 인물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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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해진 혁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1979년 10월26일 저녁 경복궁 앞 국군병원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 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 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 형 대 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 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 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한국의 좌파가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해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한국의 친북좌파들이 따르고 있는 김정일은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 곰발바닥 요리,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아이스크림,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폴레옹 코냑, 비행기로 매일 날라오는 수단 수박, 이탈리아 요리사를 초빙하여 만든 피자를 즐긴다.


누가 민족의 원수이고 누가 민족의 은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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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의 주인공이 자식들을 잘 키우고 과거를 아름답게 회고할 수 있게 만든 사람들은 李承晩(이승만) 세대, 朴正熙(박정희) 세대이다. 이 위대한 세대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중화학공업, 대기업, 중산층, 마이 카, 아파트, 민주와 복지 제도를 70년 만에 건설하는 데 그래도 최소한의 人命희생은 있었다.


주인공의 선배 세대는, 가난과 亡國(망국)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썩은 강물 같은 세상을 삼켜 바다 같은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이 세대의 旗手(기수)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난 괜찮아"라고 내뱉었던 것은,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해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세대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온갖 인간적 비극을 당하고도 의연히 버티면서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잘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희생한 이 세대의 치명적 실수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않아 자녀들이 풍요를 누리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이 근사한 나라가 공짜로 생긴 존재로 알도록 방치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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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


......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

......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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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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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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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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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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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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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14. 경향신문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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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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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 김일성


[ ..... 1,920딸라'나 된다 .......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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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주민들의 삶을 평가하는 경우는 김일성의 연설이나 노작, 당대회의 보고문이나 신문의 사설과 논평 등에서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발표했던 신년사와 김일성 주석 사후의 신년공동사설을 조사해보면 생활수준에 대해 가장 자신있게 언급했던 것은 1980년이었던 것 같다. 1980년 새해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인구 한사람당 국민소득을 딸라로 환산하면 1,920딸라'나 된다며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고 강조했다.



북한 인민들의 생활은 80년대 초부터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80년 이후로 신년사와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물질문화생활'이나 '인민생활' 등의 표현만 나타나고 있다.
2020-05-04 07: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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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2020-05-04 07:04:44

1980.1. 김일성


[ ..... 1,920딸라'나 된다 .......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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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주민들의 삶을 평가하는 경우는 김일성의 연설이나 노작, 당대회의 보고문이나 신문의 사설과 논평 등에서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발표했던 신년사와 김일성 주석 사후의 신년공동사설을 조사해보면 생활수준에 대해 가장 자신있게 언급했던 것은 1980년이었던 것 같다. 1980년 새해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의 인구 한사람당 국민소득을 딸라로 환산하면 1,920딸라'나 된다며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고 강조했다.



북한 인민들의 생활은 80년대 초부터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80년 이후로 신년사와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물질문화생활'이나 '인민생활' 등의 표현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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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 한국 ... 1인당gnp 1천6백7달러 .... 북한 ... 1인당gnp 7백50달러 ........

.... 수출 ...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 .........

..... 한국 ... 93%가 공산품 ....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 ......... ]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경향신문 1983.6.22


수치로 비교해 본 실력
남북한격차 갈수록 벌어져

gnp 4.6(남) 대 1(북)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단연 앞서 ... 발전도 2배격차
중공업분야도 반전 ... 거의 3배차

북한군사비 gnp 24% ... 야욕 못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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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적경쟁을 벌였으나 70년대 중반기부터 남북한간에는 경제적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 규모(81년말 현재)는 한국이 gnp 6백22억달러 ,1인당 gnp 1천6백 7달러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gnp 1백36억달러, 1인당 gnp 7백50달러로 추계됨으로써 북한은 한국에 비해 gnp규모면에서 22%, 1인당gnp면에서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경제총량규모의 현저한 격차는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지속했고 특히 73-74년, 78-79년의 세계적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온 반면 북한은 최근 투자율이 30% 이상의 고율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의 낭비와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의 국면에 빠져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gnp에 대한 군사비부담률은 81년에 한국이 6.3%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23.8%로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수출면에서는 81년 한해 동안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나 되고 있다. 수출주종품목도 한국이 수출품목의 93%가 공산품인데 반해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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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년 ... 북한 주민의 소득이 2천 4백달러 ......

남한 주민의 소득은 1천3백달러에 불과하다고 ....... ]



[ ...... 북한당국은 배급제가 전혀 없다고 주장 .......

..... 외국인들은 배급제가 엄연히 있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물건이 배급 된다고 ......... ]



1989.4.13. 경향신문



평양축전 비식료품 수입
외신이본 북한경제 실상



[ 평양=로이터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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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북한당국은 배급제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은 배급제가 엄연히 있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물건이 배급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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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경제수준차가 통일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명소 부장은 지난 86년을 기준으로 할 때 북한 주민의 소득이 2천 4백달러나 되는 반면 남한 주민의 소득은 1천3백달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우리고유의 경영체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어떤 경영기법을 숭입할 필요가 없다'면서 "지난 40여년간 경제계획에서 실패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 ..... 88년 기준 ....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 ........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 ]



한국 1인 GNP 30위

매일경제 1990.7.17.


한국 1인 GNP 30위
88년 3천600불 ... 국방비율 최고수준
인구증가율 1% 이하

세계은행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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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이 16일 발표한 '세계개발보고 1990'에 따르면 .... 1인당 GNP는 88년 기준으로 스위스가 2만7천5백 달러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일본 2만1천20달러,.....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를 차지했다.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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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박정희를 독재자라 폄훼하는 무식한 자들에게





한국인에게 있어서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30년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30년이었으며, 이 30년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한국인의 위상은 치솟아 올랐다. 1963년 한국의 청소년들은 "헬로우, 헬로우 먹던 것도 좋아요"라는 노래를 불렀을 만치 미국인, 특히 미군 병사들에게서 초콜릿을 얻어먹고 싶어했다. 그 시절 한국의 청소년들은 러시아를 거대한 제국으로 바라보았다. 1992년에 러시아 청소년들은 한국을 잘 사는 나라,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성한 선진국으로 바라보며 선망하였다. 이토록 이 30년 간에 한국인의 위상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한강의 기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30년이었다. 해방 후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은 마샬 플랜으로 전 유럽에 지원한 무상지원의 두배가 넘는 지원을 한국에 해 주었다. 유럽에서의 마샬 플랜이 단기간 지원이었던데 비해 한국국가 재정의 70%를 미국이 부담하는 무상지원이 어느덧 20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서독 등 유럽의 국가들은 빠르게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가고 있던데 비해, 한국 정부는 전혀 경제적 자구책을 세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한 무상지원이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는 없기에 미국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전후 일본은 발빠르게 발전하였는데 한국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만일 한국인 스스로 한국 경제를 일으키지 못하면 미국이 대신 도와주든가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그래서 국제 사회의 경제 전문가들이 한국 상황을 진단한 결과 한국은 일본과 상황이 아주 다름을 발견하였다.



사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 일본과 한국은 빈손에서 일어서야 하는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크게 다른 것이 있었다. 비록 일본은 전쟁에는 패하였으나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에게는 전문적인 과학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더러 전문 기술자도 양성하지 않았다. 여기에 일본과 한국은 기술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었다. 단지, 일본에 자본이 없었는데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가 일어날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한국군에 지원하는 무기 등 군수물자를 미국 본토에서 수송할 수 없으므로 일본에 생산 의뢰를 하였는데, 이 시절에 일본은 경제를 재건할 자본을 마련하였다.



1960년 초의 한국은 기술과 자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원도 없었다. 대부분의 영세 후진국들에는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는 무진장한 지하자원, 천연자원이 있었다. 어떤 나라에는 원유가 있으며,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는 얼마든지 목재 수출을 할 수 있는 삼림자원이 있었다. 한국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식량 자급자족조차 못하는 영세 농업국이었다. 한국에서는 겨우 5백만 명을 위한 쌀 생산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경제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또 한가지 요소는 시장 경험이다. 이것은 수출을 위한 경제적 전략의 문제이다. 그런데, 전혀 수출 경험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수출 노하우가 없었다. 설사 자원과 자본과 기술이 없는 한국에서 생산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여 외화벌이를 할 수 있겠는가? 서구 국가들이 수백 년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시장경제의 노하우를 어떻게 한국인이 단시일 내에 소유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유럽에서의 마샬 플랜의 성과는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럴진대, 밑 빠진 독에 무한정 무상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미국은 한국 경제 지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정부에 미국이 단계적으로 무상지원액을 삭감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완전 중지할 것이라는 통보를 하였다.



그런데, 실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이 한국 국가 예산의 70%를 무상 지원하였어도 GNP가 80불 미만이던 나라가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지된 지 30년 만에 GNP 일 만 불 시대를 여는 국가가 된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와 같은 기적이 없었다. 1950년대에 한국을 원조하였던 방글라데시와 필립핀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 이제는 한국에 하급 노동자로 취업하기 위해 줄은 선다. 한강의 기적 이전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메이드인코리아(Made-in-Korea)가 이제는 뉴욕과 워싱턴 번화가에서 당당히 상표를 내거는 유명 브랜드가 되었으며 오대양 육대주에 한국산 제품이 진출하였다.



이 한강의 기적은 세계 경제학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후진국의 경제 발전에는 별 대책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기술 격차와 시장경험의 격차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과 경쟁한다는 것은 거? 불가능하다. 그래서 후진국은 값싼 원자재를 수출하고, 값비싼 가공품을 수입하는 순환이 영구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데, 내다 팔 원자재마저 없는 한국(South Korea)에서 그 일을 해내었기에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한국의 경제 모델을 배워갔다.



그럼에도 전세계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에 한국인은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많은 한국인들이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을 군사독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정치학적 근거는 박약하다.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1963년부터 1979년까지의 선정이 군사 독재였는가? 아니다. 일부 사이비 민주화운동가들의 감상적 주장과는 달리 정치학적 논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코 군사독재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지 군부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군부 독재설을 주장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자기당착에 빠진다. 제4공화국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권은 군사독재라는 논리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조선왕조는 군사독재 정권이 되어버린다. 태조 이성계는 군부 출신, 즉 고려왕조의 장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최규하 대통령 정권이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한국 사이비 민주화운동가들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군사독재자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본래 영국 왕실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지 16년 장기 집권하였다는 이유로 군부 독재설을 주장하는 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의 목적을 부정하는 자기당착에 빠진다. 민주주의의 목적이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을 몰아내는 것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노무현 같은 독재자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지, 결코 세종대왕 같은 성군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제 개발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16년 혹은 그 이상 장기 집권하였던 예는 수두룩하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 그리고 싱가폴의 리 수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우에는 헌법까지 개정하여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국민 투표로 재출마를 합법화하였으며, 국민이 다시 그를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독재자의 두 가지 특징은 부정 축재와 독재인데, 그 둘 중 어느 것도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 후에 아무 것도 후손에게 남겨줄 것이 없었다. 검소를 몸소 실천하던 그의 집무실에는 에어콘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었으며, 그의 시신을 처음 맞이한 의사들은 헤진 혁대와 낡은 넥타이 핀 때문에 그가 대통령인 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정 축재와 독재, 이 모두는 사이비 민주화운동가 김대중에게서 보여지는 것들이다. 평생 실업자였던 김대중은 재벌 못지 않은 재산가이며, 그는 천하에 둘도 없는 독재자였다. 사소한 일까지도 전문가들의 견해를 충분히 경청한 다음 결정하던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김대중은 국민 허락 없이 10억불을 김정일 호주머니 꽂아주었으며, 국회 동의 없이 6.15 공동선언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결코 군사정권일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는 예산 집행에서도 나타난다. 만일 나라의 경제 자원이 군부로 집중하면 군사독재라는 말에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통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이전에는 국방비가 30%를 넘게 차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일을 제일 먼저 하였던가? 국방비를 20% 이하로, 다시 10% 이하로 낮추면서 상당한 액수의 잉여 국방비가 경제 개발을 위해 전용되게 하였다. 물론,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면서도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국가 보안법이 강화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최선의 정책 그 자체는 결코 군사독재의 요소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16년 간의 선정이 군사독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 노무현처럼 민주주의가 거리 정치인 줄로 착각하는 자들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모르는 자가 민주주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북한 공산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그 후손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말고는 지구상에 없다. 그리고 북한에서 요구하는 체제 보장은 김정일 왕조의 체제 보장을 의미한다. 만일 북한에서 러시아와 동구의 구공산권 국가들처럼 정통 공산주의를 실시하게 할 수만 있다면 북한은 당장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이것은 수천 년간 왕정의 통치를 받던 북한 동포들이 새로운 체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민주주의 발전에도 역사적 경험과 시대 환경의 변수가 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정말로 민주주의를 아는 사람은 하루 아침에 한국에서 완전한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서구에서 수 백 년 간을 걸쳐 점차적으로 발전한 민주주의를 한국에서 단 하루만에 성취할 수 있는가? 아니다. 더욱이, 한국에는 서구와 다른 역사적 환경이 있다. 수백년간 왕정 통치를 받았으며, 왕정 통치말고는 일본 총독부 정치가 전부였다. 민주주의를 배운 적도, 민주주의 철학을 연구한 적도 없었으며, 더더구나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북괴가 호시탐탐 남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남한에는 남로당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며 반란을 일으키던 상황에서 어떻게 완전한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정착될 수 있었단 말인가? 남로당 빨갱이들 같은 거리 정치의 선동가들에게 나라를 내맡기는 것이 민주주의였을까?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테러범들의 위협이 있을 때는 안보가 정책의 우선 순위가 된다. 참 민주주의는 걸음마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그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역대 대통령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무현식 거리 선동정치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보다 민주적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자. 1960년대의 한국에는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자다가 굶어죽는 거지들이 많았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70%를 무상지원 해주었어도 한국이 세계 최빈국이었다면 그나마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단된 1960년대 중반부터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었다는 말인가? 겨우 500만명분의 쌀만 생산할 수 있는 나라에서 완전 민주주의는커녕 독립이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조선 시대에는 석유 수입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는 외화벌이가 한푼도 없는 상황에서 석유를 계속 수입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국가 부도가 바로 눈앞에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국가 부도와 경제적 난리로 국가 존속이 위태롭게 된 국가에서 완전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던 자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미친 자였거나 아주 무식한 자였을 것이다.


정치학적, 그리고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깔아놓은 대통령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중산층이 없이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가능하겠는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대지주와 빈민으로 양분된 사회였다. 몇몇 대부호와 찢어지게 가난한 서민 두 계층만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피려면 먼저 중산층이 있어야 함을 내다보시고 경제를 발전시키셨다. 그 이전에 아직 유일한 물류 수단이 지게와 리어카이던 시절에 서민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고작 지게꾼 노릇이었으나 그나마 일거리가 날마다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통치가 시작된 이래로 직업은 다양해졌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자신을 중류층으로 여기게 되었다.


만일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대통령을 민주화운동의 기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나라 식량 자급자족율은 30% 이하이며, 우리나라는 수출길이 막혔을 때 내다팔 수 있는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거리 선동가일수록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대통령들을 민주화 대통령으로 꼽는 이상한 판단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렇게 외치고 싶어할 것이다: "거리 선동정치는 법치주의의 후퇴이며, 법치주의의 후퇴는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정부의 구성 요원이 누구였느냐를 묻는 정치학적 견지에서도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군사정권이 아니었다. 거리의 선동군들이 지난 3월 21일(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 백만 명을 동원할 목표로(실제로는 이십 만 명밖에 동원하지 못하였음) 청소년들까지 선동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학에서 청소년 정치 이익 단체로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리의 선동군들이 청소년들까지 동원하려 하는 이유는 선동 정치는 사람 머릿수에 호소하는 까닭이다. 열 명으로 구성된 한 사회는 한 명의 현자와 두 명의 어리석은 자들과 그 중간에 있는 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자. 그 7명이 한 명의 현자를 지도자로 선택하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다. 그러나 두 명의 어리석은 자들이 그 7명을 선동하여 표를 독식할 때 민주주의 제도에 약점이 있다. 바로 이 약점을 거리의 선동군들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역학 구조에서 군부의 실력은 대학생, 공무원, 경찰, 시민단체 등의 실력과 아울러 정치적 요소에 포함된다. 미국에서도 군부 출신 조지 워싱턴 장군이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초대 대통령과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1950~1960년대에 한국에서는 군부가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구성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일부 장성들은 미국 국방성의 초청으로 정치, 경제, 역사, 행정 등을 일년간 단기 유학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엘리트 장교들에게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당시 세계 정세를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서구의 선진 기술을 이전해 올 수 있는 엘리트 지성인들이 군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미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 장교들에게 주어지는 미국 유학 특전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민간 지성인들이 군 장교들보다 높은 학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군부의 학식이 민간인들에 비해 뒤쳐질 때는 군인의 정계 진출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된다. 그러나, 1960년~1970년대는 국제 정세를 읽을 수 있는 인재들이 양김씨같은 민간인들보다 군부 엘리트들 중에 훨씬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일부 엘리트 장교들이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 요직에 민간인들이 고루 등용되어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군부 출신을 차별하지 않고 누가 지도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도 군부 출신이 많이 있다.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독재자"였다는 양김씨의 억지 주장을 뒷받침할 정치학적 논거도 없다. 더구나, 양김씨는 1963년에서 1992년까지의 30년의 한강의 기적 이후의 그들의 십 년 간의 연이은 실정으로, 그리고 문민 독재와 국민의 정부 독재로 정말 독재자는 누구인지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아산업 노조를 거리로 내몰아 장기 파업을 선동함으로서 IMF 환난의 도화선을 당겼던 김대중의 거리 정치는 한국의 법치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지금 노무현의 거리 정치는 한국의 법치주의를 더 한층 후퇴시키고 있다. 그리고, 법치주의의 실종은 곧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학문적, 지성적 실력에 호소하지 않고 머릿수를 채우는 선동으로 일당 독재를 꿈꾸는 이들이 민주화운동가인가? 아니다. 사람 머릿수가 아니라 알찬 실력과 바른 정책에 호소하였으며, 공산화를 억제하였으며, 법치주의를 정착시켰던 박정희 대통령이 훨씬 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역사가는 평가하고 싶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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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보는 시각


- 필리핀 외교관 부인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키 워즈>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은 과거 좌익경력와 민주주의의 억압이라는 질곡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맞서서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를 내세웠지만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경제개발을 공산주의와 대항수단으로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여 냉전 기간동안 경제적으로 한국의 기반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희 부부가 친구로 가끔 만나는 사람 중에 외국 외교관의 부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으로 나이도 저와 비슷한 또래로 대학의 학번도 같습니다. 젊은 시절 한국 잡지 분야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어 만나기만 하면 서로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그녀는 이따금 폴란드와 구 소련 등 남편을 따라 생활을 했던 지역의 현장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곤 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부러워한 소련 주재 필리핀 외교관 부인



구 소련 마지막 무렵 모스크바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었답니다. 아이들 때문에 집에 일하는 여자를 구하였는데 마침 아시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일도 성실하게 잘 할 뿐만 아니라 말씨 등 품행이 예사롭지 않게 수준이 높아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주 대화를 하였는데 얼마 뒤에 그녀가 그곳 현지 필리핀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가 외교관 부인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창피하지만 여기서 한 시간 일하는 것이 일반 필리핀 여자들 하루 일하는 것보다 많아요!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은 과거 우리보다 못 살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잘 살지 않아요? 저는 한국 사람들 만나면 정말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은 한 가지 리더(지도자)를 잘 만났던 것이지요!”


저의 그 친구는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한국의 리더 누구?” 라고 물으니 그녀가 “포머(former) 프레지던트 미스터 팍!” 라고 대답하여 깜짝 놀랐답니다. 팍이라면 박정희 대통령! 그 시절 시국시위에도 참가하기도 한 그녀에게 박정희라는 단어는 기억에서 가장 먼저 지우고 싶었고 그것이 원인의 하나가 되어 한국을 떠나왔는데 뜻밖에 그것도 외국인으로부터 지도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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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3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김정렴의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박전대통령의 통치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장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변기에 벽돌을 한 장 넣었고 낡고 작은 구멍이 난 러닝셔츠를 입었다는 박전대통령의 근검절약 이야기는 한 지도자의 통치철학을 넘어서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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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은 과거 좌익경력과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질곡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맞서서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를 내세웠지만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경제개발을 공산주의와 대항수단으로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여 냉전 기간동안 경제적으로 한국의 기반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한 외국 외교관 부인의 이야기가 박전대통령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이 설득력이 약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미군철수 논의를 하고 있는 필리핀 정치의 현실과 미래를 이야기하며 한국과 비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해야할 나이에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고기 후리기를 하고 있는 그녀의 고향 섬 지방 청소년들을 이야기하며 울먹이더라고 합니다.



사실 필리핀은 그후 아키노, 에스트라다 수상 등 약체 리더십으로 이어졌습니다. 91년 미군철수 이후 필리핀의 정치와 경제불안은 계속되었고 지금 국민들은 재주둔 요구시위를 하고 있고 미국은 최근 필리핀 도서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번지고 있는 회교도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반테러 작전을 위해 군대 3천명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그녀의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의미가 있고 이 점 오늘날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2003.2.17)



출처 : 졸저 이제는 깨어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자(김정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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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필립핀처럼 한낱 미국의 실질적인 식민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였다는 사실은 천하가 안다.


필립핀은 우리와 똑같이 월남에 파병했으면서도 당시 대통령 마르코스가 그의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기만 함으로써 국가발전에 연계시키지 못했다. 당시 필린핀의 경제사정은 우리에게는 羨望(선망)의 대상일 정도였다. 최연소의 국회의원출신이었고 여배우 이멜다와 결혼했던 마르코스는 한때 필립핀 민주주의의 우상이었다.


개인의 역량과 국가관, 국가영도력이 나라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비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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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를 알아준 朴正熙

그에게 報恩하는 과학자들.




이준(조선일보)



1965년 한국이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하자 미국은 감사의 표시로 1000만 달러를 원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밀가루 한 포대가 아쉽던 때였다. 정부 내엔 "부족한 식량을 수입하는 데 원조자금을 우선 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대통령 박정희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의 1000만달러와 우리 정부 출연금 1000만달러를 합쳐 대한민국 공업 발전에 기여할 종합연구소를 세우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탄생했다.


▶초대 소장이었던 고(故)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전국 30여 곳을 둘러본 뒤 대통령에게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 1순위로 보고했다. 농림부는 펄쩍 뛰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농림부 장관을 데리고 홍릉으로 가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과학기술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평을 모두 연구소에 내줘라"고 했다. KIST에 첫 예산 10억원을 배정할 때도 경제기획원이 예산을 깎으려 하자 "원하는 만큼 다 주라"며 KIST 손을 들어줬다(조갑제 '박정희').


▶KIST 설립 후 박 대통령은 한달에 한두번씩 꼭 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돌렸다.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배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엔 없던 의료보험까지 미국 회사와 계약해 들게 해줬다. 각계에서 반발과 진정이 쏟아졌지만 박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학계엔 "조선시대 장영실 뒤에 세종이 있었고 KIST 뒤엔 박정희가 있다"는 말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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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발전은 국가 지도자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사를 연구한 미국 스티븐 데디에 박사의 말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관심을 먹고 자란 KIST는 40여년 동안 생명공학연구소·전자통신연구원 등 20개 가까운 전문연구소를 분가 독립시켰고 4000여명의 석·박사급 과학 인재를 키워냈다. 박원훈 연우회장은 "기념관이 완공되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한 지도자가 국가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산 교육 현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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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관측병의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안 보이는 곳에서 귀신같은 계산으로 적에게 불의 선물을 안겨 주는 포병장교 출신답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과학기술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역대 한국의 지도자 중 유일무이한 과학기술 대통령이었다. 일본도 두려워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세우고, 공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서울대 자연대와 서울공대와 한양공대를 꿈의 대학으로 만든 지도자가 박정희였다. 이 점은 나폴레옹과 링컨과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과학기술이 세계수준으로 올라서면 매판자본은 슬그머니 민족자본으로 변한다는 것을 제대로 안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대와 공대만이 아니라 공고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기능공을 양산하여 세계기능올림픽을 휩쓸게 하여 단순 가공밖에 못하던 한국의 노동자가 고졸만으로도 대졸을 능가하는 고임금을 받을 수 있게도 했다. 박정희 시절에는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포공항에서 세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열어 주었다. 입으로만 예의, 입으로만 민주, 입으로만 분배, 입으로만 평등을 외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지도자가 박정희다. 자유민주에 굳게 선 실용주의를 요란한 구호가 아닌 조용한 실천으로 전국민에게 각인 시킨 국민 스승이 박정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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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시를 95%나 반대 했다?


200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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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나라 장관 중에 대통령의 말씀에 거의 100% 반대한 분이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무사한 분이 있었다. 그냥 무사한 게 아니라 그 대통령 아래서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7년6개월 장관직을 지켰다. 지엄하신 각하의 말씀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까지 했다. 많은 한국의 지식층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런 대통령을 독재자로 폄하한다. 그에 대한 증오심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 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이고 그 장관은 최형섭 전과기처 장관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의 대가로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무상원조 5천만 달러를 받았다. 1964년 11월 30일에 건국 이후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으니까, 당시에 그것은 엄청난 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그 돈을 전액 과학기술진흥에 쓰기로 결정하고 이 일을 최형섭 박사에게 일임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초대 소장으로 임명만 받았지, 건물도 사람도 없었다. 여 직원 한 명과 예산을 줄 경제기획원 직원 한 명 이렇게 셋이서 청계천 어물전 옆에서 파리를 쫓으며 사무실을 열었다. 그렇게 경비를 아꼈다. 대신에 해외에서 과학자를 유치하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유명한 일화 둘.


서울대 교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니, 지들이 뭔데 우리 월급의 3배나 받아, 잉?
--여보시오,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라 당신네도 그렇게 받도록 노력해 보시오.


대통령이 허허 웃으며,
--소문대로 나보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이 수두룩하구먼.
--각하, 제 월급은 깎아도 그들의 월급은 한 푼도 깎으면 안 됩니다.
--음, 계속 그렇게 받도록 하시오. 장관 월급도 깎지 말고.



최형섭 박사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KIST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응용 기술 위주의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KIST´를 이공계 대학생들이 책상머리에 크게 써 붙이고 죽으라고 공부하게 만들었다. 기술의 일본이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이 당시에 이미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여 중소기업 중심으로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개발해 주고 로열티를 받아 일부는 개인이 갖고 나머지는 부서의 공동 기금으로 편입하여 국가 예산 외에 따로 자금을 확보, 모든 부서가 경쟁적으로 나날이 발전할 수 있게 했다. 이 당시 KIST 직원의 월급은 극비 사항이었다. 누가 얼마 받는지 연구원끼리도 서로 몰랐다. 하여튼 개인과 팀의 성과에 따라 대통령의 월급을 능가하는 사람이 속출했던 것이다.



최형섭 박사는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게 된다. 이 때 그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과학기술의 아마추어인 행정관료보다 전문가인 과학기술자의 직급을 올려 버린 것이다. 국회에서도 과학기술에 관한 예산은 무사 통과하게 만들었다. 감사도 안 받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전문가에게 믿고 맡겼던 것이다. 이런 그가 집이 없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특별히 사 준 집을 퇴직하면서 국가에 헌납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최형섭 장관은 수시로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를 받으며 경제의 기초가 되는 과학기술을, 나사 하나 못 만들던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주로 1970년대에 ´공돌이 배움터´라고 스스로 비하하던 공대를 획기적으로 지원, 새로운 공대도 많이 설립하고 기존 공대는 그 정원을 대폭 늘리고 시설을 최신식으로 바꾸어 주었다.

경제가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기능공도 태부족했다. 과기처가 앞장서서 머리 좋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기능공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 퍼레이드를 펼쳐 주었다. 서울공고와 서울공대의 학생들은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정치가 불안해도 이들은 무풍지대에 사는 듯했다. 이 당시 공대생은 데모도 할 줄 몰랐다. 찬란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탓이리라.


이 때의 공고생과 이공계 대학생들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 정책은 IT 지원 외에는 전두환 전대통령부터 엉망이 되었다. 이제는 우수 학생들이 적성을 살린다, 소신 지원한다, 어쩌며 우르르 기껏 제 한 식구 잘 먹고 잘 사는 의대로 몰려가고 있다. 희망이 없는 불쌍한 세대이다. 아무리 이름 없는 지방대의 의대도 이젠 서울대 공대에 뒤지지 않는다. 25년간 과학기술 정책이 표류한 업보이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최형섭 장관은 과학기술에 대해 늘 아는 척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때마다 무안을 주었다. 아첨이란 걸 몰랐다. 95% 반대했다. 포병장교 출신은 다 그렇듯이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상식과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일류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박사 논문이 아직도 미국의 대학교재로 쓰이는 세계적인 과학자인 최형섭 장관이 보기에는 하나같이 ´맹한´ 소리였다. 그가 반대할 때마다 대통령은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는 최형섭 장관의 말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되면 며칠을 두고 숙고하다가, 결국 최형섭 장관의 말이 맞다며 그대로 하라고 재가했다.


최형섭 장관의 회한 섞인 말이다.

--나도 너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을 떠나 한 인간의 입장에서 5%는 그분의 말을 따를 걸.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이야...


최성재 (2004. 1. 16.)








"당신은 과학 대통령 그 자체셨습니다"

故 朴正熙 대통령 31週忌(주기) 추도사



朴元勳 (KIST연우회장)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지난 9월8일에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라는 책의 출판 기념회가 바로 대통령님께서 건축을 시작하신 ‘과학기술회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무려 16명으로써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 김기형 박사를 비롯하여 대통령님께서 손수 돌보아 주셨던 KIST, KAIST, ADD, 과학기술진흥재단 등의 대표들이 한 마음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이야말로 과학 대통령님의 제31주기에 임하여 진정한 지도자를 추모하는 우리 모두의 추도사이기도 합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1960년대 초 ‘과학입국 기술자립’이야말로 ‘조국근대화’의 선행조건이요, 또 필수요건이라는 대통령님의 선견적 기본철학과 비전, 이를 위한 헌신적인 추진력, 그리고 일관된 리더십을 기반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은 2010년 현재 과학 경쟁력 4위, 기술 경쟁력 18위, 총체적 국가경쟁력 23위, 경제 규모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민족중흥’ 노력과 함께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을 구축해 주셨음에 우리 모두 감읍하고 있습니다.


‘빈곤퇴치’와 ‘자주’라는 정치적 신념하에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여 과학기술 진흥 5개년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고 ‘인적자원’의 결집 및 육성을 그 첫 번째로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66년 KIST의 설립은 ‘해외 두뇌’를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두되 집단을 중심으로 산업기술 개발이 기획되고 산업진흥이 추진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중앙정부조직으로서 과학기술처 설치, 1970년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1971년 KAIST 설립을 통한 석·박사급 고급 두뇌의 양성, 1972년 산업기술진흥법 제정으로 민간 연구의 촉진, 1973년 대덕 연구단지 건설 착수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전문연구소들의 설립, 1977년 기초연구진흥을 위한 한국과학재단 설립으로 이어지는 ‘先기술 後과학’의 국가발전 모델은 지금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선지자적 과학기술정책의 추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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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수립하여 1977년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과학기술부문 계획은 총 11개의 세부 주요정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기술용역의 육성, 두뇌산업의 육성과 장기적 대형 연구개발의 추진, 원자력 기술개발, 자원개발과 환경보전 및 기상업무의 강화, 정보산업의 육성이라는 5개 항목은 새로이 강조된 것으로서 오늘날 제철,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반도체 및 전자산업이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국민 일인당 GDP 20,000달러라는 경제적 번영이 과학 대통령님의 은공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신감을 심어준 ‘새마을 운동’과 연계된 ‘생활의 과학화’는 1973년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과학의 합리성이 투영된 ‘공정한 사회’건설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1967년에 설립하신 과학기술후원회는 과학기술진행재단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이 기관은 오늘날에는 과학문화와 창의교육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 시민으로서의 소박함을 항상 지니시고 스스로 모범이 되셨던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생활철학을 우리 모두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20,000달러 선을 넘어 30,000~40,000달러 선의 선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첫째 정부의 적극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정책, 둘째 기업의 부단한 기술개발 노력, 셋째 과학기술자들의 시대적 사명감의 세 가지 요소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의 일관성 및 영도력,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안타까운 일이며 그래서 오늘 과학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연구개발밖에 모르는 과학기술자에게서 정치력을 기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통치자가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이를 아시고 과학 기술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사랑은 큰 영애이신 박근혜 의원을 전자공학도로 진학케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과학 대통령님의 ‘과학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합니다. 특히 KIST 연우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을 건립하여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성장의 모델’ 개발도상국가에 전수하여 경제성장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간 빈부의 격차축소를 통해 세계 평화에 공헌코자 합니다. 이는 어쩌면 해외 원조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한국만의 영도자가 아닙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과학 대통령 박정희 리더십’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리더십을 자랑하며 세계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가르침대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계속 정진하여 ‘조국의 最선진화’를 완수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과학 대통령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2010년 10월26일

KIST연우회장 박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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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과 고달프게ㆍ뼈빠지게 일했던 부모형제들의 은덕으로, 3-486세대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제일모직 교복을 입고 유복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들은 보릿고개가 무엇인지, 호열자ㆍ 장질부사(염병)ㆍ홍역이 무엇인지를 실감하지 못한다.


저 Africa-Uganda의 길거리에 배고파 쓰러져 있는 어린이들--
파리때 속에서 짐승처럼 죽어가는 TV화면의 저 광경이 6.25남침 후 韓國의 自畵像임을 그들은 모른다.


3-486세대들은 길거리에 거지ㆍ넝마주이ㆍ구두딱세ㆍ신문사~려ㆍ 아이스케키ㆍ뻔[번데기]이 범람했던 戰後 한국의 참상을 경험하지를 못했다.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 삶아 먹고 물배를 채웠던 그 가난했던 한국의 역사를 그들은 모른다.



# 3-486세대 ! 그들은 「열사 전태일의 절규」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밤새워 읽었다. 그들은 대학시절에 분배ㆍ평등ㆍ계급 투쟁을 Motto로 하여 10년간 무수한 인민을 숙청ㆍ학살하면서 중국의 역사를 이른바 지옥ㆍ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휘몰아 넣은 홍위병ㆍ문화대혁명의 지도자 모택동의 사상을 읽었다.

그들은 50년 동안 북한을 암흑통치한 아오지탄광ㆍ천리마운동ㆍ 정치범수용소의 기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읽었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자국의 인민들에게 “빵”을 몇 개나 만들어 분배를 하였던가 ?

만들어 놓은 “빵”이 있어야 분배를 하지..,



3-486세대들은 서방의 민주열강들이 수백년간 무수한 인민들이 투옥ㆍ피살되면서 시민혁명ㆍ산업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功이 있으면 過가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西歐의 시민혁명ㆍ러시아의 Bolsheviki혁명ㆍ일본의 명치유신ㆍ중국의 문화대혁명처럼 반대편에 선 수십만ㆍ수백만의 인민들을 단두대ㆍ죽창ㆍ총검으로 살해ㆍ학살한 일이 없다.

우리의 3ㆍ486세대들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Best-seller가 되어 있는 박정희 전기」를 읽지를 않았고, 中國黨政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3-486세대들의 부모형제ㆍ선배들----구슬땀을 흘리며 “빵의 창조”라는 가슴 벅찬 민족적 대형 토목공사를 수행하고, 조국근대화ㆍ민족중흥이라는 도도한 시대적 怒濤에 앞장설 때, 3-486세대들은 단지 학생의 신분으로 유복하게 선진민주열강의 자유ㆍ평등과 국민의 기본권을 공부하고 있었다.


「빵과 자유」는 책상위에서 하루아침에 “나이롱 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진민주열강들의 근대화과정ㆍ산업화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수십년ㆍ수백년에 걸쳐 인민들이 무수하게 죽어나가면서ㆍ피를 흘리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빵과 자유”로 요약되는 민주주의의 정치이념은 국민의 피를 먹고 사는 한 포기의 나무라 했던가.



516혁명과 재임18년 동안의 근대화ㆍ산업화과정에서 다소의 疑問死와 한국적 민주주의ㆍ인권탄압이 거론될 뿐, 단두대ㆍ죽창ㆍ총검에 의한 살해ㆍ학살의 장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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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하면서 무지막지한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3권분립이 이뤄져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와 언론이 있고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던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권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표현한다. 독재라기보다는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해 후진적인 대의정치를 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짓밟지 않았는가.


박 대통령의 통치 목표는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박 대통령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임을 의식해서인지 사석에서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하고 반문한 일이 있다. 그는 절대적 빈곤과 한국적 정치문화의 토양에서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새마을사업의 계획과 집행을 마을사람들의 토의와 합의에 맡겨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장이 되게 하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의 정당정치에 혐오와 불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는 자신이 맡을 테니 경제장관들은 오직 경제개발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대통령의 강압정치 때문에 정치는 항상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행정은 질서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개발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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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철권통치를 폈다. 그가 죽은 후 왕정을 복구한 찰스2세는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했다. 그러나 영국 백과사전은 크롬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확립, 경제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 확대, 사회정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


나는 영국 의회 마당에 있는 그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일이 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시하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흙탕물에 뛰어든 실천적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고 해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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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유학생들이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 ]



주간조선
홈 > 위클리뉴스[1963호]

2007.07.16

[정치] 손학규의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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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한 손 전 지사는 재야원로인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에는 마오쩌둥 영문저서를 번역해 돌려보다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도 서빙고 보안대 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1975년부터 2년간은 200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하느라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1979년 부마사태 때 붙잡혀 보안대에서 ‘죽을 만큼 맞다가’ 10ㆍ26이 터지면서 풀려난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기 전 세계교회협의회 장학금으로 영국으로 유학, 10여년간의 운동권 삶을 마감했다.


그는 경기도 지사 시절 사석에서 “영국 유학 당시 공산국가였던 중국 유학생들이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어린 여공의 비참한 삶을 강조하며 중국 유학생들과 토론을 하다 세계관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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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2007

나의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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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학도이었던 내가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으며, 어떻게 운동권 인사가 온건한 시민단체인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창립했으며, 또 그 후에 왜 정치에 나섰다가 다시 나눔운동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서울조선족교회까지 세웠는가? 그리고 지금은 왜 또다시 보수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애국운동을 하고 있는가를 설명한 나의 인생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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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독서실에 파묻혀 독서에 몰두했다. 당시 사회주의 책은 모두 禁書여서 책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어로 번역된 사회주의 원전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 학생들 사이에 나돌았는데, 나도 그것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자본론, 고리끼의 어머니, 정치론, 맑스주의 경제학, 모택동의 모순론, 신식민지론 등을 모두 필사본으로 읽었다.


일어로 사회주의 서적을 읽기 위해 일어공부도 하고, 필사본을 보관해두고 읽기 위해 노트에 베끼기도 했다. 복사기가 없는 시절이니 그 내용을 두고두고 읽으려면 다시 노트에 베껴야 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나는 완전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소총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혁명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는 이름없는 혁명 전사’를 당시 내가 꿈꾸었다면 지금 이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처럼 나를 상대로 한 비밀과외의 학습효과는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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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동안 다른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 실상을 알면 알수록 그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나를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모택동주의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중국은 ‘홍(혁명)’과 ‘전(전문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회이고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혁명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4인방이 무너지고 등소평이 등장했을 때 나는 4인방의 붕괴에 대해 매우 서글퍼 했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중국 유학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유학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 사실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리영희 교수가 쓴 ‘10억인의 대화’라는 책의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야 리영희 교수의 시각이 얼마나 왜곡된 시각인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리영희교수를 내가 열심히 존경했었기 때문에 그만큼 그분에 대해 분노했다.


더 나아가서 중국에 비교적 개방적인 등소평 체제마저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반체제인사들이 미국에 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인가를 깨달았다.


미국에 6년간 있으면서 공산권국가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려고 애를 썼지만 알면 알수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는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미국에서 사는 6년 동안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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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b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407

그래서 나는 많은 기독교 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재 운동권에서 하고 있는 북한알기운동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들도 북한의 실상을 잘 알게 될 터이니 그 때까지는 북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침묵이 쫙 흘렀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나는 엄청나게 반동적인 발언을 했던 셈이다.



나는 운동권을 장악하다시피 한 이념인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했다. 주체사상의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해야 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물론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사연의 연구 간사들이 동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 안에서 나와 실무자들 간의 대립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내가 기사연리포트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소개하자고 하면 실무자들은 일제히 반대했고, 실무자들이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싣고자 하면 내가 이를 막았다.

나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운동권의 분위기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후배들과의 마찰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는 당시 운동권의 상황을 조사, 분석해서 그 결과를 이사회에 상세하게 전달하였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 기사연에는 박형규, 김관석, 강문규, 김용복, 김상근, 김찬국, 이우정, 이효재, 서광선 등 진보적인 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사로 계셨지만, 그분들은 내 보고를 듣고도 이사회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계속해서 내 목소리만 돌출되었고 주사파가 주류였던 기사연 실무자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기사연 실무자들의 ‘나를 내쫒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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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b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407


37. 서경석을 내쫒자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지나간 70년대 해군중위의 신분으로 민청학련과 같은 반정부 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는 것보다 기사연 원장의 신분으로 내가 지금까지 몸담아왔던 운동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한번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 온 후배 한 사람을 불러서 나의 속 생각을 토로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길은 스웨덴과 같은 민주복지국가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우리나라를 스웨덴과 같은 나라로 만들자. 스웨덴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6배밖에 되지 않는다더라.”

그러자 그 후배는 강하게 반발했다.

“저는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빌미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나를 비판하는 진영에서 ‘서경석 목사가 너무 온건하지 않느냐’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오다가 이 말을 빌미로 ‘서경석이가 개량주의자다’라는 확실한 증거를 잡힌 셈이었다.


특히 그 즈음은 기독교운동 진영이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입장이 갈려 분열되었다가 1년 정도의 기간을 거치면서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이라는 통합 조직을 만들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운동을 재정비해서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의 지도 아래 모든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일차적인 정비대상이 바로 나였다.


내가 훗날 들은 바로는 나를 기사연 원장직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결정이 기독교사회운동연합 내에서 이루어진 후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대책소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나를 내쫓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까지 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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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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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세계화의 역사적인 리듬을 타고 온 세계로 뻗어 가는 중국의 강대한 경제력과 지속적 성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朴正熙 시대의 경제개발 정책이 당시 중국지도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중국의 경제개발 정책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의 鄧小平과 趙紫陽의 오른팔이자 한 때는 朱鎔基 총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중국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한 馬洪 박사,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시는 김정렴 대사님을 모시고 중국 대련에서 韓中 경제지식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정렴 대사님은 이 대련 회의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중국 정부 관료와 관계인사들 앞에서 특별강연을 하였습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 개발정책에 관하여 감명 깊은 연설을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차례의 한·중 지식교류에서 토의된 내용을 기초로 한 건의사항은 중국의 최고지도자 정책회의에 마홍 선생이 직접 보고했습니다.


1980년 초부터 시작하여 저는 중국 측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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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全文>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주최 강연회)

[ 조이제(趙利濟)·East-West Center 수석고문 ]






1993


[ ..... 紅旗출판사가 발행 .....

..... 중국 黨政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 ....... ]



중국에 때아닌 박정희 바람,전기발행 여파


[중앙일보] 1993.08.24




朴正熙前대통령전기가 『朴正熙』라는 제목으로 北京에서 출판돼 中國에서 때아닌 「朴正熙바람」이 일고 있다.


피터 현으로 잘 알려진 在美교포작가이자 언론인인 玄雄씨(65)가 영문으로 쓴 朴正熙前대통령의 전기가 美國에서 출판되기 전에 중국어번역판이 北京에서 먼저 출간돼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중국의 젊은 신예작가 판이(潘屹)가 번역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紅旗출판사가 발행한 이 책은 특히 중국 黨政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될 만큼 중국경제개발의「교과서」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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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831636





[ .....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이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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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베이징의 紅旗出版社(홍기 출판사)에서 나온 박정희 傳記(전기)를 쓰신 玄선생 아니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뜻밖에 만나 뵈니 반갑군요! 그 책이 나왔을 때 베이징 출판사에서 한 권 보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인간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李敏 여사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번역 원고의 복사본을 金正日(김정일)에게 주었지요. 아마 金正日이 그 책을 통해서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과 경제발전 업적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朴正熙는 한국의 秦始皇』


이런 뉴스를 듣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홍기 출판사가 내놓은 중국어판 박정희 전기는 지금도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槪要(개요)에 불과하고 아직 脫稿(탈고)가 안 끝난 상태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책은 故(고) 李先念(이선념) 전 국가주석의 사위 劉亞洲(유아주)가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PEN 대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내 영문 개요를 읽고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 정부 관리, 학자와 일반 독자들에게 읽히는 게 좋겠다고 하여 나오게 된 배경까지 털어놓았다. 劉亞洲 자신은 朴正熙의 뛰어난 업적에 감동한 나머지 그 책 서문에 朴대통령을 『한국의 秦始皇(진시황)』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金교수는 한마디 더 보탠다.

『중국에서 홍기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권위입니다. 이 출판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이기 때문에 보통 중요한 책이 아니면 절대로 취급 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過讚(과찬)의 말씀』이라고 인사를 차릴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 가면서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하얼빈 손님들은 醉興(취흥)이 무르익었다. 李敏 여사는 일어서더니 愛唱曲(애창곡) 抗日 鬪爭歌(항일 투쟁가) 「어머님 울지 마세요」를 부른다. 그 옛날 젊고 용감한 항일 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만주에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춘만 작사, 작곡의 「어머님 울지 마세요」의 가사는 원래 중국어로 된 것인데 李여사가 번역한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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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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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정치이야기로 발전하였고 그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하는군요. 선배님은 중국 바이어들 앞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비방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과 그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암울했던 지난 어둠의 역사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중국 바이어가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선배님의 귀싸대기를 갈기는 것입니다.



연세가 55세나 되는 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대화 중에 느닷없이 젊은 중국 바이어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았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왜 그러느냐고, 그 중국 바이어에게 따졌습니다.


잔뜩 화가 난 바이어가 하는 말이, [너희는 5천 년을 이어온 가난과 굶주림의 역사를 물리쳐준 은인을 너희들 손으로 죽인 배은망덕한 민족이 아닌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무엇이 잘났다고 큰소리냐!] 그런 호통을 듣고 선배님은 더 이상 할말을 잃었으며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에 중국인민들에겐 원수나 마찬가지일텐데 도대체 이것이 웬일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이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 당시 중국지도자인 등소평은 전 중국 관료 및 인민들에게 박정희 정신을 본 받자고, 그분의 정책을 따르자고 야단법석에 가까운 정신교육을 실행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의 최고의 우상으로 자릴 잡았으며 중국인민들과 바이어에겐 박정희 대통령이 곧 마음의 구심점이며, 흠모하는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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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마을운동을 중국 농촌에 접목시키는 방안을 놓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토론회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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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베이징의 중국 공산당 중앙학교에 전국 31개 성과 시의 주요 간부 200여 명이 모인다. 이 자리에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도 참석한다.


이들은 1970년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중국 농촌에 접목시키는 방안을 놓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토론회를 벌인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촌의 활로를 한국의 새마을운동 경험을 들춰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이번 회의에는 인민해방군 주요 지휘관도 참석해 새마을운동을 군에 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지난해 10월 중국 정부는 1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2006~2010년)을 세우면서 '신농촌운동'추진을 확정했다. 이것은 새마을운동을 그대로 중국 말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이번 토론회는 신농촌운동의 구체적인 운영 방안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활동 개시를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


준비는 지난해부터 해 왔다. 지난해 5월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신리(鄭新立) 부주임 등 연구원들이 한국을 찾아 새마을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귀국한 뒤 이들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두 건의 보고서를 올렸다. 하나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운영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어떻게 중국 농촌에 적용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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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5&article_id=0000596064§ion_id=104&menu_id=104

한국 새마을운동 학습… 중국 후진타오 주석 참석
당·군 지도부 200여 명 베이징서 1주간 토론회

중앙일보 2006년 1월14일





[ ..... 중앙정책연구실... 시찰단은 ... 한국에 파견돼 새마을운동 현장을 견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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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홍콩 원후이바오(文匯報)는 13일 중국 공산당이 최근 새마을운동에 대한 학습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동반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 새마을운동 벤치마킹에 본격 나섰다고 베이징(北京)발로 보도했다.


이와관련 중국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신리(鄭新立) 부주임을 단장으로 한 시찰단은 지난해 5월 한국에 파견돼 새마을운동 현장을 견학한뒤 한국 새마을운동의 성과 및 경험, 중국 사회주의 신농촌의 건설 등 2건의 보고서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정 부주임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지난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통해 시멘트와 철강을 농촌에 지원, 기반시설을 건설토록 한 것을 시작으로 30여년간의 도시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꾸준한 노력으로 도시-농촌 경제의 협력발전과 도시-농촌 소득의 동반 상승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지난 30년간 한국의 도농 소득 격차는 계속 1:0.8∼0.9 수 준을 유지해왔고 지난해에도 한국 농민의 수입은 도시민의 84%에 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부주임은 새마을운동 시찰 이후 도시화 및 공업화 과정에서도 도농소득의 동반 상승은 실현 가능하다는 점과 농촌발전이 도시발전의 제약 요인이 아니라 도시 발전을 위한 추진력이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농촌발전을 통해 농민의 능력과 소질이 제고돼 도시민화되면 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고, 농민소득 수준의 향상은 또 도시지역 공산품을 위한 광활한 판매시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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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12&article_id=0000030626§ion_id=101&menu_id=101

中, 한국 새마을운동 벤치마킹에 나서

[ 헤럴드 생생뉴스 2006-02-13 ]







중국의 새 韓流는 ‘새마을운동’

중앙·지방정부 공무원들
"벤치마킹 하겠다" 잇단 방한



새마을운동 교육기관인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에는 올 들어 중국 공무원들이 연수교육을 오는 일이 잦아졌다. 중국 지린(吉林)성 간부들 38명이 지난달 30일 입국해 2주일간 합숙교육을 받은 데 이어, 22일에는 다롄(大連)시 당서기와 시장 등 공무원 25명이 일주일간 교육을 받기 위해 입국한다.


정갑진 연수원 부원장은 “지난해까지 한두 달에 한 번도 안 되던 중국 공무원들의 연수교육이 올해는 월 2회꼴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한국 농촌의 압축식 발전모델인 새마을운동이 중국에서 새로운 한류(韓流)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올해 초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본뜬 ‘신농촌건설운동’을 11차 경제사회 5개년 계획(2006~2010년)의 핵심과제로 선정한 이후 중국의 중앙·지방정부로부터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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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5.09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605/2006050905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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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 그대로 모방”

미 랜드(RAND) 연구소 오버홀트 박사 주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중근동 지역에는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많은 국가들이 탄생했다. 이들 신생 개도국들은 자유·비동맹·공산진영을 막론하고 경제개발을 국정의 최고 목표로 내걸었으나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뿐이다.



한국의 놀라운 고도성장을 높게 평가했던 이광요 전 싱가포르 수상은 지난 1979년 10월 방한 기간 중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는데 소모합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79년 10월 19일, 청와대 환영만찬)



아시아의 3대 지도자, 등소평-요시다-박정희


이광요 총리는 또 미국의 TIME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등소평과 일본의 요시다 총리,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그는 등소평은 중국을 나락에서 마지막으로 건져 올린 개혁-개방의 아버지로, 요시다 전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냉전 개막 직후 친미(親美)정책으로 돌아 일본 경제 부흥을 이룩해낸 공로로,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대통령을 아시아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한편, 미 랜드(RAND) 연구소의 윌리엄 H.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 박사는 ‘중국의 부상’(Rise of China,1989)이란 책에서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박정희,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국가적 개혁 이뤄”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오버홀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오버홀트는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지난 92년 2월 등소평은 남부지방 시찰 중 “광동성은 20년 안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四龍)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경제면 뿐 아니라 사회질서와 사회 정세면에서도 따라 붙어야 한다”는 이른바 '남방순행강화'(南方巡行講話)를 발표해 한국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이외에도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동방정책 즉 '동쪽의 일본-한국의 경제기적을 배우자'는 정책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지도력에 그가 큰 감명을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박 장군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킨 강한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10926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
[분석] 아시아 최고의 지도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김필재 기자 2006-12-01








"한국도 해냈듯, 우리도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공익광고가 격찬한 박정희 대통령 '한강의 기적'




 심민현 기자

 2019.03.03




우크라이나 고용연합회, 공익광고 통해 '박정희 리더십'이 만든 한국의 빈곤 탈출과 경제성장 소개

"1960년 대한민국 경제는 절망적 수준...박정희 대통령 등장 이후 불과 10년만에 수출 정상궤도 올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은 진정한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한국도 해냈듯이 우리도 할 수 있다"



김규나 작가, 페이스북에 해당 동영상 공유하며 소회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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