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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1981년에는 그만둘 거야
 닉네임 : 1981  2019-01-27 22:32:25   조회: 1235   
박대통령의 청와대 일기 원본(2)


『핵을 가져야 살 수 있다』




朴대통령은 핵개발과 같은 극비사항에 대해서도 큰딸에게 이야기하였다. 朴槿惠씨가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사정은 대강 이러하다.


『우리는 핵을 가져야 살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1971년에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제기되었지요. 이런 불안감에서 아버님은 핵개발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아요.


그러다가 포드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아버님을 안심시킨 것 같아요. 대통령이 바뀌어도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핵개발을 포기하셨지요.


그런데 카터대통령이 집권하자 주한미군과 핵을 빼가겠다고 나왔어요. 아버님은 한번 미군이 철수하면 재개입은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다시 핵개발에 착수하신 것입니다』



朴대통은 카터 대통령이 집권한 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로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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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朴槿惠씨는 카터의 부인 로잘린 여사와 면담을 가졌다고 한다. 『그때 저는 조깅에 비교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깅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하루에 10km를 뛸 수는 없다. 몸이 약한 사람이 무리하게 조깅을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 나라도 같은 것 아닌가.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의 사정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 해야 한다. 더구나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은 민주주의를 실험적으로 해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날 만찬 때 카터대통령이 제 옆에 앉았어요. 아내로부터 나의 이야기를 잘 전해들었다고 합디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朴대통령은 인권탄압문제로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한 고독감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미국과의 갈등은 국민들에게 하소연할 수도 크게 떠들어 항의할 수도 없는 성격의 문제였다. 朴대통령은 말년에 청와대출입 기자들과 술을 마시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 당대의 인기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대로 하여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를 자주 보이곤 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나도 국민의 인기를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역사는 나를 알아줄 것이다」 고 말하시더군요. 욕을 안 먹으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해먹겠다는 게 아니란 말이야. 국민소득이 2천 달러가 돼야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한탄하시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 가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나. 하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일기에 지금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훗날에 가서는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야당 당수와 회담하면 대체로 동감을 하게 되는데 돌아가서는 복잡한 당내 사정 때문에 합의사항이 뒤집혀지는 것을 보고 답답해 하시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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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7-16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19&C_CC=AC









박정희 대통령과 자주국방, 핵무기 개발.



장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시 자주국방의 염원에 불탔다. 그는 국산 기술로 개인 소형무기를 생산하고, 발칸포를 만들었으며, 미사일을 자체 개발했다. 그런가하면 전세계 핵관련 학자들을 불러모아 핵무기를 만들기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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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출신 대통령 재임시 자주국방 염원에 불타

"핵무기 개발 박정희 연구진 붙들고 기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인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해외의 학자들을 유치하고, 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을 해외에서 도입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75년 무렵부터 핵무기 개발을 공공연히 선언했다. 물론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핵을 거둬갈 경우를 전제로한 선언이었다.



박정희, 핵무기 개발 공개선언



박정희는 1975년 6월26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위해 핵무기 개발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고 피력했다.

그 후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미국의 카터행정부가 주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는 정책을 추진한 시기(1977-79)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빠져나갔을 때의 군사적 공백을 핵무기로 막아보려는 자위 수단에서였다. 그는 1977년 5월 20일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 석상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은 있다. 이번에 하비브가 오면 핵을 가지고 갈 것인지를 분명히 따지고 핵을 거둬간다면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일했던 선우연(작고)은 <원간조선>에 기고한 '박정희 육성 증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말하면서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원자탄을 세계 앞에 공개하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 사퇴 성명을 내겠다는 것을 피력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될때 까지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연은 핵무기와 관련된 고급 비밀을 공개 , 박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어떠했으며, 어느 정도의 핵무기 개발기술에 접근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있다.


1979년 1월 3일 새해벽두, 박정희는 부산 해운대 비치호텔에서 서울에 있는 선우연 공보비서관을 긴급하게 불렀다. "내가 오늘 자네에게 꼭 할말이 있어 불렀네. 내가 1981년에는 그만둘 거야" " 아직 할일이 많은데 어떻게 1981년으로 못박으십니까?" "이유가 있어.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국방과학연구소장 한테 보고 받았어. 핵폭탄이 생기면 김일성이도 감히 남침을 못할거 아닌가. 북괴가 남침 하더라도 우리가 핵을 던지면 북한도 날아갈 것 아닌가. 쳐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방어용이야. 1981년 까지 완성이 되면 그해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를 부활시켜서 추기 사열할때 원자탄을 세계에 공개하겠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퇴성명을 내고 물러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우 비서는 그날 들은 내용을 암호로 기록하여 의원회관 금고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핵무기 개발 중 사망 통곡"



박대통령과 가까웠고 17년 의원 재임 기간동안 줄곧 국방위원으로서 국방 관계 정보를 다뤄왔던 김용태(작고. 전 공화당 원내총무)는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대통령이 핵개발에 열정을 보였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지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서 연유했다. 우리의 생존과 국가의 자위를 위해서는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본것"이라고 전제하고 "해외에서 유치한 고급 두뇌를 대덕연구단지에 일반인들과 격리해서 살도록 하면서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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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간 현대 377호. 2004년 9월 23일자)







[ ...... 미국은 한국에서 지상군의 완전 철수 계획을 밝혔다. .........


...... 미군의 도움이 없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가위기관리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 ]




박정희 마지막 육성 “자네들 괜찮나” … JP “박 대통령은 혁명가답게 떠났다”


[중앙일보] 입력 2015.08.21


전영기 기자
최준호 기자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가로 일어나서 혁명가답게 떠났다. 그의 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무혈혁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18년 통치는 유혈 속에 막을 내렸다. 그 5년 전 부인인 육영수 여사마저 총탄으로 운명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73> 10·26 그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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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일으켰다. 그의 18년은 기복이 많았지만 국민들이 두 다리 펴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의 세월이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아 김일성의 북한과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기아와 극빈의 민생고를 해소했다.



무한경쟁의 국제무대에서 고속도로, 철강, 조선, 전자와 자동차의 나라로 만들었다. 70년대 중반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GNP 1000달러인 중산층 사회를 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결국 61년 혁명공약에서 대통령이 그렸던 그런 나라가 성취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가운데 우리같이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기적 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던 것이다. 18년 짧은 세월 동안,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건 박 대통령의 혁명적 성격 덕분일 것이다. 혁명은 무엇인가. 구질서를 뒤엎고 새 질서를 만들어 세상을 바꿔 놓는 것이다. 뒤집고 만들고 바꾸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은 의지에서 시작한다. 힘이나 숫자가 아니다. 5·16 거사엔 60만 명 군인 중 고작 3600명이 참여했다. 



 5·16 뒤에도 혁명은 계속됐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 혁명을 이끌었다. 근대화는 국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정권을 뒤엎는 것보다 더 어렵다. 박 대통령은 빈곤과 체념 속에 혼미를 거듭하는 겨레에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붙였다. 박 대통령에게 근대화는 신앙이었다. 그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절대빈곤을 추방하는 일을 먼저 했다. 5000년 민족 역사를 지배했던 항상적 굶주림, 이것을 해결해야 전근대적인 의식 구조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 건 근대화의 밑천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과거를 따진다면 일본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지만 오늘과 내일을 위해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한·일 청구권 협상을 진행하면서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같이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박 대통령은 하야(下野)하라는 험악한 요구까지 받으면서도 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였다. 한국인의 대외 개방정신은 이렇게 해서 열렸다. 서쪽은 중국, 북쪽은 소련과 북한, 동쪽은 3000㎞ 일본 열도에 포위돼 맹장처럼 대륙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게 한국이다. 더 이상 폐쇄와 침체가 한국인의 숙명이어선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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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 유신도 박 대통령의 혁명적 발상에서 비롯됐다. 혁명은 속성상 정해진 기한이 있다. 그 기한 안에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성질이다. 혁명의 한시성 때문에 유신은 과격하게 흘렀다.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를 유보시켰다. 국가 지도자는 나라의 어떤 한 시기에 국가와 국민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고독한 선택을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절정에 도달한 북한의 군사력으로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치르겠다고 호언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지상군의 완전 철수 계획을 밝혔다. 패망으로 향하는 월남의 부패, 분열, 정쟁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국력 조직화, 능률 극대화, 자주 국방, 중화학 공업의 길로 갈 것인가.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다. 이 선택은 민주주의 후퇴를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을 믿지 않았다. 미군의 도움이 없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가위기관리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박 대통령은 유신 초기에 이 체제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나한테 종종 했다. 74년 국무총리였던 나는 수원 새마을연수원의 고위공무원 교육에서 “유신체제는 시한성이 있으며 영원무한한 것은 아니다”고 공언했다. 공화당의 TK(대구·경북) 인사들을 비롯한 청와대 친위 그룹은 내 얘기를 각색해서 박 대통령한테 고자질하고 나를 실각시키는 재료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들의 웅성거림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자기가 이룬 성취에 의해 희생됐다. 혁명가의 비감한 역설이자 허망함이다. 70년대 들어 산업화의 결실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자유와 민주의 열망을 갖게 됐다. 이들이 부마사태의 중심 세력이었다. 유신 말기에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자 대통령의 초심이 흔들렸다. 권력의 타락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79년 10월 17일 생애 마지막 일기를 남겼다. 부마사태가 터진 날이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은인은 잊혀도 은혜는 남는다는 말이 있다. 박정희는 잊혀도 박정희가 남긴 민족 중흥과 조국 근대화, 자주 국방과 ‘하면 된다’는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494480








1964.10.16. 중공 원폭 실험 성공

1967.6.17. 중공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8.1.21. 무장특공대 31명, 청와대 습격시도. 1.21사태.

1968.1.23. 美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968.2.1.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 ....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 ]


1968.4.1. 향토예비군 정식 발족


1968.8.24.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사건 발표 .

1968.11.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9.7.25.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

[ .... 3. 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 ]


1970.2.18. 미국 외교백서

"....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


1970.4. 중공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70.6.5.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6.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암살미수.


1970.7.5.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통고

1970.8. 애그뉴 부통령, 약 5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계획 요지의 발언.


1970.10.2. 중공 국지전 계속지원 호언


1971.3. 주한 미 제7사단 병력 2만 철수

1971.7.9 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키신저 비공개담판

1971.10. 유엔총회는 미·일의 반대를 넘어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였다.



1973.1.27. 월남 휴전협정 체결. 봄에 외국 지원군 전부 철수


1973.8.26.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시작,

1979.4.26. 철군완료



1974.8.15.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육영수 피격 서거.

1974.11.15 제1남침땅굴 발견.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1975.2. 김정일 공화국영웅 칭호. 당 중앙위원회 제5기 10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는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


1975.4. 북경 방문시 김일성 발언을 통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1975.4.17. 캄보디아 공산화

1975.4.30.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굴욕적 패퇴로 종결.

1975.8. 라오스 공산화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7년 12월 22일 100억 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 9월 26일 朴대통령 서산에서 고대하던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 참관







1971.1. 박대통령 신년사



국력이 약하면 나라가 기울고, 나라가 일어서려면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흥망성쇠의 기복이 무상했던 인간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더군다나 오늘과 같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와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있어서는 힘없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영원히 낙오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금년은 … 우리의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련이 예상되는 해라는 점에서 실로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 이러한 시련의 징후는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 속에서 이미 시작됐으며, 중공(中共)(註: 당시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中共, 대만을 中國이라 불렀다)은 그 영향력을 강화해 가고 있고, 소련은 전통적인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점차 물러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가상 적국들이 「이 지역에 힘의 진공상태가 생겼고, 공산세력이 자유진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의 입장에 올라섰다」고 그릇 판단하기 쉽게 만들고 있습니다. …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註: 당시는 북한을 북괴라고 불렀다)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올해부터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


이 시련의 극복을 위해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이며 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60만 국군을 더 정예화하고 250만 예비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 또한 경제건설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전면적인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도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하고 수출을 증대시켜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산업구조를 빠른 속도로 고도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1971.1.28. 국방부 연두순시



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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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은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美 7사단뿐만 아니라 앞으로 5∼6년 사이에 모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이 추진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이 완전 철수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의 기본 「틀」이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朴 대통령은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군의 월남파병 결정 때에 존슨 美 행정부가 얼마나 고마워했는가를 엊그제 일같이 기억하고 있는 朴 대통령으로서는 주월 한국군 2개 사단이 지금 이 시각에도 미군을 도와 피를 흘리고 있는 이 시기에 닉슨 행정부가 이러한 태도로 나오는 데 대해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신년사에서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朴 대통령은 이러한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살고있는 힘없는 약소국가 대통령으로서의 아픔을 되새겼을 것이다.


前記 김정렴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朴 대통령은 "美측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초월해야 한다. 자주국방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내외자가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 되어야 하며, 첨단 정밀무기는 고가이므로 외화는 신종 고성능 무기 도입에만 충당하고 전통적 기본무기는 하루 빨리 국산화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주한미군 완전철수가 앞으로 5∼6년 후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해이며,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2∼3년 사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국군의 현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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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eoi.org/10ceoi(text)/10ceoi(text10).htm






1971.3. 주한미군 제7사단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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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행정부는 71년 3월에 자동개입에 대한 보장도 없이 주한미군 제7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5∼6년 후에 주한미군은 완전 철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6·25 직전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 김일성으로서는 6·25 때와 똑같이 또 다시 오판할 소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朴 대통령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71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당시 우리의 절박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요망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 한국이라는 자유의 교두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수호할 것이라는 명백한 의사를 소련이나 중공이나 그리고 북한에게 어떠한 형식이나 경로를 통해서라도 꼭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다.」

6·25 직전 주한미군이 철군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애원하던 말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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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4.30.


[ .....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 ........

.....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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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 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 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 1일,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사)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서)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 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 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자립)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駐韓미군 철수에 관한 朴 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駐韓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 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朴 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 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 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 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공언)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 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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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秘話/미국은 박정희의 核개발을 이렇게 좌절시켰다!

趙甲濟









[ ......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 ]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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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박정희 日記



만고역적에게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千秋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 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大業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소서!









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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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간 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 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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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1.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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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는 대전·부산·인천·광주유세에서 향토예비군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자신이 집권하면 미·일·소·중공에 한반도서의 전쟁 억제에 대한 공동 보장을 받겠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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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13. 노무현 정권 민보위는 남민전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읍니다.



행정자치부, 소위 ‘남민전’사건 관련자,‘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

행정자치부



(서울=뉴스와이어)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河炅喆)는 2006. 3. 13.(월), 제162차 심의를 개최하여 소위 ‘남민전’ 사건 관련 신청자 중 29명에 대하여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 받은 것으로 인정함(단, 중앙위원 이재문, 신향식, 이해경에 대해서는 검토미필로 보류함)



사건개요


소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는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조직으로 1977년 1월 남민전의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反)유신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 등 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였다.



‘민주구국노동연맹’의 결성시도 중이던 1979년 10월 4일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을 비롯하여 1979년 11월까지 대부분의 조직원이 구속되고, 공안기관에 의해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 받은 사건이다.



남민전 중앙위원회 서기 이재문은 사형집행 전 1981. 11. 22. 옥중사망 하였고, 신향식은 1982. 10. 8. 사형집행 되었으며,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 김남주, 이수일 등 핵심 관련자 다수가 중형(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인정결정 이유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할 목적으로 소위 남민전에 가입하여 활동

사실관계가 확인되는 판결문과 관련자료를 중심으로 판단하건대, 제162차 본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은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자 유신체제를 타파할 목적으로 소위 남민전에 가입하여 반유신활동을 전개한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신청인들의 항거행위는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로 인정


1977. 1. 18. 일명 ‘1월 투쟁’으로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민주정부를 세우자는 취지로 ‘민주투쟁선언문’을 작성하여 배포하고, 1978. 1. 6. 가사체 4·4조로 작성한 “어화 세상 사람들아” 제하의 유신반대 유인물 2,000매를 ‘민주투쟁국민회’ 이름으로 제작하여 배포하고, 1978. 8. 9. 일명 ‘파라슈트’ 작전으로 “격! 몰아내자 박정희” 제하의 유인물 20,000매를 제작하여, 같은 해 11. 에드바룬에 매달아 약 17,000매를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한 행위, 1978. 8. 14.과 10. 4.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민중의 소리’ 제1호 및 제2호를 제작하여 대학가와 시내 일원에 배포하고, 1978. 10. 5. 광화문 시위를 지원하기 위하여 “격 때는 왔다, 드디어 왔다” 제하의 유인물 2만여장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79. 2. 28. 청년학생위원회가 주관하여 일명 ‘횃불작전’으로 “기미항쟁의 불꽃을 박정희 타도의 횃불로” 제하의 유인물 2,000매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1979. 8. 28. 박정희 타도결사대 명의로 소위 ‘꽃불작전’으로 “압제자 박정희 타도하자” 제하의 유인물 5,000매를 제작하여 서울 일원에 배포한 행위 등 8차례에 걸친 반유신 유인물 제작 및 배포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다.

소위 ‘봉화산작전’(1978. 12. 5.), ‘지에스작전’(1979. 3. 5.), ‘땅벌작전’(1979. 4. 27.) 등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한 자금마련 행위,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취득하여 보관한 행위 역시 그 궁극적 목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판단되는 바, 본 위원회는 위 항거행위를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신청인들에 대하여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제2조 제2호 라목, 제1호의 규정에 의거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


제162차 본위원회에 소위 ‘남민전’ 사건 관련 총37건(명예회복 33건, 보상 4건)을 상정하여, 심의결과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31건(명예회복 29건, 보상 2건), 불인정 2건(명예회복 1, 보상 1), 심의보류 4건(명예회복 3, 사망 1)이었다.'

2006-03-14

http://www.ohmynews.com/cp/newswire/newsa_view.asp?nwa_code=100227







* 전대협동우회,참여연대,민변,전교조,민노당 등 운동권의 남민전만세입니다. "동지"이고 "열사"입니다.



2006.3.15.


[...... 남민전 동지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 ]



[...... 남민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 ]

[...... 이재문, 신향식 열사의 경우 민족민주 운동 진영에서 이미 열사로 인정되어 추모되고 있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지하기 바란다 ........ ]




[....../민주노동당/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대협동우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참여연대/.../통일광장/학술단체협의회/.../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성명> '남민전' 사건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을 환영하며


[연합뉴스 보도자료 2006-03-15 ]




'남민전' 사건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을 환영하며, 정부는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젊음을 바친 수 많은 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하고자 2000년 8월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보상심의위에서 2006년 3월 13일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29명에 대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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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1970년대 폭압적인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기 위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하여 활동하여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은 말기에 다가가면서 사회적 민주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민주주의 행위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등 폭압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이수일 등 많은 활동가들이 조직을 구성하여, 박정희 독재 정권을 파탄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은 모든 공안기구를 동원하여 가담자들을 투옥·구금하였으며, 모든 고문기구들을 동원하여 반인권적 고문행위를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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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남민전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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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여야 한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 사과와 명예회복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하고, 미흡한 명예회복 후속 조치를 위하여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명예회복법 2차 개정안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세워 조속히 개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상심의위원회는 이번 심의에서 보류된 이재문, 신향식, 이해경 포함 남민전 사건 관련 21건에 대하여도 조속히 심의에 들어가 올바른 결정을 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이재문, 신향식 열사의 경우 민족민주 운동 진영에서 이미 열사로 인정되어 추모되고 있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지하기 바란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하여 투쟁해 온 남민전 동지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2006년 3월 15일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상임대표: 강민조, 권오헌, 문영희, 박중기, 오종렬, 조준호, 정종열


민주화운동정신계승부산연대/민주화운동정신계승인천연대/대전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70민주노동자회/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강제징집피해자모임/관악민주포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주노동당/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언론운동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불교인권위/사월혁명회/사노맹동우회/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사회진보연대/새사회연대/장애인의꿈너머/전국장애인연맹/실천불교전국승가회/양심선언자모임/여성단체연합/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인권목회자동지회/인권실천시민연대/인권운동사랑방/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혁당대책위원회/남민전대책위원회/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전대협동우회/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회/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전국빈민연합/참여연대/천주교인권위원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통일광장/학술단체협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 ]


[.... 과도기적인 정부를 수립하거나 연방형식의 정부 등을 세워 궁극적으로 북괴가 목표한 적화통일을 ...... ]




전선기 땅에 묻고 꽃불 작전

경향신문 1979.11.13. 기사(뉴스)




전선기 땅에 묻고 꽃불 작전

남민전 자수한 임헌영 등과 일문 일답

주택가에 버젓이 인쇄기까지 갖춰

민청학련 사형자 옷 오려내 기 제작

학원가에 불온 삐라, 봉화산 작전도




국가변란을 기도해온 소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관련자들은 " 이조직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괴의 무력적화통일 노선에 따른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건설에 있다"고 밝혔다. 12일 경찰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들을 선동, 남한을 내란의 상태로 몰아 넣어 현정권이 물러날 경우 과도정부를 이룩, 연방 형식의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고 말했다.또 이들은 "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사회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재벌급 기업인들의 집을 털려 했다"고 밝히고 "불온 유인물을 살포, 학생과 시민들을 선동해 왔다"고 태연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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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가명 한민성 상황 출판사 대표)과의 일문일답.


자수동기는?

답= 평소 좌경적인 이념과 사고를 가지고 활동해 오다 같은 이념인 남민전에 가입했으나 이들의 조직과 활동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범죄집단임을 알고 78년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다 이번에 자수했고 사상적으로도 전향했다.


남민전의 성격은?

답=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인사들로 조직된 단체로 알제리 베트남 전선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이다.


투쟁목표와 투쟁방법은?

답= 2단계 목표가 있는데 잠정적 목적은 반공사상이 투철한 현체재하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우므로 현정권을 타도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남민전은 지하에 숨어 있고 민주투쟁위원회란 산하단체를 밖으로 내놓고 각종 유인물 살포, 노동자 학생 농민들을 소요시켜 무정부상태가 오면 과도기적인 정부를 수립하거나 연방형식의 정부 등을 세워 궁극적으로 북괴가 목표한 적화통일을 이룩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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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 (가명 허균 전J여중교사)과의 일문일답.


꽃불1호작전이란?

답= 지난 8월 28일 남민전 산하에 있는 민주구국학생연맹이 주체가 돼 청량리 청산학원, 서울역 앞 5층 빌딩, 무교동 서울빌딩등 3곳에 4천장의 전단을 살포했던 작전을 말한다.

나는 행동대장이었으며 1개조 3명씩 3개조가 투입됐다.


민주구국학생연맹과 남민전의 관계는 ?

답= 금년 2월 중순 남민전 조직확대사업으로 결성된 것인데 목적은 학생 근로자 등을 조직, 선동하는 데 있다.


허균이란 가명을 택한 이유는?

답= 고를 균자로 평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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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 ......... ]



"수령님 전사로서 남조선 혁명할 것"···南民戰의 충성서신②


written by. 김성욱





左翼사건실록을 통해 본 南民戰의 실체



대검찰청 공안부는 1981년 10월20일 ‘좌익사건실록’ 제12권을 발간, 남민전 사건에 대한 정리된 입장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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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검찰청은 남민전에 대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이자 남한혁명 단체로서의 정통성을 계승한 비밀지하당 사건”이라며 “이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따른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기도하면서 그들의 전략을 교과서적 지침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실록에 따르면, 주범인 이재문은 조직원들에게 “남민전의 조직목적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직접 목표로 하고 있다. 투쟁에 의해 정권타도의 목적을 달성하였을 때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주동세력이 미리 확보되어 있어야 하는 바 남민전은 바로 그와 같은 주동세력”이라고 교육시켰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남민전은 金日成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金日成에게 바치는 서신과 보고문을 수차례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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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경애하는 주석 김일성동지!


오늘 우리는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버이 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분단 30년이 가져온 5천만 겨레의 고통과 전 남조선 인민들의 절절한 염원과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열화 같은 신념을 담아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삼가 보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의 품에 굳게 뭉친 조선노동당의 영도 하에 북조선은 일제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 사회주의적 개조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강력한 사회주의의 대 공업국으로 전변하였습니다...


국제공산주의의 운동사에서 김일성 원수님께서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주체사상으로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을 거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5천만 조선민족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조국이요 아세아동방의 사회주의의 강력한 전진기지이며 블록 불 가담 나라 반제투쟁의 영향력 있는 지도국으로 그 위광은 날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은 패망한 일본제국주의의 자리를 빼앗아 미군이 상륙한 날로부터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에게는 지상천국으로 되었으나 모든 남조선인민들에게 그네들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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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들인 투쟁 속에서 자라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평양으로부터 울려오는 주체사상 강의에서 혁명이론을 배우고 각계각층 대중과 손을 잡고 싸우는 마당에 대중공작과 지도의 실천을 익히고 있습니다...


투쟁의 국면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대중투쟁을 지도해 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나라 안팎에서 조성된 모든 주, 객관적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1976년 2월29일 마침내 역사적인 남조선 민족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남조선혁명은 남조선인민의 힘으로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어 용약 결집된 남조선민족 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에는 혁명가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소시민, 교수와 언론인, 문인, 군인, 여성 등 각계각층 대표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항일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기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전사들은 불굴의 투지와 결의 규율 인민대중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남조선에서 외래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를 쓸어버리고 남조선 인민들을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고 강산을 뒤흔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5천만 조선민족의 어버이시며 경애하는 우리 공화국의 주석이신 김일성 동지의 적의 탄압과 폭압 속에서 결사 투쟁하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수령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시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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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민족 해방전선승리 만세!
조국통일 만세!


1977년 11월7일

서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드림”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8341









박정희 100돌 기념우표 발행 ‘없던 일로’



입력 2017.07.12

이서희 기자


우정사업본부, 박정희 우표 발행 전면 취소



미래창조과학부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이하 박정희 우표)를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우본이 발행이 결정된 우표를 재심의해 발행 취소한 건 처음이다.


12일 우본에 따르면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이날 박정희 우표 발행을 재심의하는 임시회의를 열고 발행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최근 미래부노동조합이 발행 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등 논란이 된 데 따른 것이다. 우본 측은 “임시회에는 모두 12명이 참석했으며 표결결과 발행철회 8표, 발행추진 3표, 기권 1표가 나왔다”고 밝혔다.


박정희 우표 발행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4월 경북 구미시의 우표 제작 요청을 한달 뒤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며 확정됐다. 이 우표는 디자인 도안을 마무리하고 9월에 60만장을 발행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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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7121843072273
2019-01-27 22: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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