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박정희 1
 닉네임 : 박정희  2020-05-04 07:01:26   조회: 293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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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셋째 형 상희(相熙)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형 하나뿐이었다.



내 나이 9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형은 벌써 졸업을 했다. 이때 우리 동리에서는 3명이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른 두 아이는 나보다도 나이가 몇 살 위이고 입학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新學)을 약간 공부한 실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3학년에 입학하고 나는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상모동에서 구미면까지는 약 8km, 시골서는 20리 길이라고 불렀다.

1926년 4월 1일이라고 기억한다. 오전에 4시간 수업을 했으니까 학교수업 개시가 8시라고 기억한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대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늦다고 생각되면 구보로 20리를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가다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우편배달부를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 하고 짐작으로 시간을 판단한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이 빠르고 늦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이 변경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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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sidentpark.or.kr/pages/sub.jsp?menuIdx=31

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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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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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1579&C_CC=AZ

명동에서 철조망 치고 농사짓는 사나이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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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1960, 70년대 학교에서 매주 한번씩 실시했던 ‘분식의 날’을 언급하며 “보통 보리밥이나 콩밥을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박 전 대표는 메추리알 크기의 감자만 도시락에 가득 담아왔다. 몸소 실천하는 자세와 국민과 함께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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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1100

"박근혜는 학생때도 원칙주의자"
[중앙일보] 입력 200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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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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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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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40796

“5·16은 근대화 혁명이라고 국내학자들도 이젠 인정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0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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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 없었던 보리 잡곡밥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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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454707&ctg=10

<김정렴정치회고록>16. 박정희 대통령의 근검절약

[중앙일보] 입력 1997.05.15








“대통령 아버지가 공무원 월급으로 유학 못 보낸다고 했다”

박근령 이사장 “청와대서 보리밥만 먹어 아직도 잡곡밥 먹어”



조선닷컴 internetnews@chosun.com

200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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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사장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으면서도 늘 검소함을 강조했던 일화도 밝혔다. 박 이사장은 “청와대에서 항상 보리밥을 먹어서 지금도 잡곡밥을 먹는다. 어릴 때 흰 쌀밥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고 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나온 박 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가고 싶었다고 했다. ‘왜 유학의 꿈을 접었냐’고 묻자, 박 이사장은 “아버지가 ‘공무원 월급으로는 유학을 못 보낸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것에 대해서는 “언니는 공부를 잘해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1등으로 졸업하고 장학금 받아 갔다”고 했다.


박 이사장은 “지방에 내려갈 때 추풍령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할 때 여기가 제일 난공사 지역이어서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그분들 생각하며 묵념이라도 하고 가자’고 하셨다”고 말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박 이사장은 또 “차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는 다리 이름, 터널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셨고, 우리가 그걸 다 외웠다. 아버지는 ‘다리 하나, 공장 하나를 건설할 때마다 보람을 느끼셨다’고 했다”고 월간조선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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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1년 다수확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영농기술이 향상되면서 1977년 쌀 자급 시대가 열렸다. 정부는 분식의 날도 없애고 쌀 막걸리 제조도 14년 만에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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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직원으로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이발을 하기 시작한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권유 때문이었습니까


『1969년 청와대 內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도 마련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간이 이발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15평 규모의 전용 이발관이 마련된 직후 하루는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시기 위해 저를 찾는다는 전갈이 부속실에서 왔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청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朴대통령께서는 이발을 하시기 위해 이발관으로 들어오셔서는 저를 보고 「朴군, 이제 이발 시설도 갖추고 했으니 왔다갔다 하지 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어떤가」고 물어 오셨습니다. 제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대통령께서 재차 「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싫은가」고 하시더군요. 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지시를 받들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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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소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날로 이발관 문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朴씨는 이날부터 19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他界하는 날까지 항상 朴대통령 곁에서 생활했었다.



『朴대통령은 싸구려 스킨 로션을 좋아했다』



―朴대통령은 주로 언제 이발을 했습니까


『이발을 하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발은 주로 일주일에 한 번, 드라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셨는데, 아침 식사를 하시기 전에 하셨고 소요시간은 30분 정도였습니다. 물론 國事(국사)로 바쁘실 때에는 한 달 가까이 이발을 하지 않으신 적도 있습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히 머리 감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뜨거 운 물에 담가 그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른 다음 스킨을 머리에 바르는 것으 로 이발을 끝냅니다. 대통령께서는 스킨 로션도 비싼 외제 같은 것은 싫어 하시고 그 당시 국산 중에서도 가장 값이 싼 특정회사의 제품을 좋아하셨습 니다. 향기가 마음에 드신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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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이 이발을 할 때 陸英修 여사도 자주 이발관에 오시곤했다는 얘 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랬습니다. 陸여사께서 자주 이발관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朴대통령 머리 만져드릴 수건을 적당한 온도의 물에 적셔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여름에도 절전운동 때문에 이발관에 에어컨을 잘 가동하지 않았는데, 陸여사께서 선풍기를 들고 오셔서 朴대통령에게 틀어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朴대통령은 곱슬머리』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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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씨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가지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소개해주었다. 신축한 비서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1966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이때는 전용 이발 공간이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 돼 있지 않아 더운물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이날도 陸여사가 더운물과 찬물을 양동이에 받아와 세면대에 담아 놓았는데 머리를 감던 중 朴대통령이 비눗물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허리를 다쳐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다는 것.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타일이 부착돼 있지 않은데다 세면대도 낮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朴씨는 당시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이처럼 낡은 시설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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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 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 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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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reporter/writerboardread.asp?idx=28&cPage=16&wid=soonj

청와대 이발사가 본 「인간 박정희」; 『어르신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송승호 200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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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잡으러 다니는 대통령




박대통령은 무거운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하고, 부채질을 했었다. 지독한 대통령이었다. '에어컨은 관광호텔에서 외국 관광객에게 외화를 벌어들일 때나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부속실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워서 에어컨 대신 환풍기를 개조해서 시원한 바람이 돌게 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을 에어컨 켠 것으로 잘못 안 박대통령은 저녁을 먹으면서 근혜씨에게 '오늘 낮에 에어컨을 켰던데 앞으론 절대 못하게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에어컨 대신에 집무실 창문이 열러 있는 때가 많았다. 덕분에 곧잘 파리가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는 대통령을 귀찮게 했다. 그럴 때면 대통령은 파리채를 들고 파리사냥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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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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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전기 절약하세요' ...... 어두워서 한번은 이마를 받은 적 있어요. ......... ]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함께 지냈지만 '말벗' 못 돼…못 배운 나보다 더 불행한 朴 전 대통령"



최보식 선임기자

2017.05.08



[박근혜 前 대통령과 관저에서 지낸 유일한 인물… '청와대 요리연구가' 김막업씨 단독 인터뷰]


"朴, 넓은 관저의 복도에 '전기 절약' 위해 불 꺼

해외 순방 떠날 때도 '전깃불 꼭 끄세요' 당부"

"외부 일정이 없으면 올림머리나 화장 안 해, 머리를 뒤로 묶고 두건 써
세월호 아침 때 미용사 안 와"



"언론에서 '청와대 관저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대통령의 '말벗'으로 모든 비밀을 다 알 거다'라며 보도됐어요. 이 때문에 많이 시달렸어요. 저는 배운 게 없어 언론에 나오면 다 믿었는데, 이번에 겪어보니 엉터리 뉴스가 너무 많았어요."


김막업(75)씨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아들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높은 인기를 끌었고 '최고의 요리비결' 등의 책을 펴낸 요리연구가였다. 그런 그가 소리 없이 청와대 관저에서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지내온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마음이 아파요. 함께 지낼 때 그분은 늘 '전기 절약하세요'라고 했어요. 넓은 관저의 복도에 전등을 끄는 통에 힘들었어요. 어두워서 한번은 이마를 받은 적 있어요. 해외 순방 떠날 때도 '이제 좀 쉬세요. 전깃불 끄는 거 잊지 마세요'라며 단 두 마디를 해요.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이런 것까지' 하는 마음이 들지요. 그렇게 절약 정신이 있는 대통령이 뭐가 더 필요해 돈을 받으려고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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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7/2017050701675.htm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함께 지냈지만 '말벗' 못 돼…못 배운 나보다 더 불행한 朴 전 대통령"

최보식 선임기자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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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빅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 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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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516.co.kr/parkchunghee/humanpark_view.php?seq=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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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이병철의 대화


-월간조선 조갑제, 이동욱 기자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은 1961년6월27일 박정희 부의장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그는 부정축재자 11명의 처벌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부정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 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전시 비상사태하의 세제 그대로입니다.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박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 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왔습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의 유무를 가려서는 안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업을 확장해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하여 그것을 키워온 사람은 부정축재자로 처벌대상이 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축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운용, 국민교육, 도로 항만시설등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박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박 부의장은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 > ('호암자 부').




박정희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차렸을텐데 풀어주지"

"안됩니다. 아직 정신 못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도라무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박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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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8820&C_C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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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1일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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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자신의 첫 저서를 펴냈다. 1962년 3월 1일에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 277쪽에 이르는 이 책은 몇 사람의 학자들이 代筆(대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머리말은 박정희의 글이다. 이 글은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전략과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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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更生(갱생)의 길이 없을까. 이지러진 민족성을 고치고 건전한 복지 민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없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無事主義(무사주의), 安逸主意(안일주의)의 생활태도를 청산하여 근면한 생활인으로 ‘인간혁명’을 기하고 사회개혁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혁명이라는 수술만으로 환자가 元氣(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며 病因(병인)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건강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이 다시 오지 않도록 恒久的(항구적)인 方略(방략)과 기초공사를 해놓아야 한다.



이 길이 어디 있을까. 꼭 있을 것이다. 이 민족의 걸어온 길과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에 내키는 대로 몇 줄씩 메모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 되어 나왔다. 敍述(서술)은 무디고 서투르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단편적이나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난날 우리 民族史上(민족사상)의 惡遺産(악유산)을 반성하고 李朝(이조) 당쟁사, 일제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國民道(국민도)를 확립하는 일이다. 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社會再建(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농민들의 기나긴 빈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 재건을 위해 있는 힘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누적된 빈곤을 하나씩 추방하고 공업화된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經濟自立(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勝共(승공)의 길이다.



북한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하여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創發性(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中道而廢(중도이폐)하는 ‘토끼’보다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북이의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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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달러로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하위)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남미식)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부자)나라가 아니면 民主(민주)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 56%의 사망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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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現代史는 인류 최고의 업적
이 소책자를 학생들에게 선물 합시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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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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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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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률 40%에 육박. 1인당 국민총생산(GNP) 79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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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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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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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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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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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身勢(신세)될 새 學士 二萬餘名 (학사 이만여명)


1960.11.16 경향신문 3면


.... 심각한 취직난에 봉착하고 있으나 문교부는 새학사들의 배출을 앞두고 이들의 취직에 아무런 대책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다만 각학교에 대하여 직업보도에 대한 알선을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년과 같이 문교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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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는 서독 루르 탄광지대로 떠나는 광부 123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인구 2400만 명, 실업자 250만 명,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 54개, 1인당 국민총생산(GNP) 87달러.

가난이 이 땅을 휘감아 호구지책(糊口之策)마저 어려웠던 그 시절. 월급 162달러 50센트(650독일 마르크)는 대졸자까지도 이주 노동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에 나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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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931427

[그때 오늘] 경제성장의 숨은 주역, 독일로 간 광부들
[중앙일보] 입력 2009.12.20








朴大統領(박대통령)의 経済学(경제학)


1967.06.28 경향신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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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오프」(跳躍(도약))의 달성은 61년부터 66년까지 1차 5개년 계획기간중의 GNP(국민총생산)의 年平均成長率(연평균성장률)이 8.5%였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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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슬픈 遺産(유산)『보리고개』안녕 ]




韓國農村(한국농촌)을 울리는 季節病(계절병) 絶糧(절량)의 봄고개

1965.02.10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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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지고 있으며 보건사회부는 예산확보에 골몰하고 있다.

절량지대의 공통적인 현상은 ① 고리채의발호 ② 離農(이농)·도시집중 ③ 草根木皮(초근목피)의 몸부림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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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遺産(유산) 『보리고개』 안녕


1967.04.06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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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논밭 늘리고 營農改善(영농개선)에 앞장 서 한치의 땅도 效用(효용)있게

해마다 봄이 오면 밀어 닥쳤던 춘궁기


....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역사도 있어 실로 보리고개는 뼈저리게 고달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리고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아무리 높은 보리고개라 하더라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마을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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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2. 엥겔계수 41.5 %


[ .....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 ]


前期比(전기비) 4.3% 增加(증가)

3/4分期家計動向(분기가계동향)



1967.12.14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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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支出内容(지출내용)을 보면 食料品(식료품)비에 지출하는 비율(엥겔係数(계수))이 41.5%로 1년전보다 7.4%가 낮아진 반면 文化費目(문화비목)인 雜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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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力開發(인력개발) (2) 人力形成(인역형성)


1967.11.13 매일경제 2면


失業者(실업자)가 득실거리는 한켠에서 技術者(기술자)「스카우트」가 성행하는 현상은 経濟計劃(경제계획) 혹은 企業活動(기업활동) 자체에도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을지 모른다. 實需要者(실수요자)부담의 ...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1968.02.16 경향신문 3면


建設會社(건설회사)서 鐵道(철도) 技術者(기술자) 스카우트戰(전)

철도청의 일류기술자들을 상대로 각건설회사가 스카웃전을 벌이고 있다. 15일 철도청에 의하면 京釜(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은 각건설회사...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1968.01.24 경향신문 6면



넓어지는 就職(취직)의 門(문)

工(공) 專女商(전여상) 등 거의 百(백)%나

業體(업체)수요 늘어 卒業前(졸업전) 스카웃戰(전)도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비유됐던 취직의 좁은문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다. 공업입국정책에 따른 산업구조의 확대로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자와 이공계 및 경상계의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작년에 이어 현저히 높아져 가고 있다.교문을 나서는 이들의 취업실태를 살펴본다.


취직난 진학난은 졸업기마다 듣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취직걱정 따위는 안해도 좋은 우울하지 않은 곳이 있다. 실업고교졸업생들이 바로 그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부분의 실업고교 졸업예정자들은 취업률이 거의 백%에 육박 , 취직당사자들이 직장을 고르고 있는 형편이며 업체나 공장은 오히려 우수한 졸업생을 찾아 학교측에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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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업체들이 이들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그후 줄곧 의뢰에 응하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실업고교장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사람이 없어서 못가는 취직난의 이방지대가 분명하다.


상업고교의 경우도 비슷하며 실업계 여자고교의 경우도 취직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서울여상은 진학자와 가정에 들어 가려는 학생을 학교측이 설득해 직장으로 권유할 정도로 사람이 모자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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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 6면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2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






公務員退職(공무원퇴직) 激增(격증)문제


1968.07.10 경향신문 2면


.... 그중에서도 教育公務員(교육공무원)을 主(주)로하는 文教部(문교부)의 離職者數(이직자수)가 首位(수위)이고 다음은 警察官(경찰관)을 主... 그들의離職(이직)을 막을道理(도리)가 없겠다는 것을 새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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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19. 김신조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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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을 집어먹은 禹 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 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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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88673

경찰이 맨몸으로 무장한 공비에 수갑을 채우다!
46년 전 오늘, 무장공비는 청와대로!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 최종편집 2014.01.20







1968


[ ......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


......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 ........

......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 ]




김일성의 기만알았다 자수공비 조응택 회견


[중앙일보] 입력 1968.12.14




무장공비잔당 가운데 지난7일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북괴군124군소속 중위 조응택(24)은 14일상오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이 동족을 학살하라고 살인마 되기를 강요, 민족의 분노를 느껴 자유대한으로의 자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는 북괴124군3기지 1중대1소대3분대소속 소환으로 지난11월초 울진지역에 침투한 60명조와 함께 상륙했다가 지난달 1월11일과 15일·27일 3차례에 걸쳐 아군합동작전부대와 교전, 15명조중 9명이 죽고 단독분리되어 헤매오다 아군작전부대에 자수해온 최초의 공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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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수동기는


답=김일성선전으로는 남한의 생활상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은 판잣집일뿐더러 농촌농가의 항아리는 거미줄이 쳐져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나마 침투된후 배가고파 농가에 내려가서 밥을 훔쳐 먹을때 따뜻한 이밥이 언제나 있었고 항아리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또 화전민이라는 농민들이 북한에서는 신사같은 옷을 입고 있어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김신조가 직접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듣고 자수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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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비들의 양민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나

답=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라는것이 지령이었다. 동족을 무차별 살상하니 민족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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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유대한의 느낌은

답=자동차가 너무 많아 전차까지 철수될 정도니 듣던 것과는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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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18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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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신혼생활을 하던 나는 안해(아내)가 밤일을 하면 아침밥을 내가 하였는데 정량대로 밥을 한 다음 안해의 두끼 분 밥을 푸고 나의 점심밥 변또(도시락)를 싸고 나면 나의 아침 밥이 반 그릇도 못되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다음 냠냠해서 변또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빈 변또를 들고 출근할 수도 없고 또 집에 가자니 안해가 알 것 같아서 그 빈 변또 보자기를 집밖에 감춰놓고 출근하였다. 그런 날은 물론 점심을 굶었다.



700이라는 배급 기준량을 타먹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그 절반의 기준량을 받는 노인들이나 가정부인들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는 배고픈 사회주의로부터 아사식 사회주의로 구걸식 사회주의로 전변되었다. 이것도 성과라면 당연히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성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배급제도하에서 자기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선택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북한인들은 게걸증이 들어 항상 먹었으면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모든 북한인민들은 항상 식전이다. 마치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골목들을 누비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개들과 같이 식욕의 포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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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는 1968년으로 보았다.




1969년 정보부는 북한의 경제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을 처음으로 벌였다. 그때 북한국장이던 강인덕(康仁德)씨(현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가 지휘자가 되고 경제과장이던 정(鄭)모씨가 실무책임자가 되어 특별반을 편성, 심도 있게 북한의 국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공개된 자료와 정보부에 축적된 자료분만 아니라 외국에서 북한제 트랙터·기계류·공구류 등 현물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 기계·공구류는 공법연구소 등에 맡겨 전문적 평가를 하도록 했다. 외부의 평가팀을 과학기술자7 : 경제학자3인의 비율로 조직하여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깊은 연구가 되도록 하였다.



1970년 말에 끝난 이 북한경제력평가에 약2년간 동원된 인원은 안기부, 국방부, 정부연구소, 민간연구소 등 1천명쯤 되었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작업을 통해서 북한경제의 문제점뿐 아니라 북한체제를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74년 신직수(申稙秀)정보부장은 이 종합평가를 「남북한경제력비교」란 아홉 권(약7천 페이지)의 책으로 발간하여 관련 부서에 나눠주었다. 아직 학계나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비교는 북한의 시설이 1백%의 가동률을 보인다는 가정하에서 이뤄졌다. 실제가동률은 그보다 훨씬 밑돌고 있으며 최근에는 생산성의 격차가 더욱 커져 철강생산성의 경우 북한은 남한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9∼1970년의 「정보부-북한경제력평가」는 그때 경제관료들이 알고 있던 북한경제력이 상당히 과장돼 있음을 밝혀냈다고 한다.



정보부의 평가는 1970년의 남한국민총생산은 75억5천만 달러, 북한은 29억2천만 달러, 1인당국민소득은 남한이 2백23달러, 북한은 2백9달러로서 남한이 벌써 압도적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기획원과 통일원은 1인당국민소득이 북한을 앞지르게 된 연도를 1974년으로 보고 있는데 정보부는 1968년으로 보았다. [주: 그러나 국제적으로 알려진 잠정통계수치는 169(남) : 266(북) 달러로 알려져 있다. 실제와 수치간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는 것이다.]



정보부의 평가서는 또 북한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화학공업 우선 투자정책」이라는 견해를 냈다. 군사목적의 중화학공업육성책을 추진하면서 1940년대 식의 낡은 설비와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경공업을 무시한 채 막대한 고정투자를 했으므로 생산성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경공업을 먼저 일으킨 바탕에서 외국의 최신 중화학공업기술을 도입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1970년대부터 압도적 생산성으로써 크게 격차를 벌여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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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제개발의 신화를 가꾸었던 김정렴 (金正濂.74.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은 단순히 경제차원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통일,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까지 모두 경제에서 나온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기에 사실 그의 통치철학 전부나 마찬가지" 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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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 ]


[....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 ]


[....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 ]






국운을 좌우한 위대한 선택


이근미 (자유기고가)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두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두 정책, 그러나 이중 하나에는 한 국가의 명암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열쇠를 쥐어야 문이 열릴 것인가 그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출주도 정책은 한 마디로 위대한 선택이었으며 결코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카드였다. 우리나라는 귀중한 카드를 쥐기 위한 위대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지금 선진국문턱까지 왔다.



61년, 5.16 주체세력들이 빈곤타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을 때만해도 그것은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당시 상황은 1인당 GNP 82달러, 수출 4천1백만 달러로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외국 자본들이 점점 철수를 하고 5.16 세력에 불만이 많던 미국마저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 AID(미국 국제개발국)가 지원하는 각종 미국측 원조자금이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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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공팀과 최고회의가 예산문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마찰을 빚었는데 바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문제였다. 최고회의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의 입장도 수입대체 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유?비료?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보리 등 생필품의 상당부분까지도 수입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당장 수입대체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발간한 「무역의 날 30년사」에는 50년대 상황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농산물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정부는 이를 활용하여 밀가루 섬유 설탕 등 소위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수입 대체적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구호물자를 원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이들 산업이 노동집약적이고 저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며 국민경제적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입대체적 정책으로 인하여 50년대 전체의 수출액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2천만 달러 내외에 그친 반면 수입대체를 위한 기계류 및 원자재수입과 농산물 수입등으로 수입은 3~4억 달러에 달하여 무역수지 적자폭은 연간 3억 달러를 상회하였고 이는 미국의 원조자금에 의하여 대부분 충당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원식씨(최고회의 재정위원장)등 최고회의 핵심 주체세력들은 수입대체산업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 속에 종합제철 공장 건설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공업을 먼저 건설하여 수입대체를 해야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연 우세했다.



이에 대한 상공부의 의견은 우선 비교우위가 있는 경공업을 육성하여 수출산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수입대체와 수출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상공부는 이 결정을 앞두고 일본 시찰을 다녀오는 등 여러가지 검토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철강수요는 약 10만t이었고 공장을 세운다면 30만t의 규모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갔으나 막상 일본에 가보니 상황은 예상과 딴판이었다. 최소한 1백만t 규모가 아니고서는 종합제철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30만t은 뒷골목 대장간 수준에 불과한 지경이었다.




상공농사(商工農士)만이 살길



박충훈 상공차관을 비롯한 상무팀이 박정희 의장 앞에서 브리핑을 한 끝에 수입대체보다는 수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공부에서 수출을 강조하면서 박의장을 설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철강공업을 예로 들자면 막대한 투자로 건설한 공장이 수출산업으로서 국가 경쟁력이 없으면 지탱해 나가기 힘들다. 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수출하지 못할 경우 국내에서 국제시세보다 훨씬 비싼 물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한다. 수출을 안하면 외화를 벌 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를 사올 수 없다. 그렇게되면 어쩔 수 없이 저개발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출 지향적 경제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해 수입 대체형은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수출제일주의는 자유기업, 시장경제 원칙과 자유민주주의 창달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박의장은 자신의 통솔 목표와 일치한다며 상공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릿고개를 타개하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원자재를 들여와서 가공수출을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상공부의 의견에 전적인 찬성을 표했다.


『박대통령을 따라 기차편으로 지방 순시를 간 적이 있어요. 기차 안에서 박대통령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공이 상을 앞서 공상농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박대통령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무엇하느냐, 팔아야 되지 않느냐, 그러니 역시 공보다 상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박충훈씨는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고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제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그가 수출전략의 최선봉에 서서 지휘를 하였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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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우고 점점 줄어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수입대체 전략 수립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인도가 수입대체를 당면목표로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철공장을 짓는 등 경제부흥의 기치를 내걸어 경제개발의 시범케이스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수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로 비쳐졌다. 사실상 상공부도 수출이 안될 때를 대비한 방안이 전혀 없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공무역을 한다지만 수출이 안되면 원자재 값은 어떡할 것인가, 한 치 앞을 기약할 수 없을 때였다.



수출주도로 정책이 결정이 되었으나 결정을 하였다 하여 산적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출할 물건을 만들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 외화획득의 주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천연자원 수출과 미8군과 관계되는 사업이 전부였다.


『미8군내에 건설, 물품, 용역 등 세분야의 군납을 따내 외화를 벌어 들였는데 현대의 정주영씨가 건설공사를 따내서 4,5천만 달러, 한진의 조중훈씨가 용역을 따내 3,4천만달러를 벌어들였죠, 미8군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수입이 중요한 외화 벌이가 됐을 정도니 외화벌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이 갈 겁니다』


당시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선씨(현 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의 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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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만이 살길입니다』



박충훈 당시 상공장관은 재임용되어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상공정책에 관하여 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 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격려도 해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갖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박장관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쾌히 응낙을 했다.

박대통령은 그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 상공부에서 수출지원책을 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일사천리로 시행되곤 했다. 정부조직법상 윗자리에 있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서 상공부가 내놓은 시책의 뒤치다꺼리나 하느냐는 불평이 있을 정도였다.



상공부 장관 시절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하는 박충훈씨는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의식한 탓인지 자신은 수출 엔진에 시동을 건 사람 정도로만 비쳐달라고 주문한다.

『박대통령이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참모자에 불과했습니다』


오원철씨는 당시 분위기를 딱 한마디로 표현했다.

『국시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공업입국이었죠』

외환보유고 겨우 9천3백만 달러로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 수출하지 않으면 외화를 벌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다고 덧붙인다.



박장관은 대통령에게 수출 목표를 1억 달러로 약속하고는 상공부 취임식에서는 1억2천만 달러로 늘려 발표했다. 그만큼 분발하자는 의도였다. 상공부의 수출진흥책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무역업무에 대한 애로 타개와 장려책이고 둘째는 수출품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책이었다.

우선 잠시 중단되었던 수출입 링크제와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를 부활시켰다. 수출입 링크제는 공산품 수출을 촉진시켜 우리나라 공업화의 기폭제 구실을 하게 한 제도이다. 당시 이 제도를 발판 삼아 현재의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도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



당시는 항상 달러가 모자라 수입이 이권화 되다시피 했다. 환율이 1백30대 1이었을 때 1달러분의 물건을 수입하면 1천원이 되는 품목도 있었다. 수입허가만 받으면 당장5~6배의 장사가 되던 때였다. 당시는 수입을 하려면 반드시 상공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입달러를 배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출입 링크제란 바로 수출한 사람에게 수출액의 1백%에 해당하는 수입권을 주는 제도였다. 다만 어떤 물건이건 다 수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역계획에 책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가장 수출을 많이 한 합판을 예로 들자면 90%가 원자재이고 가득액은 10%밖에 안되는데 1백%의 수입권을 주는 것은 부당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으나 상공부는 그대로 강행했다.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수출품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고용을 늘려, 그로 인해 초기단계에서 국제시장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수출하면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얼마 되지 않은 국내자본이나마 공업분야로 몰릴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약간의 적자 때문에 수출을 못하던 품목도 제도 때문에 수출을 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수출기반이 약한 공산품의 수출에 도움이 되었다.



소요량 증명이란 기술소득제도로서 원료를 들여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때 거기에 드는 원자재 수입을 인정하고 관세를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예컨대 원자재 열 개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었을 때 알뜰하게 하여 두 개가 남았을 경우 그 두 개에 대해서 기술소득이라 하여 면세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재료가 덜 들도록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엄밀히 따져 위법이었다. 박대통령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에 힘입어 시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출한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더욱 수출을 늘리게 하는 한 방편이었다.

박충훈씨는 이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어느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시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상공부는 64년부터 매년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마련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당시 시책을 살펴보면 외화획득 기업의 수출소득과 수출활동에 대한 사업소득세 및 법인세 및 법인세50% 감면, 수출용 원자재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수출금융의 특별 저리지원, 해외시장 정보의 수집 및 시장개척을 위한 무역진흥공사(KOTRA)와 중소기업을 위한 무역협회 산하 소액수출 전담회사인 고려무역 설치, 수출품 생산업체의 육성, 수출유공업자(생산업체의 기능공 기술자 세일즈맨 포함)에 대한 국가 상훈법에 의한 훈장포상 수여 등이 있었다. 수출진흥 종합시책 16개목표 중 제3항의 목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무엇이든 내다 팔아라


「수출하여야만 이익이 된다는 상식을 무역상사 및 기업가가 갖도록 무역행정을 집행한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들에게 수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수출이야말로 돈 버는 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수출에 매달렸죠. 그저 국내시장만 생각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수출 장려제도를 보고 너도나도 무엇이든 팔려고 애썼어요. 가장 큰 소득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수출 장려제도가 전 국민에 널리 퍼진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고 박충훈씨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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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때 모두 미쳤었다』



마침내 1964년 12월31일 10시경 1억2천만 달러의 수출목표가 달성되었다. 수출대금이 1억2천90만 달러가 입금된 것이다. 5개년 계획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1966년에 1억1천7백50만 달러를 수출할 계획이었는데 목표가 2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바로 7개월 전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 시름에 잠겨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수출통계 숫자를 집계하여 수출목표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리던 박대통령에게 목표 돌파를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전 직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사무실에서 만세를 불렀다. 통행금지가 거의 다 되었을 때야 비로소 퇴근을 서두른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위에서부터 이래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었죠. 최고지도자께서 적극 지원하니까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신바람이 나야 성과가 큽니다.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박충훈씨는 그 신바람의 근원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지원과 신뢰였다고 말한다.



『당시 상공부는 환상의 팀웍을 이루었어요. 복지부동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했죠. 며칠씩 밤을 새는 건 보통이었어요. 퇴근시계가 땡 하면 퇴근하는 공무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우르르 달려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사기를 북돋웠죠. 선후배 관계가 아주 돈독했죠.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을 뿐 위로부터의 압력이란 없었어요.


그리고 인사가 아주 공정했어요. 낙하산 인사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결원이 생기면 평소 일 잘하는 직원을 눈여겨보았다가 서로 데려 가려고 했죠. 여름에는 아예 퇴근도 안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붙이고 나서 다시 일어나 일했습니다. 그때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너무 설치는 분위기 였어요. 모두들 열에 들떠서 신들린 듯이 일했습니다』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당시 최상의 콤비플레이를 벌였던 사람들은 상역 사이드에는 차관보, 김우근 국장, 심의환 상공과장, 문기상 진흥과장 등이었으며 기술계통으로는 오원철 공업1국장, 엄익호 공업2국장, 안영철 섬유과장, 이상섭 중화학과장, 류각종 경공업과장 등이었다. 문기상씨는 똑똑한 계장들이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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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상씨와 박충훈씨의 회고에는 공통적으로 신바람이라는 얘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정책을 세워 주관해 나갔을 뿐이고 국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열심히 따라준 덕분이지요. 그리고 첫째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확고했고 우리나라가 융성기에 접어들어 운이 크게 따랐던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충훈씨는 그 당시의 감격이 아직도 새롭다고 전한다.




박대통령 야전사령관 자처



1964년 수출진흥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전담하는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한 데 이어 1965년부터 수출진흥회가 개최되었다. 애초에 이 회의는 국무총리가 주재했었다. 제1회 회의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주재하에 중앙청에서 열렸으나 제2회부터 청와대 응접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에 회의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수출진흥 확대회의로 개칭됐다.


김정렴씨는 제1차 경제개발 계획추진에 있어 국가원수가 계획사업 하나하나를 항상 챙기고 정부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애로를 타개하도록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점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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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연평균 26.3% 증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된 66년 말 수출은 2억5천만 달러를 달성하고 연말 외환보유액도 2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1차 연도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2차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이 핵심적 사업으로 결정되었으며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수출은 64년부터 92년까지 연평균 26.3%가 증가, 같은 기간 중 대만의 20.9%보다 높은 증가세를 유지해 왔다. 64년에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이 71년에 10억달러, 77년에 1백억 달러, 81년에 2백억달러, 85년에 3백억 달러, 88년에 6백억 달러를 돌파하는 수직상승세를 이루어 드디어 지난해 1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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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무원들의 충성, 투철한 열의에 놀랐다. 대통령의 지시가 장관에 떨어지면 ...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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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국의 고속 경제성장의 비결을 발견한 듯했다. 공무원들의 충성, 투철한 열의에 놀랐다. 대통령의 지시가 장관에 떨어지면 장관은 바로 해당 간부회의를 열고 담당 차관보, 국장, 과장, 사무관들은 그때부터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지식이나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헌신적 노력, 열의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구본호 전 울산대 총장은 1970년대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시절 옆에서 지켜본 공무원을 이렇게 회상하며 우리가 고속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공무원의 열의와 충성’을 꼽았다. 한국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압축 성장을 하면서 빠르게 근대화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밤낮없이 조국에 헌신했던 공무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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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1.


수출 1억 달러 돌파 감격의 눈물 흘린 박정희

“ 봐라, 되지않나 … 이제 시작” …


“라면 만들 돈 좀 구해달라” JP 설득한 전중윤의 배짱, 서민 굶주림 해결에 큰 공헌



[중앙일보] 입력 2015.07.3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4> 박정희와 수출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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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원이
2020-05-04 0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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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2020-05-04 07:02:28


1964.12.1.


수출 1억 달러 돌파 감격의 눈물 흘린 박정희

“ 봐라, 되지않나 … 이제 시작” …


“라면 만들 돈 좀 구해달라” JP 설득한 전중윤의 배짱, 서민 굶주림 해결에 큰 공헌



[중앙일보] 입력 2015.07.3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4> 박정희와 수출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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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국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깃발을 내걸었다. 62년 1월, 목표연도(66년)까지 수출을 1억1750만 달러로 늘린다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61년도 수출액이 겨우 4200만 달러였으니 1억 달러 수출은 꿈 같은 일이었다.


64년 12월 1일 박충훈 상공부 장관(훗날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권한 대행)이 박 대통령에게 “어제 날짜로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 소식에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장래를 내다보는 리더가 앞장서서 이끌어나간 결과였다.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한 11월 30일은 ‘무역의 날’로 제정됐다.



그때부터는 부가가치 높은 제품을 수출해 돈을 벌자는 의욕이 한층 높아졌다. 65년부터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달 열렸다. 이 회의엔 정부와 여당을 비롯해 경제단체와 금융기관·종합상사·연구기관까지 1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수출 전망과 증대 방안을 보고받고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방안을 도출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나면 대통령은 회의장 주변에 진열된 수출상품을 일일이 살펴보며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이어서 오찬을 함께하며 기업인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기업인을 중히 여겼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전통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기업인들을 가장 선두에 세워 우대했다. 명분을 앞세우는 사(士) 위주였던 한국 사회에서 실용의 기업가 정신을 앞장 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낡은 의식구조를 뒤집자는 것이 바로 5·16 혁명의 정신이었다. 요즘엔 그 기업가 정신이 다소 쇠퇴하는 듯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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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358227&cloc=olink|article|default







[.... 1964년 12월 5일 ......


... 수출 1억달러 달성과 ‘수출의 날’제정을 치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 ]




[.... 업체와 근로자들도 ‘수출해야 먹고산다’는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일했다 ........ ]





1억 달러 수출탑의 감격 - 1억 달러 기적에 온 국민 목 메었다



▣ 출처 문화일보 ▣ 글=백상진기자



“오늘 우리는 평소의 숙원이던 억대수출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수년간 수출증진이라는 국가지상의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정부와 경제계, 그리고 일반 국민이 비상한 각오로 수출증진에 온갖 정력을 경주한 결과입니다.”


1964년 12월 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수출의 날 행사. 사상 최초의 수출 1억달러 달성과 ‘수출의 날’제정을 치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수출유공자와 정부, 무역협회 관계자들로 가득 메운 행사장은 환호와 기쁨의 열기로 가득했다. ‘수출실적 1억불 돌파’ ‘오늘의 수출 내일의 번영’ ‘수출늘려 자립하자’ 등의 구호가 기념식장에 내걸리고, “지혜와 땀방울을 함께 쏟아서 모두가 뛰어난 우리 제품을 만들자, 내보내자, 벌어들이자. 번영에의 외길은 수출뿐이다”라는 ‘수출의 날’노래가 울려퍼졌다.


수출 1억달러 달성의 의미는 컸다. 6·25전쟁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온 우리나라가 수출주도형 공업화 발전전략을 굳혀 수출입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이웃나라 일본이 수출 54억달러였고, 필리핀·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가가 5억~6억달러, 심지어 북한이 2억달러가 넘었다.



수출을 총괄했던 박충훈(2001년 사망) 전 상공부 장관은 회고사에서 “자나 깨나 수출에만 골몰했고 직원들도 미친듯 신나서 일했다”며 “새로 수출할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저 물건을 어떻게 하면 수출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큰 노심초사였다”고 회고했다.


그해 12월 31일 오후 10시쯤 우리나라는 목표액 1억2000만달러(입금베이스·결제기준 1억1900만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은 ▲원료별 제품, 즉 의류와 직물 등 공산품 4200만달러 ▲잡화류 900만달러 ▲기계류 200만달러 ▲화학제품 100달러 ▲식료품 2500만달러 ▲비식용 원재료 3200만달러 ▲광물성 연료 2500만달러로 1차상품과 경공업 제품이 주류를 이뤘다. 수출시장도 일본 등 동남아지역 중심에서 미국, 유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상공부에서 경공업 수출을 진두지휘했던 오원철(77) 전 공업1국장은 “장관으로부터 공업제품의 수출을 총책임지라는 특명을 받고 조직을 수출체제로 전환해 죽어라고 뛰었고, 생각도 뛰면서 했다”며 “얼마나 힘들었던지 밤에 술마실 때 ‘사랑의 노래’를 ‘수출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부를 거예요’라고 개사해 불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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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출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열어주고, 독려했다면 상품을 팔아 달러를 벌어온 것은 역시 수출업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출의 날 포장과 표창을 받은 20개 업체가 단연 빛나는 주역이었다.



당시 수출실적 1위였던 삼호무역을 비롯해 천우사·영풍상사·동명목재상사·성창기업·판본무역·삼성물산(이상 대통령식산포장), 한국합판협회·대한방직협회·한국해태수출조합·한국생사수출조합(〃 대통령단체표창), 삼도물산·대성산업·천양산업·금성산업·대평산업·금해산업·이천물산·대흥광업·극동철강공업(〃 국무총리표창)이 수출 유공자로 선정됐다.


이들 업체는 상훈법에 따라 67년부터 전년도 수출실적이 전전년도 수출실적을 하회하지 않는 경우 ‘청색무역업자’로 분류돼 관세의 담보를 전액 면제받고 세무사찰을 전면 완화하는 특혜까지 받았다.



60년대 중반부터 섬유·직물류를 수출했던 ‘동국무역’ 백영기(72) 전 회장은 “대통령이 수출업체에 대한 지원과 독려를 아끼지 않았고 업체와 근로자들도 ‘수출해야 먹고산다’는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일했다”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수출을 급신장하도록 이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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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억달러 달성에 ‘여전사’들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1963년) 제조업 종사자 40만명중 섬유공업이 11만명이었는데, 거의가 여공들이었다. 오 전 국장은 “너무나 가난해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뿐이었던 시절 여자들이 길쌈하고 삯바느질해 만든 제품을 부자나라에 팔았다”며 “수출 1억달러 달성은 젊은 처녀들의 가냘픈 손끝으로 이뤄낸 기적”이라고 말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상공부에서 수출진흥 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신국환(무소속·전 산업자원부 장관)의원은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7년)을 추진하기에 앞서 수입대체형이냐, 수출주도형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며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의장께서 ‘수출로 가자’고 마지막에 결론을 내려 개발파·수출파가 승리하고 수출1억달러를 달성하자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고 전했다.





1965.1.


[ ..... 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한다 ....... ]



무역전쟁에서 이기자

1965.01.30 동아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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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한다고 한 대통령의 주장은 털끝만큼도 과장이 없는 표현으로서 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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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 ]



“박 대통령, 경제 살려 차관 갚겠다며 눈물로 지원 호소”




1964년 12월 8일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 공관. 3년 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과 ‘전후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 중이던 군사정부는 미국의 차관 거절로 자금이 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부와 간호사 7000여 명을 긴급 모집해 서독에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박 대통령) “각하, 우리를 믿어주세요.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우리도 독일처럼 분단국가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처럼 경제를 살려서 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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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두 정상 간 대화는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수행했던 백영훈(80·사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이 통역했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백 원장은 “그때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니히트 바이넨(그만 우세요)’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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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일행은 그 다음날 본에서 쾰른까지 20㎞ 구간을 아우토반을 이용해 이동했다. 이 구간은 1928년 착공해 32년 완공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였다. 박 대통령이 탑승한 벤츠 승용차는 시속 160㎞로 달렸다. 큰 충격을 받을 만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도중 두 번이나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 이동원 외무부 장관, 이후락 비서실장도 따라 내렸다. 아우토반을 자세히 살펴본 박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좋죠? 히틀러가 했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힘든 일입니다. 그 시절이나 가능했지….”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승한 서독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처음 건설계획 수립부터 건설 방식, 관리 방법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통역관이 전해주는 답변을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백 원장에게 “우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가서 실현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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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려 본 지 2년4개월이 지난 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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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장은 한독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G20 회의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한 걸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고단한 역사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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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285826

박 대통령, 경제 살려 차관 갚겠다며 눈물로 지원 호소”

[중앙선데이] 입력 2010.07.02

경부고속도로 출발점 한서독 정상회담서 통역 맡았던 백영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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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무렵 남대문 시장에서 ‘삼양라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 전중윤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쿠데타정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JP(김종필)를 통해 박정희에게 라면 샘플을 전달하고 라면 제조기 1대를 구입할 돈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는 총 16만 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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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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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흔히 들을수 있는 소리 가운데 엿장수의 가위소리와 머리카락장수의 소리가 있다. 나른한 여름 오후, 동네 개들마저 졸음에 겨워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땐 머리카락 장수의 구성진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

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 있다가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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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머리카락을 원모상태로 수출했습니다. ......

....원모 수출을 금지해 주시면 됩니다 ........]



[...1964년에 처음 수출되었다. 1만 4,000 달러 어치였다. 1965년도는 155만 달러로 .....

... 1970년에는 약 1억 달러로...총 수출량의 9.3%를 점했다.....의류와 합판 다음으로 제3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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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초여름, 나는 박장관을 수행하여 면회장소인 구(舊) 상공회의소 2층 간부회의실로 갔다. 그 날 면회 신청자는 5명 정도였다.


첫 번째 면회자는 서울통상의 최준규(崔俊圭) 사장이었다. 당시는 중소기업자였는데, 나는 그때 처음 만났다. 최사장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상한 물건을 내 보였다. 나일론실 같은 것을 수십개 묶어 한다발로 한 조그마한 물건들이다. 길이는 담배 길이 정도일까. 색깔도 여러 가지여서 순백색부터 조금씩 황색기를 띤 것, 순황색, 갈색까지 50~60종이 되었다.



최사장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장관님, 이것이 가발 원료입니다. 이것으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자는 건의를 올립니다. 박장관은 신기해서 만져보았다. 사람의 머리카락 같지가 않았다.
최사장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머리카락은 검은 색 아닙니까. 그래서 우선 탈색을 해서, 순백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각종 색으로 염색하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바로 염색한 우리나라 머리카락입니다.



햇볕에 반사하여, 반짝이는 우아한 색깔은, 검은 머리카락만 보아온 나의 눈에는 이것이 머리카락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최사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머리카락을 원모상태로 수출했습니다. 원자재로 일본에 판 것이지요. 가발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수공업적 작업입니다. 여자가 손끝으로 머리카락 하나 하나를 꿰매야 합니다. 지금 일본이나 홍콩에서는 가발 제조 붐이 일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한발 늦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저렴한 인건비로 맞선다면 충분히 경쟁이 가능합니다. 수출가득액도 거의 100%입니다. 인모 수출하는 것보다 가발로 만들어 수출하면 2~3배의 수출증가가 됩니다고 말했다.



박장관은 신기하기도 하고, 수출이 된다니 흥미가 커진 듯했다. 그래서 얼마나 수출할 수 있소 하고 물었다.

가발은 과거 선진국에서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인여성에게도 인기입니다.


흑인여성이 노란 가발을 쓴단 말이오

아니지요. 흑인은 검은색 가발을 씁니다. 결국 미장원에서 소비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자는 것입니다. 수요는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박장관이 최사장, 무엇을 도와줄까요하고 물으니, 최사장은 단지 원모 수출을 금지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이때가 우리나라 가발공업의 출발점이다. 박장관도 나도 가발은 아직 보지 못했을 때이다. 그 날 처음으로 가발 만드는 원료를 보았을 뿐이다.


가발은 1964년에 처음 수출되었다. 1만 4,000 달러 어치였다. 1965년도는 155만 달러로 거의 100배에 이르렀으나, 액수로는 크지 않았다. 가발업체는 7~8개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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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액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966년 1,062만 달러, 1967년 1,978만 달러, 1968년 3,055만 달러, 1969년 5,336만 달러, 1970년 9,357만 달러로 급증했다. 1970년에는 약 1억 달러로 우리나라 총 수출량의 9.3%를 점했다. 단일품목으로는 의류와 합판 다음으로 제3위가 됐다.

물론 가득액에 있어서는 단연 톱이었다. 이때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가발장사를 했다. 미국 내에서 가발 하면, 코리안을 연상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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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가발 수출

저자 오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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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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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은 박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 때였죠. 남대문에 코트라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다보면 수출목표액과 달성액이 전광판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출 많이 하면 애국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밤새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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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1972년에 한세실업의 전신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아침에 눈 비비면 나왔습니다.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잠들었고요,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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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호] 박정희대통령, 1968년 '고속도로시대' 열다


유하룡 기자 you11@chosun.com

2009.10.27




"이 도로야말로 인간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전으로써 이루어진 공사요, 우리나라의 도로 시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70년 7월 7일 대구. 박정희 대통령은 감동에 들뜬 목소리로 대한민국 도로 혁명의 새 시작을 알렸다. 총 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됐던 것이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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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그는 '아우토반'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박 대통령은 손수 도로망을 그려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밤늦게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면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 있는 서재로 데려가 직접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 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왔다. 야당 등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부유층 유람로를 만들려고 하느냐", "국가 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1967년 3월 착공된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개통되면서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울 영등포~인천 가좌동을 잇는 총 연장 23.9㎞, 왕복 4차로였다.


1968년 2월 착공된 경부고속도로의 노선, 공정 계획, 추진 방식은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다. 당시 김정렴 상공부장관은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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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과 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목표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의 결과였다 ....... ]

[...."경부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 ]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과의 회담 때문에 서독을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박대통령은 쭉 뻗은, 시속 160Km로 달리는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에르하르트 수상은 분단국가일수록 경제개발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수상의 말에 귀를 귀울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도 경제개발의 기초로서 고속도로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에 대한 기록도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보고서를 받는 등 열심이었다. 고속도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2년여 동안의 연구를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29일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공표했다. 그의 이같은 발표는 당연히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살기도 힘든 형편에 고속도로라니...

하지만 패기만만한 40대의 젊은 대통령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건설 계획 발표가 있은 다음 8개월 정도 흐른 후 비로소 착공됐다. 드디어 건설 계획 조사단이 1967년 12월 15일 발족함으로써 세계의 건설사에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며 착공 2년 5개월만에 준공을 본 경부고속도로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시공 전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먼저 떠오른 것이 공사비였다. 그 당시 경제사정으로는 장기간의 공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선 개통 후 보완'이라는 정책을 택하고 공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단기간의 공사를 계획으로 약 300억 정도의 예산을 세웠다.

그 다음 제기된 문제는 노선을 확정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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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일,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를 위한 첫 삽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야당의 비난은 처음부터 끊이지 않았고, 드디어는 1968년 5월 2일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비난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겉치레를 위한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각계 각층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고, 그 와중에 외로운 공사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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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12월 30일, 공사를 착공한지 10개월만에 서울에서 수원-오산까지의 구간이 준공되었는데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당초 예상한 시기보다 일찍 완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계 각층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었고 비판적이었다. 그러한 반응을 뒤로하고 열의를 보인 끝에 드디어 경부고속도로의 완성을 보였다.



민족의 대동맥을 뚫는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강행한지 2년 반만인, 애당초 세운 공사기간보다도 6개월 앞당겨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되었다. 서울-수원간은 68년 12월 21일에, 수원-오산간은 12월 30일에, 오산-천안간은 69년 9월 29일에, 그리고 12월 10일에 천안-대전간이 완공되었고, 대구-대전간은 그 뒤 20일 후인 12월 29일에야 개통되었다.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도로였다. 바로 1970년 7월 7일이었다.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과 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목표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진행 당시에는 1969년 9월에 3선 개헌안이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된데다 1971년의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건설자체가 정치 공사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그러한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특유의 오기로 밀어붙여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추풍령 고개에 세워진 준공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휘호를 쓴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에 애착을 두었고 큰 의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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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까지의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외국의 도움없이 순수노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에 민족적인 긍지의 원천이며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는 현존하는 역사인 것이다.








[ ....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 ]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1968년 2월1일 오전에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의 무장공비 침입 사건에 대한 위로 전문을 보내온 일본의 사토 수상에게 감사 電文을 보냈다.


이날 오후 朴正熙 대통령은 서울 영등포구 阮趾桐(現 양제동 교육문화회 관 부근)에서 거행되는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起工式에 참석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바위 산을 절개하는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폭음과 함께 다이너마이트가 작렬하면서 암벽이 쪼개졌다.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처럼 형성된 서울의 남쪽은 조국 근대화의 조류를 타기 위해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 통로 개척은 육군 220 重건설 공병단에 의해 추진되었다.



京水間 고속도로 건설공사는 행정절차를 무시한 事前공사로 진행되었다. 정상적인 행정절차를 따른다면 경제기획원에서 각 부별 예산이 배정되고(1월 말) 이 예산을 부처 별로 再배정해야 비로소 건설부 고속도로 건설단에 예산이 확보된다. 이후 재무부 國庫局으로부터 사업발주 승인을 받으면 조달 청으로 서류가 넘어가 발주가 공고되고, 건설업체들의 입찰-심사-낙찰과정을 거쳐 선발된 업체와 계약을 해야 비로소 착공과 준공 날짜가 정해지면서 착수금이 전달된다. 빨라야 5월 말에 착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陸士 8기 출신으로 고속도로뿐 아니라 소양강 댐, 京仁運河 등과 관계한 「살아 있는 시방서」라고 불리는 崔鍾聲(최종성·8代 국회의원 역임) 당시 건설부 차관의 증언.


『당시 고속도로 계획은 2차 5개년계획 연도 안에 완성해야 3차 5개년 계획 때 이 도 로를 이용한 경제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겁니다. 朴대통령이 원하던 기간內에 건설해야 한다는 임무가 朱源 건설부장관 이하 직원들의 가슴속에 사명감처럼 와 닿아 있었지요.

또 다른 문제는 당시 重機를 다루는 업체가 30個社나 투입되는데, 이 重機들은 모두 상업 차관 5000만 달러로 도입한 것 들이어서 행정 절차를 기다리며 놀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자만 해도 어딥니까. 게다가 토목공사는 해빙기인 2월부터 5월까지가 최적기입니다. 雨期도 없고 땅도 잘 파지거든요. 이런 이유로 朱源 장관이 밀어부친 겁니다』



기공식에 참석한 朴正熙 대통령은 致辭 도중 1·21 사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아무리 우리 국민이 自由와 평화를 사랑하고 남북 통일을 전쟁수단에 호소하지 않 는다 하더라도, 은인자중하는 데는 限界가 있다는 것을 엄숙히, 그리고 分明히 북괴에게 경고한다』고 그는 말했다. 朴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처음으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一面 국방, 一面 건설의 구호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대한민국의 건설이 빨리 이루어 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가장 위협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배가 아파하는 자 들이 이북에 있는 金日成 도당들입니다.


그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공산당은 입으로는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표와 전략은 해방되던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 그들의 기본 전략이 무엇이냐 하면 전쟁 준비를 해서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해서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입니다(중략).


우리는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이 건설 사업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 주의자들과 투쟁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 나가는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중략).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든 국민 앞에서 북한에 있는 金日成 괴뢰 집단들에 게 한 가지 경고를 해 둡니다. 아무리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전쟁 수단에 호소하겠다는 그러한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은인자중하고 자체하고 인내하고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와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을 북한 김일성 괴뢰 집단들에게 우리는 엄숙히, 또한 분명히 경고를 해 두고자 합니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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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金日成의 도전으로 한국이 위기에 빠질 때 朴正熙 대통령은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유명한 구호를 내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런 구호가 나온 것은 1968년1월21일 金日成이 보낸 무장특공대가 청와대를 습격하여 朴대통령을 죽이려다가 문전에서 저지되어 온 나라가 戰時 상태로 돌입했던 긴박한 시점에서 치러진 경부고속 건설 기공식에서였다.

서울 영등포에서 있었던 기공식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대한민국의 건설이 빨리 이뤄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가장 위협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배가 아파하는 자들이 이북에 있는 金日成 도당들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나가는 ''싸우면서 건설해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金日成이 朴正熙를 죽이려고 한 1.21 사태에 대한 최초의 응전은 향토예비군 창설이었다.

''향토예비군의 노래''에도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는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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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도 확보안된 민간인 용지 582만 7,000평은 지주와의 합의로 사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민심은 한없이 순후했었다. 고속도로 용지대금을 낮추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로 생각됐고, 백성들도 그렇게 믿고 따랐다.

582만 7,000평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원이었으니, 평당 평균 236원으로 매수한 것이다. 아무리 30년 전의 일이라해도 믿을 수 없이 싼 값이다. 담배 한 갑에 40원(파고다), 쌀 한가마에 4,350원 하던 때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정확한 착공일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착공일자는 68년 2월 1일이지만, 서울_오산간의 공사는 그보다 훨씬 앞선 67년 11월 시작됐다. 단 한 푼의 예산 뒷받침이 없는 사전공사였다. 또 이 공사는 초기 설계도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됐다.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현시키고 싶은 박대통령의 조급한 심정 때문이었다.

노선결정은 물론 공정계획까지도 박대통령이 직접 지휘했던, 「원맨쇼」였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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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당과 경제 장관들은 신중론이었고 언론과 학계는 반대였다 ....... ]

[ .....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 ]



경부 고속도로 개통


돌격, 그리고 돌관(突貫)-당제터널 공사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당시 현대건설 사장 회고에서




큰일을 할 때는 대개 그렇듯 반대가 있게 마련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화당과 경제 장관들은 신중론이었고 언론과 학계는 반대였다. 이에 더해 [고속도로를 놓기에는 교통량이 적다]는 세계은행의 지적은 반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68년 2월1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는 첫 번째 톨게이트 근처에서 발파음을 터뜨리며 기공식을 가졌다. 4백30억원의 최저 공사비로 4백28Km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모험일 뿐 아니라 건설 회사로서도 잘못하다가는 결손을 보게 될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나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랄 수 있는 8백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하였는데 내가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들여온 중장비는 1천9백대였다. 이 때문에 현대는 경영에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70년대 이후 경영 합리화 촉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탈법, 부실공사는 있을 수 없었다.


이익을 남기려면 우선 공사일정을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현장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공기 단축뿐 아니라 공사의 질도 좋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직원들도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열심히 일하다가 더워서 옷을 갈아 입으면 여름이었고, 다시 정신없이 일하다가 추워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이 내리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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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러,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라. 만약 임자도 못 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는 정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에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어하는데도 너무 더운 지역이라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어 한국에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정부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2주 만에 돌아와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은 바로 중동행(行) 비행기를 탔다. 5일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다.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다.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다.”


중동이 사막지역이라 물 걱정을 하는 대통령에게 정 회장은 물은 어디서든 실어오면 된다고 답했고, 더운 나라이므로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정 회장에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정 회장 말대로 한국의 개미 같은 일꾼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30만명의 노동자가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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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써준 「종이마패」



「포철 神話」의 연출자는 朴正熙, 주연배우는 朴泰俊이었다.

1969년 12월 포항종합제철 공사현장에서 朴泰俊 사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이대환 지음, 현암사 발간 「박태준」에서 인용)



朴泰俊 사장은 포철을 지을 때부터 정치적 압력이나 관료적 행정처리, 그리고 인사청탁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우선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할 때 포철이 공급업자의 선정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부기관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을 시정해야겠다고 별렀다. 문제는 朴대통령에게 直訴(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었다.

1970년 2월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비서실에서 朴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위에 인용한 책에 따르면 朴사장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대통령은 배석 비서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말했다.



『완벽주의자인 임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보고는 무슨 보고. 그래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나?』

『구매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

朴대통령은 설비구매 과정에서 포철이 당면한 어려움과 시정건의를 朴사장으로부터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봐』

朴사장이 메모지에 쓴 것을 읽어본 朴대통령은 메모지의 상단 좌측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한 뒤 도로 내밀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거북할 것 같아서 아예 서명해 주는 거야. 고생이 많을 텐데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리는 이 메모지를 朴사장은 한 번도 써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등뒤에 있다는 확신이 朴사장으로 하여금 포철을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공기업 사장 중 朴泰俊 사장만 청와대에서 獨對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어떤 면에선 기업인들의 조련사이기도 했다. 鄭周永 같은 야성의 인물도 朴대통령 앞에서는 유순해졌다. 대통령의 私心 없는 독려가 기업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움직였다.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조선업을 권유했던 이는 金鶴烈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鄭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미국을 돌아다녔다. 鄭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신 나간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鄭회장은 金부총리를 찾아가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기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鄭周永을 몰아세우다



金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鄭周永 회장이 나서서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소가 꼭 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金부총리는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보고를 올릴 수 없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대통령한테 말하라』고 했다. 며칠 후 金부총리, 鄭회장, 朴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았다. 鄭회장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녀 봤지만 일본도 미국도 아예 상대를 안 해줍니다. 「아직 초보적인 기술단계에 있는 너희가 무슨 조선이며 몇십만t이냐」는 식이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朴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金부총리, 앞으로는 鄭회장이 어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전부 거절하시오. 정부가 상대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러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鄭회장한테도 권했다. 鄭회장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래, 그거 하나 못 하겠다고 鄭회장이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처음에 하겠다고 할 때는 일이 쉽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것 알았을 거 아뇨? 그러면서도 나선 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 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 하겠다, 그러는 게 있을 수 있소?』


鄭회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鄭회장! 일본·미국으로 다녔다니, 그럼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中에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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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

.....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 ]





<박정희>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朴正熙는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말한 평화란 것은 평화공존을 가장한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란 뜻이란 것과 합치되는 이야기이다.

그는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 ..... 심지어 자기 아버지마저 '동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해괴망측한 북괴에게서, 우리는 단 한쪽의 민족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 ........ ]





< 그러므로 나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얼과 역사의 正統性을 이어받아 이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민족의 主體세력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떳떳하고 영예롭게 自覺하고, 통일한국 실현의 역사적 사명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도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自覺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비록 국제정세의 제약으로 4반세기 동안 국토가 兩斷되어 왔으나, 민족전통을 이질적인 공산주의 사상과 광신적인 개인숭배로써 파괴하고, 우리 북한동포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마저 '동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해괴망측한 북괴에게서, 우리는 단 한쪽의 민족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족主體사상을 확립하고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自覺하여, 주변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의연한 자세로서 이에 대처하면서, 북괴의 남침야욕을 저지해 나가기 위하여는, 국민 모두가 총화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



-1972년 3월24일 교육자 대회 치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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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먼저 교육자의 질을 높여야 하는데, 권력우상화의 결과로 인해 교육자를 희망하는 인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교육자는 인텔리이고 인텔리는 혁명화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교육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예로 들면, 대학을 졸업하고 당위원회의 지도원으로 배치된 자가 자기 스승에서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욕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교육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학교(초등학교) 교원도 ‘선생’이라고 높여 불러야 하는데, 당에서 근무하는 젊은 놈들은 교장선생이건 나이든 선생이건 가리지 않고 “동무, 동무” 하면서 아랫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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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0.16. 중공 원폭 실험 성공

1967.6.17. 중공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8.1.21. 무장특공대 31명, 청와대 습격시도. 1.21사태.

1968.1.23. 美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968.2.1.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 ....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 ]

1968.4.1. 향토예비군 정식 발족


1968.8.24.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사건 발표 .

1968.11.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9.7.25.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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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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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2.18. 미국 외교백서,"....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


1970.4. 중공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70.6.5.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6.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암살미수.


1970.7.5.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통고

1970.8. 애그뉴 부통령, 약 5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계획 요지의 발언.


1970.10.2. 중공 국지전 계속지원 호언


1971.3. 주한 미 제7사단 병력 2만 철수

1971.7.9 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키신저 비공개담판

1971.10. 유엔총회는 미·일의 반대를 넘어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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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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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월 2일부터 1985년까지 대우정밀에서 M16A1(콜트 모델 603K) 면허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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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일본 메이지 13년식 무라다(村田)총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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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2.


[ .....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 ........

.....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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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2월 18일에 발표된 미국의 외교백서에는 「어떤 나라의 국방과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1)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였고, 주한 美 지상군의 철수나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이것이 소위 닉슨 독트린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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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0. 김대중 대통령후보


[ ...... 향토예비군폐지 ... 노자공동위구성과 소득의 균분 .......

......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미·일·소·중공의 공동보장책 ....... ]


불균형 고쳐 대중시대 구현

[중앙일보] 197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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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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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9월20일(현지 시간)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로 향하는 김용식 당시 외무장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셜 그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나러 가는 그의 가방 속에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대중국 관계개선과 주한미군 감축을 시도하고 있는 백악관과 펜타곤에 대한 분노가 절절이 녹아있는 편지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 대해 끊임없이 침투공작과 무력도발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정책은 ‘중공’의 지원을 공공연히 받아왔습니다…중공은 북한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의 군사력을 더욱 증강시키기 위해 군사원조 합의를 통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공의 목적이 한국과 여타 아시아에서의 미군철수에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됩니다…한반도에서 외국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붉은 중국’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만약 붉은 중국이 진정으로 긴장완화와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 공산집단의 무력 통일정책 지원과 북한을 강화하는 군사지원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북한이 한반도 긴장완화를 돕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Fm : EA-Marshall Green to : The Secretary, 1971.9.20, ‘Letter from President Park to President Nixon’)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중국정부를 한번도 정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지 않고 대신 ‘중공(Communist China)’ 혹은 ‘붉은 중국(Red China)’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수뇌부 사이의 인식 격차를 뚜렷이 드러낸 것이다. 적십자회담 성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북관, 대중관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이 서신은 중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박정희가 당시 상황을 긴장완화가 아닌 긴장고조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전쟁재발 방지와 한반도 안보에 필수요소인 한미상호방위체제는 강화되어야 하며, 한국군 현대화 프로그램도 신속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목적이 아시아와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인 만큼 중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해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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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말 박정희의 특별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북한 내부를 세밀히 관찰·분석한 결과 ‘북측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 남침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바 있다. 심지어 1972년 4월에 이르러서도 주한 미 대사관이 분석한 박대통령의 의중은 여전히 ‘북한 위협론’에 기울어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Secstate, 1972.4.16, ‘President Park’s View of North Korea Threat’).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가 남북협상을 준비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대북한 노림수와 대내용 노림수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한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은 “박정희가 정홍진에게 대북 비밀접촉을 제의하도록 한 것은 적극적인 남북대화 추진 그 자체보다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전하고 있다(Fm : Amembassy Seoul to : Secstate, 1972.7.7, ‘Assistant Secretary Green’s Conversation with President Park Chung Hee, July 6,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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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남북협상에 부정적이었던 한국 정부와 달리 북한은 1970년대 초반 내내 공세적으로 남북협상을 주장해왔다. 북한의 이러한 ‘평화공세’는 한미관계를 갈라놓겠다는 전술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7·4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이 통일문제 해결에서 일체의 국제정치적 요인을 사상하고 순수한 국내문제로 단순화한 것도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71년부터 계속된 남북대화 분위기가 7·4공동성명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김일성의 ‘남조선 고립’ 계획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이 1972년 2월말 미중정상회담과 5월말 미소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중국, 소련으로 이루어지는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대화 지속이 기대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은 공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남과 북은 공동성명 직후부터 그 문구의 해석을 두고 대립한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7월4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박성철은 “(통일 3원칙은) 김일성 수령이 내놓은 제안에 남조선측이 찬동한 것”이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상 미제국주의자들은 더는 우리나라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침략 군대를 걷어 가지고 지체 없이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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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에너지 위기를 맞아 일대 용단을 ........

..... 1년 국가 예산의 4배나 들어갈 대역사였다 ......... ]



북한의 핵무기와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도입은 남북이 비슷했으나 반세기 후 한쪽은 원전으로, 한쪽은 핵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최성재



2009년 12월에 한국은 원자력 역사상 두 번의 쾌거를 잇달아 달성했다. 12월 4일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여 조심조심 원자력 강국의 전족(纏足)을 내딛는가 했더니,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성큼성큼 타이탄의 걸음으로 단숨에 바다와 대륙을 건너가 프랑스를 따돌리고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140만KW(1400MW) 원자력 발전소 4기를 수주하기에 이르렀다. 건설에 200억 달러, 운영에 200억 달러 도합 400억 달러 규모다. 이승만, 박정희, 이명박 세 대통령 그리고 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력이 모두 큰 일을 담당했다. 짝짝!



1955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고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하여 1962년에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가 가동된 것은 당시의 열악한 사정을 고려할 때, 국부 이승만의 용단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는 소련군 대위 김일성도 뒤지지 않았다. 북한은 1956년에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63년에 실험용 원자로 IRT-2000을 도입했다. 기술자립을 이루기 위해 300여 명을 소련에 유학 보내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영변의 5MW 원자로는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북한이 기술을 자립하여 독자적으로 세운 것이다.



처음부터 김일성은 목표가 원자탄이었다. 그래서 시작은 한국에 못지않았으나 북한에선 원자로로 전기를 전혀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 덕분에 해방 전에는 전기의 90%를 38선 이북에서 생산했으나 북한은 지금 전깃불이 거의 없어서 밤하늘의 별이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관찰된다(‘재간동이’ 황석영은 좋겠지만). 전기가 엉망이니 공장도 90% 문을 닫았고 가전제품도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한국은 처음부터 원자로는 평화적 이용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에너지 위기를 맞아 일대 용단을 내렸다. 연구용 5MW가 아니라 미국의 도움으로 발전용 590MW(59만KW)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뛰어든 것이다. 1년 국가 예산의 4배나 들어갈 대역사였다.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었다. 전쟁을 한 번 일으킬 예산을 원자로 하나에 투입한 것이다. 누가 봐도 얼빠진 후진국 지도자의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광기(狂氣)는 이번에도 비전[光氣]으로 입증되었다. 1978년 한국은 원자로에서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년간 한국은 20기를 차례차례 가동하면서 200만개 부품에 대해 95% 기술자립을 이루고 독자적인 원자로도 각각 100만KW(1000MW)와 140만KW(1400MW) 용량으로 둘이나 개발했다. 이번에 수출한 것은 1400MW용 APR-1400이다. 북한에 건설해 주려던 것은 1000MW 발전시설 OPR-1000 이었다. 5년 정도 더 있으면 100% 기술자립하는 APR+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은 ‘구더기 무서우니까 된장 담지 마라!’는 식의 반핵운동(한국의 친북좌파처럼 이들은 공산독재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는 솜사탕 이해와 고무줄 인내로 대함)에 개의치 않고 안전시설의 연구와 설치에 박차를 가하여 미국, 캐나다, 프랑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그 세 나라의 기술을 몽땅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 전기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했다.



1982년부터 26년간 소비자물가가 178%나 올랐지만, 전기요금은 고작 5.4%밖에 안 올라 한국의 모든 가정만 아니라 모든 기업, 심지어 조폭 포함 지하경제도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오로지 전기의 40%를 차지하는 원자력 덕분이었다. 어떤 나라보다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프랑스는 반핵운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 주권을 내세워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함께 개발하여 핵무장을 갖춤과 동시에 총 59기의 원자로로 전기의 70% 이상을 생산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가동률이 76.1%로 세계 1위인 한국의 93.3%에 한참 못 미친다. 원자로는 아주 미세한 사고에도 자동으로 가동이 중지되는 만큼 안전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반증이다.




미국은 총 104기 원자로 가동률이 89.9%로 높지만, ‘3마일 섬’ 핵유출 사고로 여론이 악화되어 30여년 간 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지 않아 원전 건설 능력이 형편없어졌다. 한국으로부터 배운다. 급기야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준 웨스팅하우스는 일본으로 팔려갔고 이번에 한국의 하청기업으로 들어왔다. 체르노빌 참사를 겪은 러시아의 원자로는 공짜로 지어 준다고 해도 문전에서 쫓겨나는 상황이고, 자원부국 캐나다는 거의 대외활동을 접었다.



원유가 금융위기 속에서도 배럴당 70~80달러를 오르내리자, 대체 에너지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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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27. 휴전협정 체결. 그해 봄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 전부 철수


1973.8.26.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시작, 1979.4.26. 철군완료


1974.2.13.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 ‘수령의 후계자’로 결정.

1974.4.14.‘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

이후 김정일은 자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위반으로 규정하고 엄격히 제재.1974년부터 사실상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 출범



1974.8.15.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육영수 피격 서거.

1974.11.15 제1남침땅굴 발견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1975.2. 김정일 공화국영웅 칭호. 당 중앙위원회 제5기 10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는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

1975년 4월 북경 방문시 김일성 발언을 통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1975.4.17. 캄보디아 공산화

1975.4.30.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퇴로 종결.

1975.8. 라오스 공산화

1976년 태국 주둔 미군 철수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7년 12월 22일 100억 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 9월 26일 朴대통령 서산에서 고대하던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 참관


1979년 미국,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 방위조약 폐기. 주대만미군 철수.






[ ......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 ........ ]




[ ......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

.......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



......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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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30일 소련제 월맹군 탱크 845호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월남기(旗)가 내려지고 월맹기가 올랐다. 사이공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 탱크와 304사단 보병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자유베트남은 패망 이전 수년간 시종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했던 '공산프락치'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3년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됐고, 그 해 3월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 철군했었다. 그 이후 2년 만에 완전 공산화 된 것이다. 미군철수 후 대화로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평화협정문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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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은 부패척결과 반미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연중 계속된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티우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애국을 표방하는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시작했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1975년 자유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무릎을 꿇기에 앞서 이들에게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正體)이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호치민이 1930년 창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전체인구의 0.5%인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이 베트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 간첩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이후였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순수한 애국자연(然) 했고, 미국에서의 반전(反戰)운동에 결정적인 불씨를 지폈다.


간첩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 반전평화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침투가 쉽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기반 확대로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인사들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투쟁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베트남 패망 30년을 맞는 현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그 추(錘)가 친북 좌익세력에게로 기울어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와 반전평화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연일 공공연히 반미집회를 자행하고 있으며, 북한의 요구를 복창하듯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유 민주시민들은 그들에 의해 수구 냉전주의자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언론매체들이 늘고 있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그런 논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대세에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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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 ]





[ ....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


.....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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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그의 남부 침투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전면 군사공격을 하기 전에,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혼란을 가져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순서였습니다. 이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을 격퇴 분쇄하는데 월남공화국이 실패한 것입니다.



언론자유와 인권보호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월남공화국이 내부혼란, 와해를 막으려면 지식인들의 통찰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에 가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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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돌보던 구엔 녹 란(Nguyen Ngoc Lan)신부가 반전과 평화(反戰과 平和)를 외치면서『반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공산전체주의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먹히느냐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공화국 수도 사이공에서 가톨릭 사제복을 걸치고 평화와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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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딘 디엠을 지지하던 가톨릭 사제 찬 후 탄(Tranh Huu Thanh)신부까지도 1974. 9월부터『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티우 대통령을 위시한 월남정부는 가톨릭 사제의 그런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인프레와 불경기로 시달리게 되고, 미국도 월남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고 있을 때, 이 가톨릭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은『월남민주공화국』과 그 산하조직인『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기획, 조직하여 사이공을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벌이게 한 식량요구데모, 공무원 처벌요구데모에 합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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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월남민주공화국』군대가 진격하자『월남공화국』군대는 어이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고, 1975. 4월 30일에 월남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월남은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형법정주의의 법치를 잃어버리고, 가톨릭 신앙이 공산당의 허가와 제한을 받는 처지로 떨어진 것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은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이 번영하는 경제 대신 공산당이 통치하는 극빈국의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타락하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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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1월의 파리평화협정 때부터 1975. 4월 30일 월남공화국 패망 때까지 2년 3개월여 동안 베트남의 똑똑한(세속적인 뜻에서) 일부 신부들이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제 겨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하는『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이런 적대진영 안의 자해분자(自害分子)들을 두고 레닌은『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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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written by. 임광규







1975 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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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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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중앙일보] 1975.03.31



월남 제2의 대도시며 북부 지역 최대의 군사 기지인 「다낭」이 공산군에 함락된 최후의 날인 29일 「다낭」 시내는 약탈과 동족 살륙의 생지옥을 연출했으며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사이공=외신 종합>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수송기 타려다 밟혀 죽고…| 바퀴 상자 속에 7명 탑승…기체에 매달려가다 추락도 | 약탈 성행…군단사령관·공군사단장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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