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닉네임 : 무표정  2019-02-06 02:33:26   조회: 979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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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18. 평양


[ .......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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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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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6. 함경남도 북청


[ .....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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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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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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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



가작 <인생의 갈림길에서 경주로 향하다>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



<해방 직후 고향 마을에 소련군이 들오던 날, 방학 중의 나는 귀향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여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오빠, 빨리 일어나. ‘마우재’가 오고 있대. 빨리 큰길로 나가봐.”

마우재는 소련군인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로서, 그 어원은 “말이나 소같이 미욱하다”는 뜻의 馬牛者(마우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說(설)이 있다.


큰길로 나갔더니 소련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시계를 찬 내 왼 팔목을 붙잡았다. 그 자가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런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 그 자는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시계를 찬 내 팔목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고 자기 손목에 나의 시계를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소련군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1950년에 들어서자 내가 보기에도 남침전쟁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함흥에도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로 접어들자 모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어 함흥의 주둔지엔 1개 소대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바로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그 결의문은 “인민군에 지원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정치보위부 요원은 강의실 앞뒷문을 막고 입대지원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인민학교의 교사를 징발해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30∼40대의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학생복을 입고 장교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장정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 지 1주일 되던 날, 평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친구 범은이가 나에게 탈영을 제의했다.>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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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3881&C_CC=AZ

광복 70주년 현대사 체험수기 심사 後記








[ .......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상의껏 경제재건을 위하야 노력하야 주십시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1999년 8월호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⑤-人民軍 참전자들의 證言


『환영 인파를 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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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軍의 시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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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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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199908100024






1950.6.28. 서울


[ ......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 ]



2008.06.01 통권 585호(p550~567)


[6·25 58주년 특집]


사학자 이현희 교수가 겪은 전란 속 서울

눈 부릅뜬 시체더미, 남녀 포로 나체 연행… 30년보다 긴 3개월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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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8일 수요일, 서울 함락



새벽 3시경쯤,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이며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침에 들으니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근심 어린 쑤군거림이 들린다.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이 다리가 끊어져 물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600여 명과 차량 50여 대가 강으로 떨어져 대부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리가 난 것 같다. 서대문에 있는 조흥은행에 갔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오전 중에 서울 시내가 거의 다 함락됐다고 한다. 앉아서 날벼락 맞은 격이다.


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전예용 부시장 집은 인민군 정보원인 듯한 남녀 5~6명이 서성대며 주위를 살피고 뭔가 정리하는 것 같다. 그 집을 빼앗아 본부로 쓰는 듯하다. 호신용 권총만 찬 채 아래 위를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우리집 뒷산으로부터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죄수 10여 명이 떼지어 오고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폭파되면서 탈출해 뒷산을 넘어 북아현동으로 온 것 같다. 그들은 거칠게 주민들은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다 같이 김일성 장군 만세와 인민공화국 만세를 힘차게 부릅시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한다. 주민이 우물우물하고 망설이자 소리를 지르며 “이 간나새끼들 왜 안 따라 부르느냐.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뭐가 불만인가!” 하면서 죽일 것 같은 몸짓으로 만세를 강요하고 인공기를 흔들어댄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가늘게 만세를 외치고 인공기를 흔들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자치대원이란 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쌀 있느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하겠다. 숨기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니 정직하게 신고하길 바란다”라고 위협한다. 조사해 가더니 저녁에 와서 그 쌀을 다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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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02: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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